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예정론과 자유의지론

 

기독교는 유대교의 실낙원을 형이상학의 색채로 덧칠했다. 아담과 이브가 저지른 개인적인 실수를 보편적이며 절대적 의의가 있는 원죄로 전환시켰다. 원죄는 현실에서 모든 죄악의 근원으로 유전되어 아담의 자손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원죄와 동일하게 절대적 의의를 갖춘 하느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구속만이 원죄를 소멸시킬 수 있다. 그런데 하느님은 전지전능하고 긍휼과 공의가 충만하며 세상을 창조한 창조
주인데 왜 세상에 죄악이 생겼을까?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이 모든 악을 제거하고 싶은데 할 수 없다면, 제거할 수 있지만 제거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제거하기를 원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면, 혹은 제거하기를 원하고 할 수 있다면 등의 상황을 놓고 하나하나 따졌다. ‘신이 원하지만 할 수 없다면’의 경우는 나약해서 신의 모습에 부합하지 않고 ‘할 수는 있는데 원하지 않으면’의 경우는 사악해서 신의 성품과 충돌한다. ‘원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면’의 경우는 악하고 나약해서 신이라 할 수 없다. 악을 제거하기를 원하고 할 수도 있다는 것이 유일하게 신의 성품과 부합한다. 그렇다면 악행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신은 왜 악행을 없애지 않는 걸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의 본질을 논할 때 악에는 실체성 혹은 본체성이 없고 선이 손상된 것이거나 본체가 손상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하느님이 창조한 만물의 자연 속성은 선한 것이다. 창조물은 현실에 존재하므로 실체라 부른다. 하느님은 결코 악을 창조하지 않았고 선한 창조물에 결함이 생길 때 비로소 악이 되는 것이다. 그는 자유의지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자유의지를 포함하여 하느님이 창조한 모든 것은 선하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건 그것 없이는 인간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며, 자연 사물을 능가하여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로 악행을 저지르도록 내버려두기 위함이 아니라 바른생활을 하게 하기 위함이다. 사람이 자유의지를 남용해 죄를 범하는 건 하느님의 의지가 아니라 사람의 의지다.
사람이 자유의지로 죄를 짓게 될 상황을 하느님이 과연 예견했는가에 대한 논란이었다. 만일 하느님이 예견하지 못했다면 전지전능하지 않은 것이고 예견했다면 사람의 죄는 필연이므로 스스로 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의 예견은 강제적이지 않다고 답했다. 하느님은 사람의 죄를 예견하지만 죄의 원인은 사람의 자유의지 때문이지 하느님의 예견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누군가가 죄를 저지를 것이라고 예상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죄를 지으라고 우리가 강요하지 않은 것과 같다. 죄의 원인은 그 사람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예견하는 하느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예견은 죄를 짓게 하려는 데 있지 않고 죄를 징벌하는 데 있다.
하느님의 예견만을 강조하고 죄를 고려하지 않는 관점은 자신의 죄를 하느님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데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유의지를 중간 선으로 보았다. 그래서 자유의지는 덕성, 진리, 지혜 등의 영원한 큰 선으로 향할 수도 있지만, 육체의 즐거움 등 세속적인 작은 선을 탐닉할 수도 있다. 전자로 향하면 미와 덕을 이루지만 후자로 향하면 죄를 범한다. 그래서 자유의지는 인성이 선한가, 악한가를 가늠할 수 있는 최종 근거가 된다. 영혼이 성령으로 가득 차면 반드시 신앙이 견고하게 서고 미덕과 선행이 행위로 드러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론에 따르면 사람의 본성은 처음에는 티 없이 맑았지만 아담과 이브가 타락한 후에는 죄가 있는 사악한 존재가 되었다. 사람은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원죄를 낳았고 그 결과 아담의 자손인 인류는 악한 본성과 죽음 그리고 고통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예정론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론에 따르면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고 얼마 후 어떤 이유로 누구에게는 구원을, 누구에게는 영원한 형벌
을 예정하셨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현실에서 구원받는 근거가 더 이상 자유의지가 아
니라 일종의 신비로운 은혜라고 한다면 현실의 도덕적 노력은 모두 헛수고가 될 것이다. 중세의 예정론은 바로 이러한 이론적 모순과 도덕 폐기의 부정적 결과 때문에 선을 쌓아 구속받는다는 자유의지론으로 점차 대체되었다.
고대 유대교의 전통에는 하느님과 인간이 언약을 세우는 계약 정신이 있다. 『구약성경』에는 하느님이 유대 민족과 최소한 세 차례에 걸쳐 언약하는 계약 관계가 등장한다. 첫 번째는 하느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한 후 의인 노아와 그의 후손에게 세운 무지개 언약이다. 그래서 무지개는 신성한 언약으로 인간과 하느님의 소통을 상징하게 되었다. 두 번째는 하느님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의 언약으로 할례를 상징물로 삼았다. 세 번째는 유대 민족을 데리고 이집트를 탈출한 영웅 모세와 하느님이 시나이
산에서 세운 언약으로 하느님은 그에게 십계명을 주었다. 십계명은 널리 전승되었다. 유대교뿐 아니라 기독교도 이 계약 정신을 이어받아 널리 알림으로써 서양문화의 뿌리 깊은 전통이 되었다. 계약은 평등을 기본 원칙으로 하는 사회 계약과 인간 계약으로 진화했다. 서양에서 국가와 종교가 민주제를 실시하고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평등을 원칙으로 하는 법치와 신성함이 특징인 기독교의 계약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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