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아의 세 가지 덫, 허무주의에서 벗어나기
● ● 자아의 세 가지 덫
불교의 가르침에는 자아의 관념에 갇히는 세 가지 덫이 있다. 첫째는 ‘나’라는 덫이다. 예를 들어 우리 스스로 “나는 이 몸이야” 하고 말할 것이다. 이는 ‘여기 몸이 하나 있다’라고 하는 단순한 관찰과는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이 사뭇 다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를 규정할 때 우리는 엄청난 고통을 겪는다. 몸이 아프거나 나이가 들면 우리는 ‘나는 아프다’, ‘내가 늙는구나’라고 느낀다.
두 번째 덫은 자아의 대상의 덫이다. 가령 “이 몸은 나의 것이야”라고 말할 때, 이러한 사고는 자신과 몸을 동일시하기보다는 우리가 몸을 소유할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하는 걸 의미한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소유하면 무소유와 상실이라는 개념이 시작된다. 소유할 수 있다면 잃을 수도 있다. 나의 일, 나의 가족, 나의 배우자, 나의 아이, 나의 집 혹은 나의 차라고 말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가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사실 지속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흘러가는 변화의 과정일 뿐이다. 과정이 어떻게 ‘나의 것’이 될 수 있는가? 그리고 이 과정을 소유한 ‘나’는 누구인가? 이런 식으로 보는 것은 어떤 변화의 과정이 또 다른 변화의 과정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는 꼴이 된다. 정말 웃기는 이야기다.
자아의 세 번째 덫은 상호 포함의 개념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나는 이 몸속에 있다”라거나 “이 몸이 내 속에 있다”고 말한다. 좀 더 미묘하지만, 이것 역시 하나의 식별의 형태다. 우리가 무엇을 식별할 때 슬픔이 생긴다. 식별하지 않을 때 자유와 기쁨이 생긴다. 자아를 버리고 자신을 포함한 주변의 모든 것을 우주에서 소용돌이치며 살아 있는 에너지의 일부로 볼 때,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 거기에는 기쁨이 있을 수 있다. 거기에는 평화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행복이 있을 수 있다.
● ● 허무주의에서 벗어나기
무아가 허무주의적이라는 통찰, 붓다가 그 어느 것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 어느 것도 정녕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 데 대해서 우리는 쉽게 감명을 받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절망에 빠지게 되고, 어차피 내일 죽을 테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말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이는 위험한 오해가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뱀에게 물리는 일이다. 명백히 붓다의 평화와 행복은 허무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
실제로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 붓다는 허무주의를 배척했다.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히는 것보다 [무아의 관점] 만물이 존재한다는 개념에 사로잡히는 [자아의 관점] 편이 낫다. 만물이 존재한다는 개념에 사로잡힌 사람은 아직도 풀어줄 수 있지만, 공의 개념에 사로잡힌 사람을 풀어주기란 쉽지 않다. (틱낫한 1993, 33; 괄호의 본문은 추가된 것임)
붓다가 잘못된 교리를 더 나은 것으로 대체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음을 상기하면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가 무상과 무아를 우리가 사용하고 고수해야 할 더 나은 개념으로 제시한 건 아니다. 이런 통찰이 반개념이란 사실을 기억하라. 이런 통찰은 세상을 바라볼 때 사용하는 왜곡된 렌즈를 부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반개념을 새로운 개념으로 여겨서는 안 되며 강을 건널 때 이미 사용한 뗏목처럼 머릿속에 담아두어서도 안 된다. 붓다는 이런 통찰을 제시하여 우리가 새로운 방식으로 보고, 사물의 실상에 마음을 열도록 돕는다. 분명한 건 붓다의 통찰을 좇아서 수행하면 새로운 방식으로 사물을 보게 될 때 고통에서 해방되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만물은 비영구적이지만, 지속성이 있는 것들도 있다. 우리는 자아가 아니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때때로 붓다가 상반되는 것을 모두 말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문제는 붓다의 가르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속성에 있다. 우리는 흔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를 별개로 생각한다. 어떤 것은 이것이고 혹은 그것은 저것이다. 이것은 이 종류이거나 저 종류의 사물이지 둘 다는 아니다. A는 B가 될 수 없으며, B는 A가 될 수 없다. 이것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이다.
불교의 전통적인 지혜는 A는 B가 아니다와 같은 갇힌 사고의 범주와는 매우 다르다. 대신에 A는 A가 아니라는 사실이 A를 진정한 A로 만든다는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가령 꽃(A)은 우리가 보통 의미하는 방식에서 꽃이 아니다. 왜냐하면 꽃은 또한 햇빛(B)이기 때문이다. 상호 연관해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꽃은 꽃을 꽃으로 만드는 햇빛과의 상호 관계를 말한다. 우리가 꽃을 그 밖의 모든 것과 관련 없는 개별적 존재로 본다면 꽃은 환상에 불과하다. 그 밖의 모든 것과 상호 연관해서 존재하는 꽃만이 진짜 꽃이다.
여름이 되면 나의 뒷마당에 있는 나무는 원뿔 모양으로 자라며 미묘한 보라색 꽃을 피운다. 이 꽃을 꿀벌들이 매우 좋아한다. 그것들은 꿀에 취해 꽃송이 주변을 춤을 추며 빙빙 돈다. 우리가 이 꽃과 벌을 보면 이것들이 각기 다른 두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이라는 걸 쉽게 볼 수 있다. 거기에는 하나의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나무와 벌은 상호 연관해서 존재한다.
자아의 관점에 매여 있을 때 우리는 영구적인 자아, 혹은 소멸해가는 존재로서의 사물을 존재 혹은 비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본래 만물이 존재하는 방식은 존재와 비존재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사물은 존재하나 그 존재 방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물이 있다 혹은 없다는 말은 진리를 담아내지 못한다. 또한 사물이 영원하다거나 혹은 반대로 소멸된다는 것 역시 진리가 아니다. 하나의 과정으로서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지속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죽음과 부활을 다루는 9장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불교에서는 실재(진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본다. 붓다는 진리에 도달한 사람, 진여를 좇아 사는 사람을 의미하는 여래如來로 불리기를 바랐다. 실재는 세상 모든 것이 그 밖의 모든 것과 상호 연결되어 흘러가고 변화하며 살아 있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실재는 우리가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다.
우리 몸의 70퍼센트 또는 그 이상이 물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물은 우리와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물이다. 그리고 우리가 물이기 때문에 냇물과 바다가 오염되면 우리 또한 무사할 수 없다. 우리가 스스로를 물과 분리된 존재로 본다면 물을 오염시켜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냇물을 오염시키는 일은 우리 스스로를 오염시키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보는 시각은 우리로 하여금 물을 다르게 보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내부에 있을 때 물은 살아 있는 존재의 일부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 바깥의 물을 살아 있지 않은 것, 즉 죽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 내부에 있는 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우리 바깥에 있는 물 역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살아 있는 존재와 살아 있지 않은 존재 사이의 차이가 붕괴된다. 사물들의 진여 안에서 그 사물들을 바라보는 것은 무상과 무아라는 만물의 본성을 받아들이고, 잡을 수 없는 물의 속성에 경이로움을 느끼며, 돌의 단단함에 놀라워하고, 나뭇잎의 싱그러운 푸름에 감사하는 것이다. 또한 나뭇잎과 돌, 물은 물론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인 나 자신도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꽃을 볼 때 우리는 흔히 바라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인 꽃이 다른 존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개념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다는 행위가 있다면, 항상 보는 사람과 보이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함께 일어난다. 이 둘은 추상의 개념에서만 분리될 수 있다.
우리는 사고와 언어 안에서 이런 것들을 각각 분리한다. 영어 문법에서 동사는 주어를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raining’에 이미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이 담겨 있는데도 우리는 “It’s raining”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나’라고 불리는 어떤 것이 ‘꽃’으로 불리는 어떤 것을 본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진여 안에서, 실재 안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내가-꽃을-보고 있다’와 같은 하나의 분리할 수 없는 과정이다. 이런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세상이 경이로운 실체임을 알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보통 사물을 보는 시각과 다르기 때문에 이 장은 여러분이 시간을 좀 더 할애해서 천천히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중요한 구절을 억지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 구절이 자연스레 다가오도록 하라. 그리고 통찰이 스며들어 우리의 일부가 되도록 하라. 이 장에서 설명한 통찰이 우리 안에 스며들면 우리는 움켜쥐고 있던 슬픔을 서서히 놓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 더 행복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