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이 주는 행복』(도서출판 知와 사랑)

부제: 나를 치유하는 신성한 연결고리

 

 

 

 

사랑으로 소통하기

 

서로 관계를 맺고 소통할 때는 늘 사랑으로 소통하라. 어떤 사람을 마음에 품게 되면, 우리는 그 사실을 상대방이 불쾌하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어떻게 전달할지 고심한다. 하지만 당신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 부끄러움이나 슬픔, 적대감은 당신을 마비시킬 수 있다. 그래서 자아는 그것을 위협 상태로 인식하고, 서둘러 자기 방어적 행동을 취한다. 하지만 상대에게 반응하기에 앞서, 당신에게 고통을 준 사람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도록 노력해보라. 어쩌면 그 사람의 행동은 당신과 상관없이 그 자신의 불안함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감정을 표출할 곳이 절실해 당신을 표적으로 삼았을 수 있다.
당신과 주변 사람들 사이의 사랑을 강화할 수 있는 힘을 찾아보라. 당신과 상대방 양쪽 모두가 빛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이 사람은 왜 나에게 지금 친절과 존경을 베풀지 못할까? 이 사람의 내면에 내가 치유를 도와주어야 할 아픔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앞에서도 말했듯이 당신에게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주어야 할 책임은 없다. 하지만 자아의 두려움을 넘어 다른 이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면 당신도 새로운 힘을 얻게 된다. 고통에 찬 비명을 한참 지르는 와중에 부드럽고 이해심 넘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 사람도 놀랄 것이다. 이런 반응으로 그
사람의 자아는 누그러질 것이며 어떤 경우에는 즉시 그렇게 되기도 한다. 일체감은 당신이 올바른 표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평정을 가져다준다. 다른 사람의 말에 기계적으로 ‘하지만……’을 덧붙이지 말고, “당신의 말을 전적으로 이해해요. 하지만 제 생각도 들어보세요”라고 답한 다음에 당신의 의견을 피력하라. 혹은 “죄송하지만 잘 이해가 안 되는군요”라고 답한 다음에 그 사람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질문을 던져보라.
“너무 서두르시는 것 같네요”라고 말하고 참을성 있게 물러나면, 당연히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서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이 사과하고 자기 차례를 기다리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그는 떠날 때 자신의 부당한 행동에 대해 당신이 얼마나 부드럽고 친절하게 지적했는지 한 번쯤 생각해볼 것이다. 기억하라, 무조건적인 사랑은 단숨에 눈에 띄는 결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누군가의 파괴적 행동과 그 때문에 형성되는 악업에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고도 그 사람에게 주의를 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개인적으로 나는 정면대결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면 대결은 언제나 논쟁거리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저 단순히 이렇게 물어보면 어떨까? “문제에 대해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세요?” “이 상황에 대해 힘들어하고 있군요. 제 말이 맞나요?” 아니면 “상황을 바꾸고 싶은가요? 그렇다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세요?”
만약 상대방이 아주 재빨리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그도 자신의 행동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바꾸기를 두려워하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뜻이다. 이때 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의 행동과 사고 그리고 감정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며, 그 과정에서 도움의 손길이 늘 함께하리라는 확신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도움을 주되, 그 사람을 꾸짖거나 어떻게 하라고 강요하지 말라. 인간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본능적으로 반대의 행동을 하고 싶어한다.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을 자아는 좋아하지 않는다!
만약 상대가 당신에게 충격이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말을 하더라도 화를 내지 말라. 그 사람은 그저 자신의 자아에 휘둘리고 있을 뿐이니 싸움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만약 침착함을 유지하기 어렵다면 그 순간 대화를 멈추고 잠시 자리를 피하는 편이 낫다. 잠깐의 기도나 명상으로 냉정을 되찾고 나서 다시 돌아와, 사랑의 마음으로 소통을 계속하라. 때에 따라서는 다시 대화를 시작하기까지 며칠이나 몇 주가 걸릴 수도 있다. 당분간 거리를 두고 서로가 직접적인 대면을 피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부정적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사람마다 자아가 진정되는 속도는 다르다. 열띤 논쟁 뒤에는 연민의 효과가 나타나 자신이 비이성적이고 성급하게 반응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시
간이 제법 걸릴 수도 있다. 누군가와의 갈등이 예견된다면 그 사람과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참을성과 자비심을 달라고 기도해보라. 적절한 표현을, 침착함을, 사랑을 그리고 힘을 발견하게 해달라고 신에게 요청하라.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대화를 미리
상상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라. 모든 갈등은 화합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 속에서 당신과 상대방은 자신의 사고를 더욱 확장하고 일체감을 경험할 수 있다. 당신이 끝까지 공손하게 대하고 존경 어린 단어와 어조를 유지한다면, 상대방은 성급하고 화를 잘 내는 자신의 업에 대해 반성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또한 자신이 왜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없는지를 반성하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사람이 앞으로 소통 방식을 개선하는 데 중요한 교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총체성을 깨닫고 그 사람이 소심함과 두려움, 분노에서 벗어나 동정심과 협동심을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베풀어보라.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카르멘 하라 박사는 '더 뷰The view', '굿모닝 아메리카Good morning America', '투데이 쇼Today show' 그리고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 [뉴욕 포스트The New York Post]를 비롯한 미국의 텔레비전 쇼와 언론 매체에 출연하는 유명 인사이며 심리치료학자다.

할리우드 스타에서부터 저명한 정치인들까지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다년간의 경험을 통한 부부 치료나 인지치료 방식이 그녀의 신비한 직관력과 합쳐져 그녀는 세계적인 상담사로 발돋움했다. 또한 세 장이나 음반을 낸 재능 있는 음악가이며, 자신만의 고유한 보석을 디자인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홈페이지 www.CarmenHarra.com과 페이스북 carmen Harra- (Wholeliness)를 방문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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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공자의 사상과 인품을 보여주는『 논어』

 

『논어』는 공자의 제자와 그다음 세대의 제자들이 공자와 제자들의 언행 일부를 기록한 책으로 춘추전국시대에 완성되었고, 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으로 손꼽히고 있다. 훗날 『논어』는 한국, 일본, 베트남으로 전해졌고 서양과 아랍 세계에도 전해져 세계의 문화유산이 되었다. “공자는 중국의 성인이자 유교의 교주다. 그리고 『논어』는 중국의 성경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캉유웨이(강유위康有爲)도 “유학자들은 천명을 근본으로 삼아 신의 힘을 펼쳐 보였고 공자 역시 하늘을 공경하고 하느님을 받든 교주다”라고 했다.
『논어』는 공자의 생애와 언행을 기록하여 품격과 원기 넘치는 그의 사상을 완벽하게 정리한 책이다. 공자는 자신이 저술한 책을 남기지 않았지만 제자들이 그의 언행을 기록하여 『논어』를 남겼고 현재까지 전해진다. 『논어』는 사상, 정치, 사회생활 등 모든 영역을 다루고 있을 정도로 내용이 광범위하고 깊어서 고대 중국 정치사상과 중국 민족의 정신적 소양 및 도덕 행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논어』는 더 나은 삶을 깨우치고 사람됨을 가르치는 지혜의 책으로, 반복해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내가 하고자 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억지로 시키지 말아야 한다.
己所不欲 勿施於人

인을 행함은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마라.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가운데 나의 스승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當仁不讓於師, 三人行, 必有我師.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의롭지 않은 부귀가 내게는 뜬구름과 같다.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탓하라.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선비는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짐이 무겁고 길이 멀기 때문이다. 인으로 자신의 책임을 삼으니 정말로 막중하지 않은가?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내가 종일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자지 않으며 사색했으나 유익함이 없고 배우는 것만 못했다.
吾嘗終日不食, 終夜不寢, 以思, 無益, 不如學也.

억측하지 않고 기필하지 않으며 고집하지 않고 아집을 부리지 않았다.
毋意, 毋必, 毋固, 毋我.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30세에 뜻이 확고하게 섰으며, 40세에 인생관이 확립되어 마음에 유혹이 없었고, 50세에는 천명을 깨달았으며, 60세에는 어떠한 말을 들어도 그 이치를 깨달아 저절로 이해할 수 있었고, 70세에는 마음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十有五而志於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逾矩.

날이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더디 시든다는 걸 안다.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

삼군에서 그 장수를 빼앗을 수 있지만 한 남자에게서 그 뜻을 빼앗을 수는 없다.
三軍可奪帥也, 匹夫不可奪志也.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朝聞道, 夕死可矣.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인자한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知者樂水, 仁者樂山.

먼 앞날을 걱정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날에 근심이 생긴다.
人無遠慮, 必有近憂.

작은 것을 참지 않으면 큰 계책을 어지럽힌다.
小不忍, 則亂大謀.

 

이 얼마나 통찰력 있고 심오한 뜻인가? 꾸밈없이 수수하지만 간결함 속에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명구들에서 공자의 심오한 사상과 인품을 엿볼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이 사회주의 정신문명을 이룩하는 데 이 명구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공자는 인을 근본으로 “노역은 가볍게, 세금은 적게 거둔다”,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고 백성을 부유하게 한다”, “너그러움과 엄격함을 잘 조화시킨다”, “덕으로써 이끈다”, “존경과 어짐으로 가능하게 한다”, “덕으로 가르치고 예로 다스린다”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덕정학설을 주장했다. 이 사상은 『논어』에 잘 드러나 있고 지금도 유효해서 조화로운 사회 건설에 본보기로 삼을 수 있다. 그래서일까? 어떤 사람은 “『논어』는 영원히 식지 않는 공자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경전”이라고 했다.
『논어』를 읽으면 큰 지혜를 얻을 수 있고 아직도 살아 숨 쉬는 공자를 만날 수 있다. 공자의 학술적 위대함과 인격적 위대함이 ‘온화한 지혜자’라는 단어에서 모두 드러난다. 공자는 한평생 인애의 마음을 실천하여 ‘덕은 천지에 가득 차고 도는 고금을 통틀어 뛰어났다’는 경지에 이르렀다. 사람이 지초와 난초로 가득한 방에 오래 머물면 지란의 향기가 몸에 자연스럽게 배고 고상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연히 덕 있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논어』를 가까이 두고 익히면 도덕 수양의 효과가 커진다.
그러나 『논어』는 안타깝게도 5·4운동 이후 봉건의 상징으로 비판받았으며, 공자는 문화대혁명 때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국가는 고유의 민족정신과 전통 문화를 성찰하고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탐구해야 한다. 오늘날 『논어』는 재조명되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 경전 읽기운동이 시작되었는데 『논어』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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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감정을 변화시키기

 

기쁨에서 만물이 생겨난다. 기쁨으로 만물이 존재하고, 기쁨을 향해 만물이 나아가며 만물이 기쁨으로 돌아온다.에픽테토스Epictetus(50~135년경)

 

 

뉴멕시코 주의 마을 타오스 근처에는 아름답고 인상적인 협곡에 걸쳐진 다리가 하나 있다. 어떻게 해서 강물이 오랜 세월에 걸쳐 바위를 뚫고 길을 만들었는지 볼 수 있는 곳이다. 이 다리 위를 걸으면 숨 막히는 광경에 경외감이 절로 솟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다리를 보고 전혀 다른 감정을 느낀다. 해마다 이곳에는 협곡 아래로 뛰어내려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들의 불행을 극적으로 마감하려는 정신 나간 사람들에게 이 협곡은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나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같은 매력을 지니고 있다. 다른 곳처럼 타오스의 주민들은 최근에 이런 극단적인 행동을 막기 위한 일종의 보호 장치를 만들 것을 고려하고 있다. 그중에 안전망을 설치하는 건 좋은 아이디어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안전망은 사실 다른 종류의 것이다. 우리에게는 지혜라는 안전망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감정을 다스리는 능력이 필요하다. 감정은 사람이 죽어야 할 이유가 될 수 없다. 그 밖의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감정에도
무상과 무아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성공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정을 잘 다루지 못한다.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은 일반적으로 학교 교육 과정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그 방법을 배워야 한다.
다행히도 우리는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불도에서는 바로 마음챙김이 정서적으로 우리 자신을 돌보는 기술의 열쇠가 된다. 최근 심리학 분야에서도 우리의 기분과 감정을 바꾸는 마음챙김의 효과가 발견되고 있다. 마음챙김은 강력한 방법이다.
이 장에서 우리는 생각과 감정의 본질을 살펴보고 이것들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알아볼 것이다.

 

 


● ● 우리가 우리의 세상을 창조한다

우리 모두 많은 요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관에 좇아 행동하고 있다. 그 세계관을 형성하는 것들은 유전, 어렸을 적의 경험, 의심을 품지 않고 부모나 선생님에게서 그대로 받아들인 세상에 대한 미묘한 암시, 개인적인 역사와 공통의 역사에서 겪은 사건들이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는 삶에 대한 기대치, 인간관계와 직장, 어떤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에 대한 기대치 그리고 그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기대치를 만들어낸다. 이런 기대치는 사람마다 다르다. 행복한 사람들은 항상 좋은 일이 일어나는 세계에서 산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자애로움을 본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은 삶을 끝없이 흥미롭게 본다. 그러나 화가 난 사람들은 항상 부당한 세계에서 살아간다. 샘이 많은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자기보다 더 많이 가진 세계에서 살아간다. 슬픈 사람들은 언제나 불행한 일을 당하며 살아간다. 근심하는 사람들은 무섭고 위험한 세계에서 살아간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우리는 같은 세상에 살고 있지 않는 걸까?
이는 우리의 세계관이 지속적으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라고 신약 성서에 적혀 있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이 찾고 있는 그 무엇을 얻게 될 것이다. 화가 난 사람들은 자신이 느낀 부당함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들의 경험에서 부당한 측면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부당한 점을 발견한다. 더욱이 그들이 화를 내면 주변 사람들까지 화가 나기 때문에 부정적인 연쇄반응이 시작된다. 그런 부정적인 반응은 계속해서 불공평한 경험을 만들어내고 마침내 화가 난 사람의 세계관을 정당화하여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충분한 이유를 마련해준다.
이와 비슷한 많은 유형들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로 자신이 사람의 성격을 잘 판단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성향으로 인해 자신의 단점은 찾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지닌 성격상의 단점만을 찾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가 사는 세계에는 모든 사람에게 커다란 단점이 있어서 거기서 그는 끊임없이 실망하고 화를 내며 많은 시간을 보낸다. 또 다른 유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용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이용당하지 않나 살피고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속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자신의 시각을 바꾸는 방법을 배워야만 즐거운 삶을 누릴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자애로움에 집중하는 방법을 배운다면 세상은 덜 적대적이고 덜 불공평해 보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선함을 보려고 노력한다면 사람들의 행동이 좀 더 타당하게 보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과 고통에 집중하면 자신의 자애와 자비를 발견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자애와 자비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샘이 많은 사람들은 자기보다 덜 가진 사람들을 좀처럼 보지 못한다. 자신이 가진 것에 집중하는 방법을 배운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보다 덜 가졌는지 보기 시작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시샘하는 고통에서 벗어나 풍요로운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단순히 감관의 경험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태도, 믿음, 기대가 함께 만들어낸 세상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의 마음에서 나온 산물이다. 우리의 기분에 따라 세상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행복을 느낄 때 비는 부드럽고 친근하며 기운을 북돋아주는 단비가 되지만, 슬플 때 비가 오는 세상은 지금도, 과거에도, 미래에도 우울하고, 축축하고, 차갑고, 달갑지 않게 된다. 자애로움과 행복을 느낄 때는 도로 위의 다른 운전자들이 상냥하고 협조적으로 보인다. 다른 차가 들어오도록 속도를 늦춰주고, 깜빡이를 켜고, 다른 사람들의 실수를 눈감아주는 사람들의 친절함을 발견한다. 화가 나거나 슬플 때는 다른 운전자들이 하나같이 나쁜 놈들이다.
마음과 상황은 궁극적으로 하나다.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심오하면서도 광범위한 면에서 사실이다. 그래서 행복해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 마음을 치료하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을 치료할 때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 마음과 상황은 궁극적으로 하나라서 분리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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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하라의 『일체감이 주는 행복』(도서출판 知와 사랑)

부제: 나를 치유하는 신성한 연결고리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그 대가를 기대하지 말기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 때, 상대에게서 어떤 대가를 받겠다는 기대를 하지 말자. 순수한 사랑을 베풀었을 때 느끼는 내면의 기쁨은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기는 쉽지 않다. 불안정한 우리의 자아는 감사의 표현이나 대중적 명예 같은 어떤 구체적인 보상에 대한 약속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주기만 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자아는 우주가 언제나 베풀기만 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다 보면, 결핍과 두려움(자신을 돌보는 데 필요한 돈이나 시간 혹은 에너지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사그라든다.
만약 당신이 무조건적인 사랑이 넘치는 곳에서 이 세상으로 온 것이라면, 베푸는 일에 시간과 인내심과 감정적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더라도 의기소침해지기보다는 힘이 샘솟을 것이다. 신성한 사랑의 에너지를 받아 당신의 영혼도 새로운 활력으로 가득 차기 때문이며, 영적 존재로부터 받은 그 선물 덕분에 관대함이 영혼에 쌓여 있기 때문이다. 휴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식사와 숙면, 몇 시간의 묵상으로 원기를 회복해야만 할 때, 당신은 내면의 소리를 듣고서 몸과 마음, 영혼의 욕구에 집중할 수 있다. 자신이 얼마나 좋은 부모인지, 착한 아들딸인지, 유능한 직원인지, 훌륭한 배우자인지 증명해야 할 필요성이 정말 절실하고 두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필요성을 느껴 베푸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은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베푸는 것은 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를 위해서다.
우리 사회에는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며 울부짖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이웃의 슬픔을 보고 연민을 느끼면서도 선뜻 도와주려 나서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죄의식을 느끼며 산다. 연민의 마음을 느껴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청원에 서명하고 정치인들에게 편지를 쓰는 등 고귀하고 의미 있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 베풀다 보면, 기쁨을 느끼고 계속 베풀 수 있는 에너지가 생겨난다. 고귀한 실천을 할 기회는 어디에나 있다. 인터넷 검색창에 자신의 지역이나 도시와 ‘자원봉사 활동’이란 단어를 치기만 해도 수많은 가능성이 발견될 것이다. 소심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가 꺼려진다면 다른 사람과의 사회적인 소통이 그다지 필요 없는 자원봉사 활동부터 시작하는 것도 좋다. 그러다 보면 봉사 활동이 너무 재미있었던 나머지, 어느 날에는 다른 누군가를 내근 사무실에 남겨두고 낯선 이를 만나거나 여행 가이드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놀랄 것이다. 두려움을 놓아버리고 가슴으로 모든 것을 대하다 보면, 자신과 관심 분야가 비슷한 새로운 친구를 만나게 되고 그 일의
가치를 느끼게 된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베풂은 더욱 중요한 핵심이다. 우울함과 분노 그리고 절망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희망적이고 색다른 전망을 제시해보라. 불안과 걱정에 싸여 있는 사람이 있다면 희망이 얼마나 큰 힘을 지녔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그 사람과 공유하라. 그리고 그가 더 나은 상황을 위해 노력하는 동안 당신이 모든 지원을 아까지 않겠다고 전하라. 비관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다면 기분을 유쾌하게 해주는 영화와 비디오, 힘을 불어넣는 책을 추천하거나 당신이 자원봉사를 하는 단체에 합류하라고 권유해보는 것도 좋다. 냉소가 삶의 의욕을 빼앗는다는 것을 따끔하게 충고해주고 다음과 같이 말해보라. “이런 상황이 닥치면 너무 심란해하는군요. 혹시 제가 도울 일은 없을까요?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문제를 풀 수 있을지도 몰라요.” 이런 격려는 상대방에게 일체감의 힘을 느끼게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 가능하다면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내보라. 외롭다고, 단절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종종 아무도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일이 끝나고 나서 소파에 드러누워 몇 시간이나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대신, 외로움과 싸우고 있는 지인들에게 전화해보면 어떨까? 그것도 좋지만 직접 그 사람을 만나는 편이 더 좋겠다. 오늘날 시간은 아주 소중한 선물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한 시간이라도 애를 쓴다면, 그것은 바로 위대한 친절을 베푸는 행위다. 힘겨워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말을 들어주기 위해 걸어오는 친구보다 더 힘이 되어주는 것은 없다.
이야기를 경청해서 상대방을 돕는다면, 그 사람의 불평을 들어주는 것도 좋지만 더 밝은 쪽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도록 길을 보여주는 것이 낫다. “오늘 일어난 일 중 좋은 일을 한 가지만 들려주세요”라고 얘기해보라. 피곤한 하루 중 아주 사소한 일에 불과하더라도 그 일을 곱씹도록 북돋아주면 좋다. 만약 당신이 신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리고 신성한 연결고리를 느낄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같이 분노하거나 우울해하지 않고서도 귀기울여 듣기가 쉬울 것이다. 당신이 거리낌 없이 베푸는 관용과 용기가 당신의 친구에게는 더 낙천적인 마음가짐으로 변화시켜주는 치료제가 될 수 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을 도움으로써 당신 자신이 느끼던 외로움과 자기 비하, 불평의 감정도 눈 녹듯 사라질 것이다. 또한 당신이 다른 사람을 돕듯이 다른 이들도 당신을 도우리라 확신하게 된다. 또한 선업을 베푸는 행위는 상쾌한 산책과 같아서 힘을 불어넣고 평화롭게 숙면에 들도록 해준다.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카르멘 하라 박사는 '더 뷰The view', '굿모닝 아메리카Good morning America', '투데이 쇼Today show' 그리고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 [뉴욕 포스트The New York Post]를 비롯한 미국의 텔레비전 쇼와 언론 매체에 출연하는 유명 인사이며 심리치료학자다.

할리우드 스타에서부터 저명한 정치인들까지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다년간의 경험을 통한 부부 치료나 인지치료 방식이 그녀의 신비한 직관력과 합쳐져 그녀는 세계적인 상담사로 발돋움했다. 또한 세 장이나 음반을 낸 재능 있는 음악가이며, 자신만의 고유한 보석을 디자인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홈페이지 www.CarmenHarra.com과 페이스북 carmen Harra- (Wholeliness)를 방문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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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예정론과 자유의지론

 

기독교는 유대교의 실낙원을 형이상학의 색채로 덧칠했다. 아담과 이브가 저지른 개인적인 실수를 보편적이며 절대적 의의가 있는 원죄로 전환시켰다. 원죄는 현실에서 모든 죄악의 근원으로 유전되어 아담의 자손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원죄와 동일하게 절대적 의의를 갖춘 하느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구속만이 원죄를 소멸시킬 수 있다. 그런데 하느님은 전지전능하고 긍휼과 공의가 충만하며 세상을 창조한 창조
주인데 왜 세상에 죄악이 생겼을까?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이 모든 악을 제거하고 싶은데 할 수 없다면, 제거할 수 있지만 제거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제거하기를 원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면, 혹은 제거하기를 원하고 할 수 있다면 등의 상황을 놓고 하나하나 따졌다. ‘신이 원하지만 할 수 없다면’의 경우는 나약해서 신의 모습에 부합하지 않고 ‘할 수는 있는데 원하지 않으면’의 경우는 사악해서 신의 성품과 충돌한다. ‘원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면’의 경우는 악하고 나약해서 신이라 할 수 없다. 악을 제거하기를 원하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이 유일하게 신의 성품과 부합한다. 그렇다면 악행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신은 왜 악행을 없애지 않는 걸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의 본질을 논할 때 악에는 실체성 혹은 본체성이 없고 선이 손상된 것이거나 본체가 손상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하느님이 창조한 만물의 자연 속성은 선한 것이다. 창조물은 현실에 존재하므로 실체라 부른다. 하느님은 결코 악을 창조하지 않았고 선한 창조물에 결함이 생길 때 비로소 악이 되는 것이다. 그는 자유의지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자유의지를 포함하여 하느님이 창조한 모든 것은 선하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건 그것 없이는 인간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며, 자연 사물을 능가하여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로 악행을 저지르도록 내버려두기 위함이 아니라 바른생활을 하게 하기 위함이다. 사람이 자유의지를 남용해 죄를 범하는 건 하느님의 의지가 아니라 사람의 의지다.
사람이 자유의지로 죄를 짓게 될 상황을 하느님이 과연 예견했는가에 대한 논란이었다. 만일 하느님이 예견하지 못했다면 전지전능하지 않은 것이고 예견했다면 사람의 죄는 필연이므로 스스로 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의 예견은 강제적이지 않다고 답했다. 하느님은 사람의 죄를 예견하지만 죄의 원인은 사람의 자유의지 때문이지 하느님의 예견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누군가가 죄를 저지를 것이라고 예상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죄를 지으라고 우리가 강요하지 않은 것과 같다. 죄의 원인은 그 사람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예견하는 하느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예견은 죄를 짓게 하려는 데 있지 않고 죄를 징벌하는 데 있다.
하느님의 예견만을 강조하고 죄를 고려하지 않는 관점은 자신의 죄를 하느님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데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유의지를 중간 선으로 보았다. 그래서 자유의지는 덕성, 진리, 지혜 등의 영원한 큰 선으로 향할 수도 있지만, 육체의 즐거움 등 세속적인 작은 선을 탐닉할 수도 있다. 전자로 향하면 미와 덕을 이루지만 후자로 향하면 죄를 범한다. 그래서 자유의지는 인성이 선한가, 악한가를 가늠할 수 있는 최종 근거가 된다. 영혼이 성령으로 가득 차면 반드시 신앙이 견고하게 서고 미덕과 선행이 행위로 드러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론에 따르면 사람의 본성은 처음에는 티 없이 맑았지만 아담과 이브가 타락한 후에는 죄가 있는 사악한 존재가 되었다. 사람은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원죄를 낳았고 그 결과 아담의 자손인 인류는 악한 본성과 죽음 그리고 고통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예정론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론에 따르면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고 얼마 후 어떤 이유로 누구에게는 구원을, 누구에게는 영원한 형벌
을 예정하셨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현실에서 구원받는 근거가 더 이상 자유의지가 아
니라 일종의 신비로운 은혜라고 한다면 현실의 도덕적 노력은 모두 헛수고가 될 것이다. 중세의 예정론은 바로 이러한 이론적 모순과 도덕 폐기의 부정적 결과 때문에 선을 쌓아 구속받는다는 자유의지론으로 점차 대체되었다.
고대 유대교의 전통에는 하느님과 인간이 언약을 세우는 계약 정신이 있다. 『구약성경』에는 하느님이 유대 민족과 최소한 세 차례에 걸쳐 언약하는 계약 관계가 등장한다. 첫 번째는 하느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한 후 의인 노아와 그의 후손에게 세운 무지개 언약이다. 그래서 무지개는 신성한 언약으로 인간과 하느님의 소통을 상징하게 되었다. 두 번째는 하느님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의 언약으로 할례를 상징물로 삼았다. 세 번째는 유대 민족을 데리고 이집트를 탈출한 영웅 모세와 하느님이 시나이
산에서 세운 언약으로 하느님은 그에게 십계명을 주었다. 십계명은 널리 전승되었다. 유대교뿐 아니라 기독교도 이 계약 정신을 이어받아 널리 알림으로써 서양문화의 뿌리 깊은 전통이 되었다. 계약은 평등을 기본 원칙으로 하는 사회 계약과 인간 계약으로 진화했다. 서양에서 국가와 종교가 민주제를 실시하고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평등을 원칙으로 하는 법치와 신성함이 특징인 기독교의 계약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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