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를 읽고 장자에게 배운다』 중에서

 

 

 

 

쓸모 있거나 혹은 쓸모 없거나

 

이 일이 있고 나서 혼란에 빠진 장자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물었다.
“산 위에 있던 큰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베이지 않았는데, 산 아래에 사는 오리는 쓸모가 없어서 죽어야 했습니다. 도대체 쓸모가 있어야 합니까, 없어야 합니까?”
장자가 대답했다.
“나라면 늘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 사이에 있겠다. 이때 중요한 것은 판단이다. 쓸모가 있는 편이 안전하다면 그쪽을 선택할 것이고, 쓸모가 없는 편이 더 안전하다면 당연히 그쪽을 선택해야지. 그러니 정확한 판단을 하려면 인생에 대한 풍부한 지혜와 여러 상황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장자를 아무런 구속 없이 자유롭게 살았던, 현실 세상과는 동떨어진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들려준 우화는 소탈하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아 자유롭지만 실제와는 거리가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장자』 내편內篇 「인간세편人間世篇」에서는 관료사회, 특히 군신관계를 다룸으로써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을 묘사했다.
양계초梁啓超의 저서 중에 『음빙실전집飲氷室全集』이 있다. 여기서 음빙飮氷은 본래 『장자』의 「인간세편」에서 나온 말이다. 이야기는 이러하다. 한 대신이 아침에 왕의 명을 받는 날이면 밤에 얼음을 먹었다. 너무 긴장한 탓에 몸속에 열이 생겨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국왕의 명이니 지체없이 조속히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만 조급해졌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명을 완수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밤마다 얼음을 먹었다. 여기서 음빙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렇듯 장자는 관료사회뿐만 아니라 상업사회, 부귀와 빈천의 관계를 비롯해 사람들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관계에 대해서도 이해가 깊었다.
무슨 일이든 일단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만 상황에 알맞은 적절한 행동을 정할 수 있다. 즉 장자가 쓸모가 있음과 없음 사이에 있겠다고 한 말은 판단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도가사상에서는 기본적으로 당신이 안전하게 천수를 누릴 것을 주장한다. 천수란 본래 타고난 수명을 말한다. 도가사상은 본래 타고난 수명이 있다면, 그것을 단축시키는 어리석은 일도, 그것을 늘려 신선이 되겠다는 헛된 바람도 갖지 말라고 한다. 물론 신선의 개념은 『장자』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지만, 그것이 장자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다. 신선은 단지 설명을 위해 도입된 일종의 도구일 뿐 수련을 한다고 해서 정말 신선이 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장자가 살던 당시 가장 쓸모 있다고 인정받았던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유가를 창시한 공자다. 이에 대해 그는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들려주었다. 하루는 공자가 노자를 방문했다.
“고생고생해서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악기樂記』, 『역경易經』, 『춘추春秋』의 육경을 공부했습니다. 확실하게 분석도 마쳤고, 성왕聖王의 이상도 이해하게 됐습니다. 이에 바탕을 둔 소견을 가지고 72분의 국왕을 만나뵈었지만 아무도 저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유용과 무용 사이에 있기
공자는 실의에 빠진 나머지 노자에게 그 이유를 물으러 간 것이다. 노자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며 공자를 꾸짖었다. 심지어 공자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모두 고인이 남긴 찌꺼기이지 정수가 아니라고 나무랐다. 그리고 도야말로, 도를 깨우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수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조상이 남긴 경전을 보물처럼 받든다. 하지만 문자는 단지 매개체일 뿐 진정한 의미는 그 안에 들어 있지 않다. 그래서 노자는 공자에게 그러한 조언을 한 것이다. 일반 사람들이 볼 때 공자는 아주 유용한 인물이다. 그러나 장자가 볼 때는 시대적 흐름을 읽지 못하는 인물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유가를 단 네 글자로 설명했다. ‘추주어육推舟於陸’ 즉 배를 밀어 육지로 올린다는 뜻이다. 배가 물 위에 있을 때에는 제구실을 할 수 있지만 육지로 올라가면 움직이지 못한다. 장자가 다소 극단적으로 비유한 면이 있긴 하지만 그는 문제를 확실히 간파하고 있었다.
만약 원숭이에게 주공이 만든 옷을 입힌다면 어떨까? 분명 얌전히 입고 있지 않고 다 찢어버릴 것이다. 원숭이는 나무 위의 생활에 익숙할 뿐 그러한 예나 의식에 익숙하거나 그것을 이해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풍자적인 비유는 대개 많은 여운을 남긴다. 보통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을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공부와 연관지어 생각한다. 다음 이야기도 그렇다.
『장자』에는 제齊 환공이 마루에서 책을 읽는 우화가 나온다. 제 환공이 마루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마루 아래에는 수레바퀴를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제 환공이 책을 읽는 것을 보고는 바로 달려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제 환공은 우쭐해서 대답했다.
“성인의 책이다.”
그러자 그 사람이 또 물었다.
“그 성인은 아직 살아계십니까?”
제 환공이 말했다.
“이미 돌아가셨다.”
그는 또다시 물었다.
“성인이 돌아가셨다면 지금 읽고 계신 것은 그저 찌꺼기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들은 제 환공은 화가 나 이렇게 말했다.
“감히 과인이 읽는 책에 이러쿵저러쿵 참견을 한단 말인가? 과인이 납득할 수 있는 해명을 하면 용서하겠으나 그렇지 못하면 살려두지 않겠노라.”
고대에는 국왕이 한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일단 왕이 죽이겠다고 하면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모두 이 사람이 걱정되어 초조한데, 당사자는 오히려 침착했다.
“신이 하는 일로 풀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너무 깎으면 굴대에 끼울 때 바퀴가 헐겁고, 덜 깎으면 빡빡합니다. 이를 적절히 맞추어 깎는 것은 손에 달렸습니다. 그리고 그 손을 조절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제 손으로 바퀴를 만드니 속도는 이미 마음속에 다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을 아들놈에게 전수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70이 넘어서도 이렇게 바퀴를 만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 깨달음은 말이나 글로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경험한 것들이 축적됨으로써 얻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국왕이 읽고 계신 성인의 책은 그저 찌꺼기에 불과할 뿐이죠.”
제 환공은 과연 이 사람을 죽였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와 상관없이 이 사람이 제 환공에게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책이나 글이 진정한 지혜를 대표한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진정한 지혜는 고인의 깨달음에 있고 문자는 단지 그것을 전달하는 매개체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문자를 이해한 후 실제로 활용할 때 진정으로 쓸모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장자는 인간이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 사이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그 판단이 쉽지는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매사를 판단하고 처리해야 할까? 노자와 장자는 어떤 상태를 최상의 상태로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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