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과 프로이트

 

 

 

 

 

 

 

융은 자신의 삶에서 “진정 중요하다고 생각한 최초의 사람”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함께 미국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잘츠부르크에서 국제정신분석학회가 열린 다음 해인 1909년이었다. 둘은 매사추세츠 클라크 대학의 초청을 받아 강연을 했고 그곳에서 명예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융은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이제 내 이름이 새겨진 법학박사학위가 있소. 매우 뜻깊은 일이오 … 프로이트도 매우 기뻐하고 있는데 기뻐하는 그를 보니 진심으로 흐뭇하오.

 

스위스에서 성공을 거둔 중견 의사이자 작가이며 강연자인 융은 프로이트를 지지하는 것이 자신의 학문적 명성에 타격이 있음에도 시대를 앞서 가는 그를 수년간 공개적으로 옹호했다. “화려한 고독” 속에 있던 프로이트는 20세기를 갓 넘어선 시기에 빈에서 정신분석학회를 창설했다. 프로이트의 이름을 “최대의 증오” 대상으로 만든 유년기 성적 본능에 대한 연구결과가 발표된 1905년의 일이다.
1900년대 초반 융은 프로이트의 획기적인 저서 『꿈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Dreams』을 읽고 “이 모든 것이 그의 생각과 연결되는 원리를 발견했다.” 그는 자신의 연구에서 프로이트의 글을 인용하기 시작했다. 융이 프로이트에게 자신의 저서를 보낸 후 1906년부터 두 사람은 서신을 왕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융이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부터 융과 프로이트 간의 큰 의견 차는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히스테리의 기원은 성이 지배적인 요소이지만 그것이 전적인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의 성적 이론에 대해서는 같은 의견입니다.

 

친애하는 동료에게,
자네의 저술은 오랜 기간 자네가 나의 심리학을 옹호하면서도 히스테리와 성의 문제에관해서는 나의 시각에 찬성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인상을 주었네. 하지만 몇 년 후에는 자네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나와 가까운 생각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하네 …
프로이트 박사

 

그 다음 해에 정신분열병을 다룬 융의 책이 출판되었다. 이 책의 도입부에서 그는 “프로이트의 놀라운 발견에 감사한다”고 인정하면서도 “사람은 독자적인 판단력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책을 계기로 융은 빈에 있는 프로이트의 집에서 처음으로 그를 만났다.

 

우리는 오후 한 시에 만나 정말로 휴식도 없이 열세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프로이트는 내가 만난 사람들 중 처음으로 진정 중요하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당시 그와 비교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태도 중 대단하지 않은 점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가 상당히 지적이고 예리하며 전체적으로 훌륭하다고생각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다소 복잡했다. 나는 그를 완전히 파악하지못했다. 그가 말한 성적 이론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어도 나의 망설임과 의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나의 망설임에 대해 몇 번 본격적으로 논의해보고 싶었지만 그는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경험 부족 탓으로 돌렸다. 프로이트의 말이 맞았다. 당시 나는 나의 이견을 뒷받침할 만한 충분한 경험이 없었다 …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의문은 영혼에 대한 프로이트의 태도였다. 그는 사람이든 예술작품이든 영성의 표현을 볼 수 있는 어디서든 그것은 억압된 성욕이라는 투로 말했다. 그리고 성욕으로 직접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정신성욕psychosexuality”으로 간주했다. 나는 이에 반대하며 그것이 사실이라면 문화는 단지 억압된 성욕의 병적인 결과라는 광대극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바로 그렇다네”라고 그는 말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맞서 싸울 힘이 없는 운명의 저주이지.” 그 말에 절대 동의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냥 넘겨 버리고 싶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와 논쟁을 벌일 자신이 없었다.

 

프로이트는 융을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로 대하기 시작했다. 융에게도 프로이트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지만 그런 감정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열아홉 살이라는 나이 차가 그들을 갈라놨고 둘 사이에는 의견이 충돌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들은 대부분 서신으로 의견을 교환했다. 그들은 7년 동안 방대한 양의 서신을 왕래하며 과학적 의견, 부모, 동료, 정신의학 운동의 어려움, 개인사, 인간관계에 이르기까지 친밀하게 의견을
나누었다. 융은 자신의 사후 30년까지는 그 서신들이 출판되지 않기를 바랐다. 여든세 살이 된 융은 프로이트와의 서신을 “나의 청춘의 나날을 가득 채웠던 놀라운 어리석음을 상기시키는 불행하면서 지울 수 없는 추억”이라고 했다. 융의 서신은 많은 수가 보존되지 않았지만 남아 있는 것들 가운데 프로이트와 주고받은 서신들은 그의 성격과 성장기의 여러 측면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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