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돈이 정말 그렇게 중요할까?

 

오늘날 사회는 대체적으로 진보하고 있지만 도덕적 해이가 심해지고 사람들의 수준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 심지어 도덕 파괴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이 지경이 된 데는 여러 복잡한 원인들이 있겠지만 주요 원인은 전통 가치관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시장경제 체제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물질만능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진정한 가치가 변질되는 등 부정적 현상도 초래했다. 촌지를 받고, 수수료를 챙기며, 요금을 속여 받고, 뒷거래가 오가는 등 온갖 부정부패가 만연할 뿐 아니라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고도 모르는 척하거나 금전적 가치를 우선적으로 따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현상은 물질만능주의가 사회를 계속 병들게 하고
있다는 증거다.
돈이 정말 그렇게 중요할까?
유학의 수신은 가치관을 바르게 세움으로써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한다. 유학은 줄곧 사람의 도덕적 가치가 물질적 이익에 우선한다는 가치철학을 정립했다. 공자는 “이득을 보면 옳은가를 먼저 생각하라”는 견리사의見利思義와 견득사의見得思義의 정신으로 의義와 이利의 관계를 정립했다. 공자는 의가 이보다 가치 있고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의에 부합하는 이는 취할 수 있으며 부를 추구할 수도 있다. 교편을 잡은 선생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의에 부합하지 않은 이는 결코 취해서는 안 된다. 유학자들은 유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의가 이에 우선하고 의로써 이를 다스린다는 ‘선의후리先義後利 이의솔리利義率利’라는 유학의 기본 가치관을 정립했다. 가치관은 사회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구현되어야 한다. 도덕적으로는 의로써 이를 다스려야 하고 경제적으로는 의와 이가 함께 성립되어야 한다. 도덕적 가치에서 보면 반드시 의가 이를 주도해야 늘 선한 가치의 이득을 얻게 되지만 경제적 관점에서는 모두가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 구세제민救世濟民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이 둘은 매우 중요하며 오로지 이만을 고려해서도 안 되고 의만을 고집해서도 안 된다. 반드시 의와 이가 함께 실현되어야 한다.
윤리 도덕의 수준을 개선하려면 사회를 이루는 개인의 도덕 수준을 높여야 하고 이를 위해 수신양성이 이루어져야 한다. 수신양성의 관건은 물질에 대한 욕망과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이다. 맹자는 식욕과 색욕 그리고 삶에 대한 정당한 욕망을 기본적으로 인정했다. 이러한 기본 전제에서 출발하여 과욕寡欲, 즉 적게 욕망할 것을 주장했다. 삶, 색, 부, 명예는 모 두 사람이 욕망하는 것이다. 또한 더 가지려 하고, 더 유명해지려고 하는 것 역시 공통된 인간의 욕망이다. 모두에게 부를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긍정한다면 통치자가 국가를 다스릴 때 백성의 정당한 욕망을 살피고 그들이 평생 큰 불만 없이 살 수 있도록 인정정치를 실시하는 건 당연하다.
맹자는 삶의 욕망과 예의를 함께 추구하기 위해 “마음을 기르는 데 욕망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과욕이다. 과욕하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를 수 있다. 공명정대하여 양심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호연지기가 하늘과 땅 사이에 충만하면 마음이 물질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 결국 돈이나 지위에 현혹되지 않고 빈천해도 뜻을 바꾸지 않으며, 권세와 무력에 굴복하지 않는 대장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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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를 읽고 장자에게 배운다』 중에서

 

 

 

 

쓸모 있거나 혹은 쓸모 없거나

 

이 일이 있고 나서 혼란에 빠진 장자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물었다.
“산 위에 있던 큰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베이지 않았는데, 산 아래에 사는 오리는 쓸모가 없어서 죽어야 했습니다. 도대체 쓸모가 있어야 합니까, 없어야 합니까?”
장자가 대답했다.
“나라면 늘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 사이에 있겠다. 이때 중요한 것은 판단이다. 쓸모가 있는 편이 안전하다면 그쪽을 선택할 것이고, 쓸모가 없는 편이 더 안전하다면 당연히 그쪽을 선택해야지. 그러니 정확한 판단을 하려면 인생에 대한 풍부한 지혜와 여러 상황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장자를 아무런 구속 없이 자유롭게 살았던, 현실 세상과는 동떨어진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들려준 우화는 소탈하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아 자유롭지만 실제와는 거리가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장자』 내편內篇 「인간세편人間世篇」에서는 관료사회, 특히 군신관계를 다룸으로써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을 묘사했다.
양계초梁啓超의 저서 중에 『음빙실전집飲氷室全集』이 있다. 여기서 음빙飮氷은 본래 『장자』의 「인간세편」에서 나온 말이다. 이야기는 이러하다. 한 대신이 아침에 왕의 명을 받는 날이면 밤에 얼음을 먹었다. 너무 긴장한 탓에 몸속에 열이 생겨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국왕의 명이니 지체없이 조속히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만 조급해졌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명을 완수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밤마다 얼음을 먹었다. 여기서 음빙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렇듯 장자는 관료사회뿐만 아니라 상업사회, 부귀와 빈천의 관계를 비롯해 사람들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관계에 대해서도 이해가 깊었다.
무슨 일이든 일단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만 상황에 알맞은 적절한 행동을 정할 수 있다. 즉 장자가 쓸모가 있음과 없음 사이에 있겠다고 한 말은 판단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도가사상에서는 기본적으로 당신이 안전하게 천수를 누릴 것을 주장한다. 천수란 본래 타고난 수명을 말한다. 도가사상은 본래 타고난 수명이 있다면, 그것을 단축시키는 어리석은 일도, 그것을 늘려 신선이 되겠다는 헛된 바람도 갖지 말라고 한다. 물론 신선의 개념은 『장자』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지만, 그것이 장자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다. 신선은 단지 설명을 위해 도입된 일종의 도구일 뿐 수련을 한다고 해서 정말 신선이 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장자가 살던 당시 가장 쓸모 있다고 인정받았던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유가를 창시한 공자다. 이에 대해 그는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들려주었다. 하루는 공자가 노자를 방문했다.
“고생고생해서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악기樂記』, 『역경易經』, 『춘추春秋』의 육경을 공부했습니다. 확실하게 분석도 마쳤고, 성왕聖王의 이상도 이해하게 됐습니다. 이에 바탕을 둔 소견을 가지고 72분의 국왕을 만나뵈었지만 아무도 저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유용과 무용 사이에 있기
공자는 실의에 빠진 나머지 노자에게 그 이유를 물으러 간 것이다. 노자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며 공자를 꾸짖었다. 심지어 공자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모두 고인이 남긴 찌꺼기이지 정수가 아니라고 나무랐다. 그리고 도야말로, 도를 깨우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수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조상이 남긴 경전을 보물처럼 받든다. 하지만 문자는 단지 매개체일 뿐 진정한 의미는 그 안에 들어 있지 않다. 그래서 노자는 공자에게 그러한 조언을 한 것이다. 일반 사람들이 볼 때 공자는 아주 유용한 인물이다. 그러나 장자가 볼 때는 시대적 흐름을 읽지 못하는 인물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유가를 단 네 글자로 설명했다. ‘추주어육推舟於陸’ 즉 배를 밀어 육지로 올린다는 뜻이다. 배가 물 위에 있을 때에는 제구실을 할 수 있지만 육지로 올라가면 움직이지 못한다. 장자가 다소 극단적으로 비유한 면이 있긴 하지만 그는 문제를 확실히 간파하고 있었다.
만약 원숭이에게 주공이 만든 옷을 입힌다면 어떨까? 분명 얌전히 입고 있지 않고 다 찢어버릴 것이다. 원숭이는 나무 위의 생활에 익숙할 뿐 그러한 예나 의식에 익숙하거나 그것을 이해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풍자적인 비유는 대개 많은 여운을 남긴다. 보통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을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공부와 연관지어 생각한다. 다음 이야기도 그렇다.
『장자』에는 제齊 환공이 마루에서 책을 읽는 우화가 나온다. 제 환공이 마루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마루 아래에는 수레바퀴를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제 환공이 책을 읽는 것을 보고는 바로 달려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제 환공은 우쭐해서 대답했다.
“성인의 책이다.”
그러자 그 사람이 또 물었다.
“그 성인은 아직 살아계십니까?”
제 환공이 말했다.
“이미 돌아가셨다.”
그는 또다시 물었다.
“성인이 돌아가셨다면 지금 읽고 계신 것은 그저 찌꺼기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들은 제 환공은 화가 나 이렇게 말했다.
“감히 과인이 읽는 책에 이러쿵저러쿵 참견을 한단 말인가? 과인이 납득할 수 있는 해명을 하면 용서하겠으나 그렇지 못하면 살려두지 않겠노라.”
고대에는 국왕이 한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일단 왕이 죽이겠다고 하면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모두 이 사람이 걱정되어 초조한데, 당사자는 오히려 침착했다.
“신이 하는 일로 풀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너무 깎으면 굴대에 끼울 때 바퀴가 헐겁고, 덜 깎으면 빡빡합니다. 이를 적절히 맞추어 깎는 것은 손에 달렸습니다. 그리고 그 손을 조절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제 손으로 바퀴를 만드니 속도는 이미 마음속에 다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을 아들놈에게 전수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70이 넘어서도 이렇게 바퀴를 만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 깨달음은 말이나 글로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경험한 것들이 축적됨으로써 얻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국왕이 읽고 계신 성인의 책은 그저 찌꺼기에 불과할 뿐이죠.”
제 환공은 과연 이 사람을 죽였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와 상관없이 이 사람이 제 환공에게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책이나 글이 진정한 지혜를 대표한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진정한 지혜는 고인의 깨달음에 있고 문자는 단지 그것을 전달하는 매개체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문자를 이해한 후 실제로 활용할 때 진정으로 쓸모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장자는 인간이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 사이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그 판단이 쉽지는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매사를 판단하고 처리해야 할까? 노자와 장자는 어떤 상태를 최상의 상태로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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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이 주는 행복』(도서출판 知와 사랑)

부제: 나를 치유하는 신성한 연결고리

 

 

 

 

 

편협한 사고를 버리려면 다음 아홉 가지를 실천하라 2

 

변화 5: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우리의 마음은 종종 자동 항법 장치와 같아서 현재의 상황을 이해해야 할 때 살아오면서 획득한 정보들을 바탕으로 판단한다. 과거의 경험과 비슷한 상황이나 사람 혹은 사건을 겪게 되면 우리는 친밀감을 느낀다. 하지만 우리는 전체 그림을 보지도 못하고 있고, 새로운 가능성이나 시각을 향해 진정으로 열려 있지도 않다. 셰익스피어의 말을 살짝 바꾸어보자면, 하늘과 땅에는 우리의 철학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다. 세상에는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이 정말 많다. 하지만 협소한 생각을 가지고는 배울 수 없다.
불행히도 학교는 개인의 마음을 넓히기보다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는 인간을 양성하는 데 더 주력하고 있다. 게다가 경제적 불안감은 젊은이들이 대학에서 인문학이나 예술보다는 좀 더 기술적인 과목들을 배우도록 부추긴다. 이에 더해 사람들은 지적 능력이 부족하다고 불안해하는 나머지, 종종 자신보다 더 영리하거나 지식이 많아 보이는 사람을 피하거나 심지어 적대시한다. 요즘에는 교육받은 이들을 ‘짝퉁’이나 ‘엘리트주의자’로 분류하면서 점점 경시하기까지 한다. 이런 세태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콤플렉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의사의 설명이나 경제학자의 복잡한 이론을 이
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또한 텔레비전이나 보는 대신 더 높은 학위를 받는다거나 책을 읽는다고 해서, 자신이 속한 계급을 저버리고 있다고 느낄 필요는 없다. 방어적 태도로 뒷걸음질 치다 보면, 배움을 얻기는커녕 부끄러움만 가중될 뿐이다.
아무리 똑똑하거나 교육을 많이 받았다고 해도, 지식은 허점을 가지기 마련이고 뒤틀린 자아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당신 자신의 불안에 대해 생각해보라. 자신의 주장이 논리적이지 않을 가능성에 직면했을 때, 무언가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느낄 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긴장된 태도를 취하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가? 다른 사람의 의견은 듣지도 않으려 하지 않는가? 만일 어떤 주제에 대해 자신보다 더 완전하게 이해한 듯한 사람과 토론하는 중에 자신이 그런 반응을 보인다면, 조용히 스스로에게 말해보라. ‘이건 내게 좀 부담스러운 주제로군. 괜찮아, 용기를 내어 내 생각의 폭을 넓히면 되지.’ 그리고 자신을 너그럽게 대하라. 인내하고 자기애를 가질 수 있
도록 다음과 같이 기도해보라. ‘저의 불안을 치유하고 편견을 없앨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새로운 시각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따뜻해지면, 이런 상황도 더 지혜롭고 열린 생각을 가질 기회로 받아들일 수 있다. 또한 역사와 다른 문화, 예술을 탐구하는 천생의 구도자가 되어 자신이 가진 사고를 확장할 수 있고, 그러지 않았으면 놓쳤을지도 모를 연결고리를 인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각양각색이다. 어떤 사람은 지적 능력을 더 계발할 필요가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타인에 대한 동정심을 더 가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냉혹한 자기 판단은 파괴적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배우는 단계에 있다면, 스스로를 사랑과 배려 그리고 솔직함으로 대하기 바란다. 난처한 지적 도전에 직면했을 때는 다음과 같이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이 가장 좋다. ‘잠깐, 내가 조금만 더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면 이 사람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몰라.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과 연관지을 수도 있을 거야.’ 두려움을 없애면, 자신이 배워야 할 것이 아직 많으며 접하지 못한 정보가 아직 산재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변화 6: 상투적 표현과 축자적인 해석을 넘어서기
이 바쁜 세상에서 우리는 복잡한 생각과 경험을 담지 못하는 짧고 진부한 표현으로 자주 소통한다. 속도를 늦추고 삶의 달콤한 풍요로움을 받아들여, 짧은 소통 대신 더 자세하고 여운을 남기는 대화로 우리의 열린 생각을 표현해야 한다. 생각 없이 오직 사소한 수다만 떨면서 시간을 보낸다면, 자신의 지적 능력을 모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상투적 표현은 단지 뉘앙스만 부족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세부 사항을 빠뜨리기 때문에 실제로 상황의 진실을 숨기는 데 일조한다. 그러므로 텔레비전 화면 아래쪽에 나오는 뉴스 제목만 일별함으로써 정보를 얻지 말고, 신문의 1면만 보고서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런 정보들은 당신을 지적으로 자극하지도 않고, 더 넓고 완전한 시각을 주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심도 있는 토론에 참여해보라. 당신을 지적으로 고무하는 양서들과 내용 있는 기사를 읽어보라. 문제를 깊이 있게 보려면, 승용차에 붙은 광고 스티커의 문구나 항의 푯말에 적힌 구호 이상을 알아야 한다.
편협한 생각에 빠지면 말을 너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지난번 내가 언급했던 플라톤의 이론을 기억해보라. 보이는 세계에서 우리는 단지 보이지 않는 세계에 존재하는 무한하고 완벽한 형태의 열등하고 제한된 버전version을 만들어낼 뿐이다. 제한된 인식에 사로잡힌 우리는 돈을 많이 가졌을 때 혹은 특별히 빼어난 몸매나 용모를 가졌을 때만 만족스러움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열린 깨달음을 얻으면, 우리는 정의와 아름다움, 사랑과 풍요, 일체감 등의 완전한 형태에 더욱 가까워지게 된다.
열린 사고를 가지게 되면, 이런 형태들에 관한 우리의 관념이 넓어진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운명에 의해 상처받고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고 느끼는 대신, 신의 은총을 즐기고 영적 존재의 도움을 깨닫게 될 것이다.

변화 7: 정보를 천천히 받아들이고 소화하기
우리는 점점 더 정보를 쏟아내는 기술에 중독되고 있다. 어떤 것들은 굉장히 유용하고, 어떤 것들은 가치가 제한적이며, 또 어떤 것들은 그저 아무 쓸모가 없다. 이 모든 것들은 너무나 빨리 우리에게 다가오므로, 우리는 얼른 받아들이고 소화해야 한다고 느낀다. 음식을 제대로 씹어 삼키려면 시간이 필요하듯이, 정보를 받아들이는 속도를 늦춤으로써 아무 정보나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의식의 한 부분이 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우리는 두려움을 유발하는 의미 없고 해롭기까지 한 정보에 휘둘리기 쉽고, 때로는 집착하기까지 한다. 그것이 뇌에 어떤 나쁜 영향을 미치는지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
우리는 말 그대로 정보의 바다에서 매일 헤엄치고 있다. 하지만 우선순위를 정하고 가치를 분별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보니, 정보에 압도당하기 쉽다. 극히 소수만이 인터넷으로 연결된 이 시대의 소음을 걸러내고, 자신의 의견을 알리려는 사람들의 편견을 뚫고 나갈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수많은 정보가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얻은 정보를 심도 깊게 파헤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자신만의 이해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검토할 수 있게 된다.
사건 보도에서 속도 경쟁을 하는 매체의 뉴스를 접하지 말고, 시간을 두고 사태를 올바로 파악하는 단체와 주기적으로 소통하는 것이 좋다. 언론 매체들은 급한 나머지 종종 거짓인 뉴스나 두려움을 부채질하는 뉴스를 내보내기도 하고, 별것 아닌 일로 밝혀진 일들을 우려 섞인 뉴스로 내보내기도 한다. 속도를 늦추라. 그리고 당신이 접하는 것들에 대해 일단 의심해보라. 또한 매일 순간순간의 뉴스를 접하기보다 주간, 월간 혹은 연간 단위로 정보를 접해보라. 이 모든 정보를 ‘소화’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있다. 인간의 자아에 상처를 주지 않고 부정적인 감정이 없는 토론에 참가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각자 서로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며 반대편을 멍청하거나 무식하다고 매도하는 토
론이라면, 배울 점이 전혀 없다.
또한 복잡한 관념을 즉각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야 한다는 믿음을 버리기 바란다. 무식해 보이면 안 된다는 불안감은 당신을 초조하게 하고 사고 과정을 왜곡한다. 최근 논점이 된 어느 정치인의 정치적 발언에 대해 모른다고 해서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산더미 같은 정보의 바다에서 정신을 놓고 사는 것은 삶에 보탬도, 해도 되지 않는다. 이 우주의 지혜에 보탬이 되지 않는 가치 없는 것들은 일체감의 요소와는 거리가 멀다.
당신의 의견과 생각을 발전시키기 위해 속도를 늦추기 바란다. 또한 새롭고 색다른 시각에 마음을 열어두기 바란다. 누가 가장 먼저 중요한 무언가를 해결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당신이 마주하는 것들로부터 지혜와 이해심을 발전시켜가는 일이 더 중요하다.

변화 8: 대가를 기대하고 지혜를 제공하는 이들을 경계하기
많은 이들이 이기심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이유로 우리에게 지식을 제공하려 한다. 길을 잃고 지혜에 목말라하는 우리의 마음을 이용해 이익을 취하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들의 가르침에서 오류를 발견하고 실망하게 된다. 누군가가 권력과 부 그리고 명예를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 사람의 자아는 점점 더 커지고 그는 자신의 진정한 동기를 점점 노출하게 된다. 누군가가 개인적으로 잘사는 법에 대해서만 충고할 뿐 더 큰 세상에 대한 책임감을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의 자아에만 호소하는 그릇된 지혜다. 우리 모두 ‘나’에게서 주의를 돌려 ‘나’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

변화 9: 진정한 회의주의 실천하기
얼마 전에 한 고객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은 영매나 영적 능력을 믿지 않는다는 이야기부터 꺼냈다. 나는 그의 솔직함에 감사하고 건강한 회의주의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최근에 죽은 그의 부인(독특한 그녀의 이름까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오직 그와 의사만이 아는 죽음의 원인과 함께 부인의 모습을 묘사했다. 그 고객은 내 말을 시인하고 계속 이야기해달라고 했다. 나는 그의 과거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시작했는데(고객의 삶의 방식을 객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종종 내가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는 중간에 내 말을 끊더니 이렇게 말했다. “인터넷으로 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지요.”
나는 내가 한 이야기는 너무나 세세해서 인터넷에서 찾을 수 없다고 답했고, 그는 마지못해 이에 동의했다. 또한 그가 나에게 전화한 시간과 실제로 상담한 시간 사이에 10분 남짓밖에 차이가 없었는데, 만약 그동안 그 많은 정보를 다 찾았다면 나는 인터넷 검색의 천재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내 말에 일리가 있다고 하면서도 다시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그걸 다 아셨는지 모르겠지만…… 전 정말로 하나도 못 믿겠어요.” 나는 한편으로는 화가 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완벽한 사례가 또 있을까 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신성하고 치유력을 지닌 연결고리(우리를 죽은 사람들, 낯선 사람들, 과거와 미래 등에 결속시켜주는 일체감)를 얼마나 갈망하는지,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제한되고 편협한 생각에 가로막혀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영매나 심령술사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을 속이려 드는 사기꾼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 회의론자란 뜻의 skeptic이란 단어는 그리스어 skeptikos에서 온 것인데, 원뜻은 ‘반성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오늘날 회의론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열린 마음으로 점검하려 하지 않는다. 만약 기시감이나 예지몽, 정신적 세계와의 교감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미래를 예언하거나 처음 보는 사람의 과거를 직감적으로 파악할 능력이 없는 올바른 회의주의자라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어. 한번 연구해봐야겠으니 판단은 잠시 유보해두겠어.”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혹은 객관적인 과학적 잣대에 맞추어 검증을 거치지 않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경험을 무시하는 것은 제한적이고 편협한 사고이며, 이는 진정한 회의주의라고 할 수 없다.
내가 이해할 수 없으면(내가 설명하거나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식의 태도를 취한다면, 세상은 점점 더 협소해질 뿐이다. 나는 과학자들이 초자연적인 현상을 접할 때 더 많은 호기심을 가지기를, 배우고 연구하
는 자세로 대하기를 바란다. 사회과학자들은 전 세계의 역사와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이러한 현상을 검토해서 “이러한 경험이 사람들의 인식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생각이 편협해지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열린 사고가 불가능해진다. 건강한 회의주의는 비록 다른 사람의 문화와 믿음을 공유하거나 받아들이지는 않더라도, 그것을 존중한다.
종종 사람들은 자신이 힘이 있고 중요한 사람처럼 보이려는 목적으로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때로는 상처받고 불안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그러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을 연민 어린 마음으로 대하고, 쓸데없이 당신의 자아를 내세우지 말라. 세상에 대해, 자신의 경험에 대해 열린 자세와 호기심을 유지하라.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카르멘 하라 박사는 '더 뷰The view', '굿모닝 아메리카Good morning America', '투데이 쇼Today show' 그리고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 [뉴욕 포스트The New York Post]를 비롯한 미국의 텔레비전 쇼와 언론 매체에 출연하는 유명 인사이며 심리치료학자다.

할리우드 스타에서부터 저명한 정치인들까지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다년간의 경험을 통한 부부 치료나 인지치료 방식이 그녀의 신비한 직관력과 합쳐져 그녀는 세계적인 상담사로 발돋움했다. 또한 세 장이나 음반을 낸 재능 있는 음악가이며, 자신만의 고유한 보석을 디자인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홈페이지 www.CarmenHarra.com과 페이스북 carmen Harra- (Wholeliness)를 방문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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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 세 가지 덫, 허무주의에서 벗어나기

 

 

● ● 자아의 세 가지 덫

불교의 가르침에는 자아의 관념에 갇히는 세 가지 덫이 있다. 첫째는 ‘나’라는 덫이다. 예를 들어 우리 스스로 “나는 이 몸이야” 하고 말할 것이다. 이는 ‘여기 몸이 하나 있다’라고 하는 단순한 관찰과는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이 사뭇 다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를 규정할 때 우리는 엄청난 고통을 겪는다. 몸이 아프거나 나이가 들면 우리는 ‘나는 아프다’, ‘내가 늙는구나’라고 느낀다.
두 번째 덫은 자아의 대상의 덫이다. 가령 “이 몸은 나의 것이야”라고 말할 때, 이러한 사고는 자신과 몸을 동일시하기보다는 우리가 몸을 소유할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하는 걸 의미한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소유하면 무소유와 상실이라는 개념이 시작된다. 소유할 수 있다면 잃을 수도 있다. 나의 일, 나의 가족, 나의 배우자, 나의 아이, 나의 집 혹은 나의 차라고 말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가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사실 지속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흘러가는 변화의 과정일 뿐이다. 과정이 어떻게 ‘나의 것’이 될 수 있는가? 그리고 이 과정을 소유한 ‘나’는 누구인가? 이런 식으로 보는 것은 어떤 변화의 과정이 또 다른 변화의 과정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는 꼴이 된다. 정말 웃기는 이야기다.
자아의 세 번째 덫은 상호 포함의 개념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나는 이 몸속에 있다”라거나 “이 몸이 내 속에 있다”고 말한다. 좀 더 미묘하지만, 이것 역시 하나의 식별의 형태다. 우리가 무엇을 식별할 때 슬픔이 생긴다. 식별하지 않을 때 자유와 기쁨이 생긴다. 자아를 버리고 자신을 포함한 주변의 모든 것을 우주에서 소용돌이치며 살아 있는 에너지의 일부로 볼 때,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 거기에는 기쁨이 있을 수 있다. 거기에는 평화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행복이 있을 수 있다.

 

● ● 허무주의에서 벗어나기
무아가 허무주의적이라는 통찰, 붓다가 그 어느 것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 어느 것도 정녕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 데 대해서 우리는 쉽게 감명을 받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절망에 빠지게 되고, 어차피 내일 죽을 테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말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이는 위험한 오해가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뱀에게 물리는 일이다. 명백히 붓다의 평화와 행복은 허무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
실제로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 붓다는 허무주의를 배척했다.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히는 것보다 [무아의 관점] 만물이 존재한다는 개념에 사로잡히는 [자아의 관점] 편이 낫다. 만물이 존재한다는 개념에 사로잡힌 사람은 아직도 풀어줄 수 있지만, 공의 개념에 사로잡힌 사람을 풀어주기란 쉽지 않다. (틱낫한 1993, 33; 괄호의 본문은 추가된 것임)
붓다가 잘못된 교리를 더 나은 것으로 대체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음을 상기하면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가 무상과 무아를 우리가 사용하고 고수해야 할 더 나은 개념으로 제시한 건 아니다. 이런 통찰이 반개념이란 사실을 기억하라. 이런 통찰은 세상을 바라볼 때 사용하는 왜곡된 렌즈를 부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반개념을 새로운 개념으로 여겨서는 안 되며 강을 건널 때 이미 사용한 뗏목처럼 머릿속에 담아두어서도 안 된다. 붓다는 이런 통찰을 제시하여 우리가 새로운 방식으로 보고, 사물의 실상에 마음을 열도록 돕는다. 분명한 건 붓다의 통찰을 좇아서 수행하면 새로운 방식으로 사물을 보게 될 때 고통에서 해방되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만물은 비영구적이지만, 지속성이 있는 것들도 있다. 우리는 자아가 아니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때때로 붓다가 상반되는 것을 모두 말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문제는 붓다의 가르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속성에 있다. 우리는 흔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를 별개로 생각한다. 어떤 것은 이것이고 혹은 그것은 저것이다. 이것은 이 종류이거나 저 종류의 사물이지 둘 다는 아니다. A는 B가 될 수 없으며, B는 A가 될 수 없다. 이것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이다.
불교의 전통적인 지혜는 A는 B가 아니다와 같은 갇힌 사고의 범주와는 매우 다르다. 대신에 A는 A가 아니라는 사실이 A를 진정한 A로 만든다는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가령 꽃(A)은 우리가 보통 의미하는 방식에서 꽃이 아니다. 왜냐하면 꽃은 또한 햇빛(B)이기 때문이다. 상호 연관해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꽃은 꽃을 꽃으로 만드는 햇빛과의 상호 관계를 말한다. 우리가 꽃을 그 밖의 모든 것과 관련 없는 개별적 존재로 본다면 꽃은 환상에 불과하다. 그 밖의 모든 것과 상호 연관해서 존재하는 꽃만이 진짜 꽃이다.
여름이 되면 나의 뒷마당에 있는 나무는 원뿔 모양으로 자라며 미묘한 보라색 꽃을 피운다. 이 꽃을 꿀벌들이 매우 좋아한다. 그것들은 꿀에 취해 꽃송이 주변을 춤을 추며 빙빙 돈다. 우리가 이 꽃과 벌을 보면 이것들이 각기 다른 두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이라는 걸 쉽게 볼 수 있다. 거기에는 하나의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나무와 벌은 상호 연관해서 존재한다.
자아의 관점에 매여 있을 때 우리는 영구적인 자아, 혹은 소멸해가는 존재로서의 사물을 존재 혹은 비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본래 만물이 존재하는 방식은 존재와 비존재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사물은 존재하나 그 존재 방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물이 있다 혹은 없다는 말은 진리를 담아내지 못한다. 또한 사물이 영원하다거나 혹은 반대로 소멸된다는 것 역시 진리가 아니다. 하나의 과정으로서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지속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죽음과 부활을 다루는 9장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불교에서는 실재(진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본다. 붓다는 진리에 도달한 사람, 진여를 좇아 사는 사람을 의미하는 여래如來로 불리기를 바랐다. 실재는 세상 모든 것이 그 밖의 모든 것과 상호 연결되어 흘러가고 변화하며 살아 있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실재는 우리가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다.
우리 몸의 70퍼센트 또는 그 이상이 물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물은 우리와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물이다. 그리고 우리가 물이기 때문에 냇물과 바다가 오염되면 우리 또한 무사할 수 없다. 우리가 스스로를 물과 분리된 존재로 본다면 물을 오염시켜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냇물을 오염시키는 일은 우리 스스로를 오염시키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보는 시각은 우리로 하여금 물을 다르게 보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내부에 있을 때 물은 살아 있는 존재의 일부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 바깥의 물을 살아 있지 않은 것, 즉 죽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 내부에 있는 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우리 바깥에 있는 물 역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살아 있는 존재와 살아 있지 않은 존재 사이의 차이가 붕괴된다. 사물들의 진여 안에서 그 사물들을 바라보는 것은 무상과 무아라는 만물의 본성을 받아들이고, 잡을 수 없는 물의 속성에 경이로움을 느끼며, 돌의 단단함에 놀라워하고, 나뭇잎의 싱그러운 푸름에 감사하는 것이다. 또한 나뭇잎과 돌, 물은 물론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인 나 자신도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꽃을 볼 때 우리는 흔히 바라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인 꽃이 다른 존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개념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다는 행위가 있다면, 항상 보는 사람과 보이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함께 일어난다. 이 둘은 추상의 개념에서만 분리될 수 있다.
우리는 사고와 언어 안에서 이런 것들을 각각 분리한다. 영어 문법에서 동사는 주어를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raining’에 이미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이 담겨 있는데도 우리는 “It’s raining”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나’라고 불리는 어떤 것이 ‘꽃’으로 불리는 어떤 것을 본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진여 안에서, 실재 안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내가-꽃을-보고 있다’와 같은 하나의 분리할 수 없는 과정이다. 이런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세상이 경이로운 실체임을 알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보통 사물을 보는 시각과 다르기 때문에 이 장은 여러분이 시간을 좀 더 할애해서 천천히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중요한 구절을 억지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 구절이 자연스레 다가오도록 하라. 그리고 통찰이 스며들어 우리의 일부가 되도록 하라. 이 장에서 설명한 통찰이 우리 안에 스며들면 우리는 움켜쥐고 있던 슬픔을 서서히 놓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 더 행복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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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이 주는 행복』(도서출판 知와 사랑)

부제: 나를 치유하는 신성한 연결고리

 

 

 

 

 

편협한 사고를 버리려면 다음 아홉 가지를 실천하라

 

인류의 진화를 맞이한 이 시점에 우리 모두는 사고의 확장이라는 도전 과제에 직면한다. 여기에 열거하는 아홉 가지 변화를 실천함으로써 그 과제를 해결할 수 있다.

 

변화 1: 논리의 법칙을 깨닫고 신뢰하기
당신은 사실들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고, 어떤 사실들을 다른 사실들보다 더 비중 있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논리의 법칙은 항상 그대로다. 2 더하기 2는 4다. 물론 우리는 논리의 법칙을 알고 있지만, 간혹 감정에 사로잡혀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인 것에 빠지기도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실들을 과장하거나 축소하기도 하고, 상식을 거스르는 선택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진정으로 우리의 감정은 사실이 아닌 부정적 요소를 믿게 만들고 비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정적 동요를 잠재우고 사고 과정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 분노하거나 불안할 때 자신의 기준을 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럴 때는 당신을 그런 결론으로 몰아간 논리가 끊어진 것은 아닌지 시간을 두고 나중에 한번 점검해보라. 그러다 보면 자신의 편견을 깨닫고 자신의 사고를 고칠 수 있을 것이다.
변화 2: 비관주의를 거부하고 낙관주의 받아들이기 공포나 분노, 슬픔 같은 저급한 감정들은 비관주의를 불러온다. 비관주의에 빠지면 현재는 문제투성이로, 미래는 부정적 가능성의 집합체로 보인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두려워할 때, 당신은 결국 그런 것들을 회피하고 거부하게 된다. 이것이 변화에 대한 저항을 불러온다. 매력적인 연인이나 직장 같은 중요한 것들을 잃게 되면 괴롭고 속상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때 당신은 한 발 더 나아가 비관주의로 빠질 수도 있다. 잃어버린 멋진 과거를 결코 되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마음을 아주 잘 이해한다.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모국의 가족과 집 그리고 가수로서의 경력을 그리워했다. 나는 그동안 미국을 과대평가해왔으며 모국에 비해 하나도 나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 미국에서 행복한 삶을 꾸려갈 자신이 없었다. 처음 얼마 동안 남편(역시 루마니아 출신이다)이 새로운 나라의 긍정적인 측면을 지적할 때마다, 부정적 반응으로 남편의 의견에 반대했다. 그러면서 향수에 빠져 미국보다 더 큰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모국의 문제들은 깡그리 잊었다. 하지만 미국에 대한 버질의 온갖 긍정적인 태도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부정적 태도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의 시각이 나의 시각보다 더 균형 잡혀 있음을 인정했다. 나는 미국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고, 비관주의를 날려버렸다. 참 다행이었다. 만약 그때 내가 루마니아에 있을 때의 부정적인 상황을 돌아보지 않았더라면, 미국에서의 삶을 루마니아에서의 삶과 비교해보지 않았더라면, 사고의 폭을 넓히지 않았더라면 과연 내가 지금 어디에 있을지 상상하고 싶지 않다.
이 세상을 우울하고 냉소적으로 보게 되면, 그에 맞추어 세상을 판단한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의 삶이 불행하고 불확실하게 느껴지면, 지하철 승강장에서 나를 무례하게 밀치고 지나가던 남성의 모습은 기억나면서도 나를 위해 문을 열어주던 친절한 남성의 모습은 잊어버린다. 우리 모두 우리의 마음을 긍정적 사고의 성역으로 가꾸어보자. 인생에서의 마법 같은 순간을 주기적으로 떠올려보자. 그리고 선업을 쌓기 위해 영적 존재들이 우리에게 부여한 재능을 발휘해보자. 사고의 폭을 넓히다 보면, 모든 상황과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깃든 멋진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속에서 더 큰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변화 3: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해 열어두기
당신도 예지몽을 꾸거나 죽은 이를 만나는 등 이 사회에서 초자연적인 사건이라 불리는 현상을 경험한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두려움과 거부감에 굴복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당신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실재하며 얼마나 신비한지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그런 세계를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면, 직선적 시간을 빠져나와 다른 세계를 경험해본 사람으로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단지 그런 것들에 대해 아는 것만으로는 인식이 바뀌고 당신의 마음이 일체감을 향해 열릴 수 없을지라도, 단 한 번의 경험만으로 그런 일들이 가능할 수 있다.
이런 열린 의식의 장場(그 장과 우리의 신성한 연결)이 존재한다는 믿음조차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격려해 치유와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이 작은 기적을 실제로 경험하면 더욱 좋다. 이를 위해 직관과 관련된 전문적인 책을 읽어보고, 스스로의 영적 능력을 키워보라고 권하고 싶다. (나는 『일상의 업Everyday Karma』이란 책에서 이러한 재능을 일깨우는 방법들을 제안했다. 우리 모두는 그런 재능을 갖고 있지만, 사회의 공포와 적대감 때문에 의식적으로 이러한 재능을 멀리하고 있다.) 영매를 통해 혹은 정확한 영적 예언을 통해 저 너머의 세상과 조우하게 되면, 일체감과 관련된 ‘초자연적’ 개념을 좀 더 열린 태도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변화 4: 타인의 견해와 전망을 존중하고 그것에 관심을 보이기
편협한 사고란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 지나치게 큰 비중을 두어 다른 사람의 견해와 관점을 무시하는 것을 말한다. 그에 비해 열린 사고란 자신의 믿음과 다른 사람의 믿음 간에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누군가의 생각이 당신의 생각과 맞지 않다고 해서 둘 중 하나가 옳거나 그른 것은 아니다. 당신이나 상대방이 단지 서로 다른 시각에서 삶을 바라볼 뿐이다. 인간의 경험은 진정한 집단적 의식만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둘 중 누구도 그것의 완전한 모습을 보았다고 할 수는 없다. 일체감을 받아들이고 더 넓게 생각하는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협소한 시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보지 못했던 총체성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개인적 사고의 반영과 해석에 옳고 그름이 없다지만, 우리는 그에 대해 상당히 예민하게 방어적으로 반응한다. 누구든 자신을 봐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라며, 자신의 이론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가치 있게 여겨지기를 바란다. 또 더 큰 전체의 일부분인 개인으로서의 핵심적인 역할을 망각하고, 자신이 옳게 보이는지에 집착한다. 일체감은 우리에게 자신감을 부여한다. 그 자신감이 인내심과 다른 이에 대한 존경심을 키우는 것이다. 대화를 하다보면 다른 사람과 의견이 부딪치는 것조차 자신의 사고를 확장하는 자극으로 받아들이고 즐길 수 있게 된다. 고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이 대화의 기술을 존중하고 대화를 정신적 진화를 위한 기회로 삼았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철학적 토론의 진정한 대가였다. 이들은 개인적 견해를 표현하고, 상식적 믿음에 대해 질문하고, 지적인 토론을 전개해 나감으로써 인류를 더 높은 진리에 데려다 주었다.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카르멘 하라 박사는 '더 뷰The view', '굿모닝 아메리카Good morning America', '투데이 쇼Today show' 그리고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 [뉴욕 포스트The New York Post]를 비롯한 미국의 텔레비전 쇼와 언론 매체에 출연하는 유명 인사이며 심리치료학자다.

할리우드 스타에서부터 저명한 정치인들까지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다년간의 경험을 통한 부부 치료나 인지치료 방식이 그녀의 신비한 직관력과 합쳐져 그녀는 세계적인 상담사로 발돋움했다. 또한 세 장이나 음반을 낸 재능 있는 음악가이며, 자신만의 고유한 보석을 디자인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홈페이지 www.CarmenHarra.com과 페이스북 carmen Harra- (Wholeliness)를 방문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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