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는 중요한 것은 행복이고 불행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공리주의는 중요한 것은 행복이고 불행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행위는 오직 이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이 될 때에 옳은 것이 되며, 최대의 행복을 가져지 못할 때에는 나쁜 것이 된다. 공리주의는 여러 가지 이점을 지닌 도덕론이다. 그것은 도덕이 무엇이며, 옳고 그름을 무엇으로 가리는지를 명백하고도 확실하게 (예컨대, 결과를 측정하는 방법으로) 설명한다. 또 공리주의는 현행의 사회적 관행과 관습을 평가하는 데 적용할 수 있는 분명하고 결정적인 기준을 마련해준다. 그렇지만 공리주의는 다양한 비평을 받고 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살펴본 비평은 공리주의가 비도덕적인 행위를 조장하고, 적용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기획이나 관계를 억제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해 규칙 공리주의를 살펴보았다. 규칙 공리주의는 우리에게 돌아올 결과를 헤아리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유익한 규칙들을 따르도록 권장한다. 그러나 규칙 공리주의는 도덕적 규칙의 진정한 바탕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며 의무론자들의 비평을 산다. 또 공리주의라 하기에는 불충분하다며 공리주의자들의 비평에 부딪힌다. 가장 강력한 형태의 공리주의는 공리주의 도덕론이 옳은 행위의 기준을 제시하는 이론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또 공리주의적 행위자가 옳은 행위를 최대한 실천하기 위해 어떻게 생각하고 행위해야 할지는 오직 경험을 쌓아가는 가운데 터득할 일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공리주의가 바람직한 이론이 될 수 있으려면 행복을 측정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설령 행복(즐거움을 느끼고 바라는 것을 충족하는 것)을 측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이 도덕적으로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분명치 않다.

 

● 토의사항
1. 어느 비평가가 공리주의는 논리상 실패하게 되어 있다고 생각할 경우, 그렇게 생각할 만한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은 공리주의에 대한 옳은 비평일까, 아니면 그런 비평을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공리주의 이론이 있을까?

2. 노예제도를 시행하여 사회 전반이 더 행복할 수 있다 해도, 그 제도는 나쁜 것일까?

3. 어떤 행위를 하기에 앞서 그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미리 알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한 다음이라 해도, 그 행위에 뒤따르는 수없이 많은 효과들이 나타나지 않을까? 그 모든 효과가 무엇인지 어찌 알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에 비추어 공리주의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4. 이 장에서 공리주의는 하나의 자연주의 이론으로 제시되었다. 말하자면, 공리주의는 의무론적으로 ‘마땅히 해야 하느니라’ 식의 모호한 표현과 신비주의적인 요소들을 털어냈다. 그렇다고 해서 공리주의가 우리를 도덕적으로 ‘마땅히 해야 할’ 것들에서 빠져나오게 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공리주의는 행복을 증진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단순히 어떤 현실은 다른 현실보다 더 많은 행복을 담고 있다고 말하는 데서 진일보한 것일까? 밀은 『공리주의론Utilitarianism』 4장에서 모든 사람이 행복을 바라므로 행복은 ‘바람직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동시에, 한 사람의 행복이 그 한 사람에게 좋은 것처럼 모든 사람의 선은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이 그럴법하게 들리는가? 이 주장은 ‘해야 하느니라’ 식의 모호한 말을 해야 할 필요에서 공리주의가 벗어났음을 보여줄까?

 

5. 행복이란 무엇일까? 그것을 측정할 수 있을까? 공리주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행복은 매우 중요한 것이기에 이를 최대화하는 것이 우리가 지고 있는 도덕적 의무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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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과 프로이트

 

 

 

 

 

 

 

융은 자신의 삶에서 “진정 중요하다고 생각한 최초의 사람”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함께 미국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잘츠부르크에서 국제정신분석학회가 열린 다음 해인 1909년이었다. 둘은 매사추세츠 클라크 대학의 초청을 받아 강연을 했고 그곳에서 명예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융은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이제 내 이름이 새겨진 법학박사학위가 있소. 매우 뜻깊은 일이오 … 프로이트도 매우 기뻐하고 있는데 기뻐하는 그를 보니 진심으로 흐뭇하오.

 

스위스에서 성공을 거둔 중견 의사이자 작가이며 강연자인 융은 프로이트를 지지하는 것이 자신의 학문적 명성에 타격이 있음에도 시대를 앞서 가는 그를 수년간 공개적으로 옹호했다. “화려한 고독” 속에 있던 프로이트는 20세기를 갓 넘어선 시기에 빈에서 정신분석학회를 창설했다. 프로이트의 이름을 “최대의 증오” 대상으로 만든 유년기 성적 본능에 대한 연구결과가 발표된 1905년의 일이다.
1900년대 초반 융은 프로이트의 획기적인 저서 『꿈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Dreams』을 읽고 “이 모든 것이 그의 생각과 연결되는 원리를 발견했다.” 그는 자신의 연구에서 프로이트의 글을 인용하기 시작했다. 융이 프로이트에게 자신의 저서를 보낸 후 1906년부터 두 사람은 서신을 왕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융이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부터 융과 프로이트 간의 큰 의견 차는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히스테리의 기원은 성이 지배적인 요소이지만 그것이 전적인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의 성적 이론에 대해서는 같은 의견입니다.

 

친애하는 동료에게,
자네의 저술은 오랜 기간 자네가 나의 심리학을 옹호하면서도 히스테리와 성의 문제에관해서는 나의 시각에 찬성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인상을 주었네. 하지만 몇 년 후에는 자네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나와 가까운 생각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하네 …
프로이트 박사

 

그 다음 해에 정신분열병을 다룬 융의 책이 출판되었다. 이 책의 도입부에서 그는 “프로이트의 놀라운 발견에 감사한다”고 인정하면서도 “사람은 독자적인 판단력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책을 계기로 융은 빈에 있는 프로이트의 집에서 처음으로 그를 만났다.

 

우리는 오후 한 시에 만나 정말로 휴식도 없이 열세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프로이트는 내가 만난 사람들 중 처음으로 진정 중요하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당시 그와 비교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태도 중 대단하지 않은 점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가 상당히 지적이고 예리하며 전체적으로 훌륭하다고생각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다소 복잡했다. 나는 그를 완전히 파악하지못했다. 그가 말한 성적 이론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어도 나의 망설임과 의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나의 망설임에 대해 몇 번 본격적으로 논의해보고 싶었지만 그는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경험 부족 탓으로 돌렸다. 프로이트의 말이 맞았다. 당시 나는 나의 이견을 뒷받침할 만한 충분한 경험이 없었다 …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의문은 영혼에 대한 프로이트의 태도였다. 그는 사람이든 예술작품이든 영성의 표현을 볼 수 있는 어디서든 그것은 억압된 성욕이라는 투로 말했다. 그리고 성욕으로 직접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정신성욕psychosexuality”으로 간주했다. 나는 이에 반대하며 그것이 사실이라면 문화는 단지 억압된 성욕의 병적인 결과라는 광대극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바로 그렇다네”라고 그는 말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맞서 싸울 힘이 없는 운명의 저주이지.” 그 말에 절대 동의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냥 넘겨 버리고 싶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와 논쟁을 벌일 자신이 없었다.

 

프로이트는 융을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로 대하기 시작했다. 융에게도 프로이트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지만 그런 감정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열아홉 살이라는 나이 차가 그들을 갈라놨고 둘 사이에는 의견이 충돌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들은 대부분 서신으로 의견을 교환했다. 그들은 7년 동안 방대한 양의 서신을 왕래하며 과학적 의견, 부모, 동료, 정신의학 운동의 어려움, 개인사, 인간관계에 이르기까지 친밀하게 의견을
나누었다. 융은 자신의 사후 30년까지는 그 서신들이 출판되지 않기를 바랐다. 여든세 살이 된 융은 프로이트와의 서신을 “나의 청춘의 나날을 가득 채웠던 놀라운 어리석음을 상기시키는 불행하면서 지울 수 없는 추억”이라고 했다. 융의 서신은 많은 수가 보존되지 않았지만 남아 있는 것들 가운데 프로이트와 주고받은 서신들은 그의 성격과 성장기의 여러 측면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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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환자들과 그들의 정신질환을 가까이에서 관찰했다

 

 

 

 

 

 

부르크휠츨리 병원의 조교로 일한 스물다섯 살의 융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환자들과 그들의 정신질환을 가까이에서 관찰했다. 당시 다른 의사들과 달리 그는 환자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직접 듣고 그들의 환상의 배경에 집중했으며 그들의 꿈에 관해 논의했고, 그 과정에서 단어연상검사를 개발했다.

 

 


나의 관심사와 연구는“ 정신병 환자의 내면에서는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궁금증의 지배적인 영향을 받았다 … 정신의학 교수들은 환자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어떻게 진단을 내리고 증상을 파악하며 통계자료를 수집할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지배적이었던 임상적인 관점에서는 환자의 인격과 개성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 환자를 병명으로 분류하고 서류에 고무도장을 찍는 것으로 거의 모든 일이 완료되었다. 여기서 정신병 환자의 심리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환자들을 연구하면서 나는 망상과 환각에 의미의 싹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병의 이면에는 그 사람의 인격, 살아온 역사, 일정한 형태의 희망과 소망이 있었다.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잘못은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사실상 정신병 환자들에게서 새롭거나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본성 저변을 만나는 것이다. 문제의 해결책은 늘 개별적이기 때문에 나는 가능한 한 모든 환자를 개별적으로 대한다. 보편적인 규칙은 소금 한 톨처럼 가장 작은 단위에서 시작한다. 심리학적 진리는 반대로 뒤집을 수 있을 때에만 타당하다. 나에게는 전혀 소용없는 답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답일 수 있다 …여기서 내가 환자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마주하는 것이 핵심적이다. 모든 치료에서 문제는 증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에 있다. 우리는 인격 전체를 다룰 수 있는 질문들을 던져야 한다.

 

융은 대학병원에서의 의료강습이 내적 갈등이 일어날 때 평정심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융은 자서전에서 그의 본성에서 가장 강력한 요소는 “이해하고자 하는 강력한 욕구”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기본적인 심리가 주로 직관적이고 지적이라고 정의했다. 일상생활 속에서 관찰할 수 있는 현실을 통해 직관적인 깨달음을 얻는 것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그의 삶을 특징짓는 삶의 일부분이었다. 그는 스물한 살 때 사교 모임에서 계단에 있는 땋은 머리의 열네 살 소녀를 어렴풋이 보았다. 그 순간 섬광과 같은 생각이 번뜩였다. “나의 아내구나!”
그녀를 본 것이 찰나였기에 그런 생각이 들자 크게 떨려왔다. 하지만 그녀가 내 아내가
될 것이라는 절대적인 확신이 순식간에 들었다. 그로부터 6년 후 엠마 라우셴바흐는 이 젊은 의사의 청혼을 거절했지만, 그가 두 번째 청혼했을 때 결혼을 승낙했다. 출간되지 않은 그들의 연애편지를 읽어본 사람에 따르면 그 편지들에는 “낭만적인 아름다움과 감성적인 매력”이 있었다. 1903년 결혼한 그들은 딸 네 명과 아들 한 명을 낳았다.
조용하고 차분하며 명석하다고 묘사된 엠마는 결혼 초기부터 융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호감 가는 그녀의 태도와 자연스러운 유쾌함은 분명 사교적인 장점이었다. 부유한 제조업 가문 출신인 그녀의 지참금은 융의 경제난을 해결해주었다. 퀴스나흐트에 지은 그들의 집 입구에는 델포이 신탁의 문구 “불러내든 불러내지 않든 신이 함께하리라”가 라틴어로 새겨져 있다.
융이 엠마에게 쓴 편지 중 출간된 편지들을 보면 대부분이 그가 출장을 가서 만나거나 본 사람, 장소, 자연에 대한 선명한 인상을 유려하고 재치 있게 설명하고 있다. 증기선 “빌헬름 대제”를 타고 폭풍우 속에서 대서양을 건널 당시 융은 편지를 썼다.

 

밖에서는 때때로 천둥 같은 파도가 번개를 때렸소. 그럴 땐 내 선실의 물건들이 모두 살아났지. 반쯤은 어두운 가운데 소파의 쿠션은 바닥을 굴렀고 누워 있던 신발 한 짝은 벌떡 일어나 놀란 모습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소파 밑으로 조용히 들어갔소. 서 있던 신발 한 짝은 피곤한 듯 옆으로 몸을 돌려 제 짝을 따라갔지. 이제 장면이 또 바뀌었소. 나는 신발이 내 짐가방과 서류가방을 가지러 소파 밑으로 들어간 것으로 생각했소. 일행 모두가 침대 밑의 큰 트렁크를 향해 행진했소. 소파 위에 있던 셔츠의 소매 한쪽은 그들에게 간절한 손짓을 했고 상자와 서랍 속에서는 덜거덕, 덜컹덜컹 소리가 들려왔소. 갑자기 바닥 아래서는 달가닥, 와르르, 쨍그랑 심한 굉음이 났소. 내 방 아래에는 주방이 있었거든. 그곳에서는 죽은 것처럼 무기력했던 접시 오백 장이 충격 한 번에 깨어나 과감한 점프로 지긋지긋한 자신의 노예상태를 단번에 끝내 버렸구려. 근처의 모든 선실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메뉴의 비밀을 알려주었소. 숙면을 취하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바람이 다른 방향에서 불어오는군 … 여기서, 특히나 대양과 별이 빛나는 밤 고독하게 있을 때 사람이 무슨 말을 하겠소? 조용히 밖을 보며 모든 거만함을 내버리니 많은 격언과 이미지가 마음속을 지나가오. 낮은 목소리가“ 부풀어 오르며 너울거리는 바다”, 여행에 지친 오디세우스를 위해 끓어오르는 파도 거품 속에서 나타나 진줏빛 베일을 내주어 포세이돈의 폭풍우에서 그를 구한 사랑스러운 여신 레우코테아의“ 바다와 사랑의 물결”의 오랜 세월과 무한함에 대해 무언가 말하고 있소. 바다는 영혼의 꿈을 모두 담아 그 소리를 전하는 음악과 같소. 바다의 아름다움과 장대함은 우리 존재를 정신의 풍요로운 저지대로 끌고 내려가 자신을 마주하고 재창조하도록 하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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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주나가 번개 같은 동작으로 적을 향해 화살을 네 대 연달아 쏘았다

 

 

 

 

크리슈나는 내면의 갈등으로 혼란에 빠진 왕자의 정신적 지주 역할만 한 것이 아니었다. 능숙한 전차병이었던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와 함께 전장을 누비는 든든한 조력자였다. 그의 도움이 얼마나 절실한 것이었는지는 아르주나가 크리파와 벌인 전투에 대한 묘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매 순간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도 대적하기 힘든 막강한 상대를 만난 아르주나에게는 전차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그때 아르주나가 번개 같은 동작으로 적을 향해 화살을 네 대 연달아 쏘았다. 금빛 깃털을 휘날리며 날아간 화살의 날카로운 촉이 불타는 뱀처럼 크리파의 말 네 마리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말들의 비명이 전장에 울려 퍼졌고 크리파의 전차는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었다. 제대로 땅에 발을 딛지 못하는 크리파를 보고 있자니 적일지언정 그 순간 그를 덮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아르주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비록 수많은 적군의 영웅들을 이미 살육했을지라도 말이다. 크리파의 위엄을 지켜주고자 천금 같은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다. 이내 균형을 회복한 크리파는 백로 깃털이 달린 화살 열 대를 아르주나를 향해 쏘았다. 하지만 명궁 아르주나가 단 한 대의 화살로 크리파의 활을 반동강 냈고, 크리파는 활을 놓치고 말았다. 곧이어 아르주나가 쏜 화살이 크리파가 입은 갑옷의 취약한 부위에 명중했다. 크리파의 가슴을 덮고 있던 갑옷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그러나 크리파는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갑옷이 벗겨진 크리파는 흡사 허물을 벗은 뱀처럼 보였다. 크리파는 다시 활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두 번째 활도 세 번째 활도 아르주나가 쏜 화살 때문에 연거푸 놓치고 말았다. 뭔가 단단히 결심한 듯한 표정을 지은 크리파는 거대한 장창을 움켜쥐었다. 맹렬한 기세로 집어던진 장창이 낙뢰가 떨어지듯 아르주나를 덮쳤다. 아르주나가 황급히 쏘아올린 화살은 이 거대한 장창마저 산산조각내 버렸다.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흔들림이 없는 크리파는 다시 활을 잡고 열 대의 화살을 아르주나에게 날렸고 아르주나도 불을 뿜을 듯한 기세로 열세 대의 화살을 쏘아 반격에 나섰다. 첫 번째 화살이 멍에를 박살낸 것을 시작으로 네 대의 화살이 전차를 끌던 말들의 명줄을 끊어놓았다. 여섯 번째 화살에 전차병의 목이 달아났고, 세 대의 화살이 연이어 전차를 지탱하는 네 개의 대나무 기둥에 박혔다. 차축에는 두 대의 화살이 날아와 박혔고 열두 번째 화살이 크리파의 전차를 장식한 삼각기를 갈가리 찢어놓았다. 벽력 같은 기세로 바람을 가른 열세 번째 화살의 날카로운 촉이 마침내 정통으로 크리파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남은 것은 부러진 활과 넝마가 된 전차, 그리고 죽어 널브러진 말들뿐이었다. 안간힘을 써 몸을 일으킨 크리파는 아르주나를 향해 징이 잔뜩 박힌 곤봉을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하지만 이마저도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르주나의 신들린 화살이 날아오는 곤봉에 명중한 것이다.
크리파의 부하들이 말리지 않았다면 이 결투는 아마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군을 지키기로 작심한 크리파의 보병들이 비 오듯 화살을 쏘아대며 접근하여 아직 분이 식지 않은 크리파를 전장에서 끌어냈다. 애매모호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크리파는 인도 서사시의 대표적인 영웅이자 전사로 추앙받는다. 하지만 사실 크리파가
위와 같은 명승부를 펼칠 수 있었던 건 크리파가 균형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준 아르주나의 아량 덕분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아르주나는 충분히 적을 해할 수 있었음에도 적병들이 부상당한 크리파를 안전하게 옮길 때까지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 그는 크리파의 명예를 존중했으며, 그 덕에 크리파는 살아남아 다시 전투에 임할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아리아인의 무용담을 담은 대서사시로는 『마하바라타』 외에도 『라마야Ramayana』가 있다. 『라마야나』는 『마하바라타』에 비하면 비교적 짧은 서사시이다. 『마하바라타』가 여러 차례의 수정・증보를 거친 문헌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라마야나』의 탄생은 기원전 3세기경 인도의 전설적인 시인 발미키의 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발미키는 구전되던 음유시가들을 모아 『라마야나』를 집대
성했다. 고대 그리스의 호메로스가 『일리아드』란 대작을 남긴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호메로스의 작품세계와 인도 대서사시를 비교하는 학문적 연구가 많다. 그 중에서도 초기 산스크리트 문학의 교본이라 할 수 있는 『라마야나』와 『일리아드』를 비교하는 연구가 많다. 특히 『라마야나』에서 주인공 라마(코살라 왕국의 왕자)가 납치된 아내 시타를 구하기 위해 현재의 실론 섬인 랑카 섬으로 원정을 떠나는 대목이 주로 원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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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인이 인도 북서부를 점령했다

 

 

 

 

 

 

 

인더스 문명의 종말을 고한 것은 먼지를 흩날리며 달려온 아리아인의 전차부대였다. 가공할 공격력을 지닌 이 부대에 대응할 이렇다 할 전력이 없었던 인더스 계곡의 주인들이 내세운 건 보병이었다. 물론 승패는 자명했다. 아리아인이 인도 북서부를 점령했고, 아리아 군대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 전차는 이후 1000년 동안 아리아인의 지속적인 사랑을 받았다. 전차가 전장에서 더 이상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된 때에도 인도 군대에는 전차부대가 편성되어 있었을 정도였다. 전차는 심지어 신성한 들것으로 받들어지기까지 했다. 신전에서 이 거대한 운송수단을 애용했던 것이다. 힌두교의 여러 신들을 실은 전차가 도시 곳곳을 행진하는 행사가 종종 열렸다. 이 전차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자간나타Jagannatha에서 영어 저거너트Juggernaut가 유래했다. 저거너트는 대형 트럭이나 버스를 의미한다. 힌두교 행사에 쓰인 전차는 매우 거대했다. 전차를 지탱하는 여섯 개의 바퀴 지름이 사람 키의 두 배가 넘는 것도 있었다.
서사시 『마하바라타』에는 이 아리아 전차부대 전사들의 무용담이 담겨 있다. 음유시인들은 전차부대의 전사로 전투에 나서는 주인을 따라 전장에 나가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시인들이 숨 가쁘게 진행되는 전차부대의 박진감 넘치는 혈투에서 벌어지는 영웅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후대에 전해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갠지스 강 상류를 배경으로 하는 『마하바라타』는 쿠루족의 수도로 갠지스 강의 상류, 델리의 동북 약 95km 지점으로 추정되는 하스티나푸라에서 벌어진 왕위를 둘러싼 골육상잔의 전투를 다루고 있다. 여러 개의 에피소드들로 구성된 이 대서사시는 오랫동안 구전되면서 수정・증보를 거쳐 4세기경 현재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권선징악의 내용이 다수 추가된 탓에 『마하바라타』는 전형적인 서사시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하스티나푸라에서 벌어진 판두족(판두족에는 5명의 왕자가 있었다)과 쿠루족(쿠루족에는 100명의 왕자가 있었다) 간의 왕위 다툼에 대한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이다. 친족임에도 오랜 기간의 왕위계승 문제로 견원지간이 된 두 왕족은 마침내 쿠루크셰트라Kurukshetra 평원에서 대접전을 벌인다.
『마하바라타』에는 뛰어난 궁술을 지닌 아르주나 왕자가 등장한다. 쿠루크셰트라 평원의 결전에 참여하기 위해 전차에 오른 아르주나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동족상잔의 비극에 동참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혔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탄 전차를 모는 전차병 크리슈나에게 가혹한 운명을 한탄했다. 크리슈나는 비슈누의 제8화신이다.
그는 아르주나에게 판두족의 왕자이자 전사로서의 소명을 다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며 그의 참전을 독려한다. 아르주나를 향한 크리슈나의 설교를 담은 문헌이 바로 『바가바드 기타Bhagavad-Gita』이다. 『바가바드 기타』에서 크리슈나는 이렇게 말한다.

 

죽은 자나 산 자를 위해 비탄에 잠기는 건 현명치 못한 일이니라. 나 자신이나, 네가 존재하지 않았던 순간은 없었고, 우리의 존재가 사라지는 순간은 결코 다가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르주나는 인간의 영혼은 ‘영원불변’하기에 파괴할 수 없다는 크리슈나의 가르침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번민에 휩싸여 있는 아르주나에게 크리슈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일깨워준다. “생각이 아닌 실천으로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노라.”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다른 이의 의무를 행하는 것보다 자신의 의무를 성심으로 완수하는 것이 더 훌륭한 일이니라.”
『바가바드 기타』에 담긴 윤회사상과 각자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윤리관은 후대 인도 신앙의 근간을 형성했다. 『바가바드 기타』가 『마하바라타』로 편입될 즈음에 구전되던 이 대서사시의 기록이 완결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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