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기 전에 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지구상에 살았던 사람이 960억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지금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이 그들의 유골이 아닐까 하고 생각됩니다. 사람은 죽어서 티끌로 돌아갑니다. 돌아간다는 말은 티끌로 왔기 때문에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현재의 67억 인구도 조만간 티끌이 될 것이고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를 밟고 설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내세를 믿습니다. 지구상에서의 삶이 끝나는 대로 곧 다음의 삶이 있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구상에서의 삶의 태도에 따라 바람직한 내세가 정해진다고 믿습니다. 종교는 내세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생로병사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이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합니다. 게다가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임사체험은 죽음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거의 죽을 지경에 다 달았던 경험을 말합니다. 영어로 near death experience라고 합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다고 말할 수 있지만, 죽음을 경험한 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의 말은 다양하고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분명한 건 우리는 죽음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노자老子는 출생입사出生入死라는 매우 흥미로운 말을 했습니다. 그는 생명이 태어나 죽음을 향해 간다는 뜻으로 이 말을 했습니다. 출생입사는 나옴이 삶이요 들어감이 죽음이라는 뜻입니다. 나왔다가 들어가기까지의 짧은 기간이 인생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30%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대로 장수하고, 30%는 단명하며, 30%는 장수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고 병에 걸리지 않는 노력, 즉 양생養生을 즐깁니다. 그렇지만 양생도 지나치면 영양 과잉으로 죽음을 재촉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노자의 말에 따르면 위의 90%를 제외한 나머지 10%가 생명이 태어나 죽음을 향해 간다는 뜻을 이해합니다.

장자는 태어나는 것을 거절할 수도, 죽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삶과 죽음을 비롯한 자연현상은 인간의 의지로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장자는 기본적으로 생명을 기의 변화로 간주했습니다. 기가 모이면 살고 기가 흩어지면 죽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장자는 생명을 임대의 관점, 본래 자기 것이 아니라 빌려서 쓰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인생을 일종의 과정으로 보고 사는 동안 무엇을 할지 반드시 고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장자는 인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지天地는 나에게 신체를 빌려주고, 삶으로 고통을 준다. 노년에는 조금 편안하게 해주다가 결국 죽음이라는 영원한 휴식을 준다.” 장자는 삶과 죽음을 언급할 때마다 생명이 짧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인생을 흰 말이 매우 빨리 달려가는 것에 비유하여 흰 말이 지나가는 것을 문틈으로 보듯이 눈 깜박할 사이, 즉 백구과극白駒過隙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극은 벽 모퉁이에 난 작은 구멍을 말합니다. 이 구멍으로 흰 말이 달리는 모습을 본다면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가는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전에 어느 노인분이 제게 세월이란 50대에는 50마일, 60대에는 60마일, 70대에는 70마일로 달린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노자는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죽음이 그 사람에게 위협이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죽음을 이기다고 하는 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걸 말합니다. 내세를 믿는 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내세를 믿지 않습니다. 저는 죽음을 깨어날 수 없는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은 깨어 있는 것이 됩니다. 내일이라도 죽을 수 있다고, 혹은 깨어날 수 없는 깊은 잠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놀라운 건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잠들기 전에 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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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가지고 있는 고민 여섯 가지

 

 

앞서 돈은 올바른 방법으로 벌어야 한다는 제목으로 장자莊子가 지나치게 많은 돈이 오히려 생활하는 데 부담이 된다고 말했음을 전했습니다. 장자는 부자가 가지고 있는 고민 여섯 가지를 난, , , , , 여섯 자로 표현했습니다.

 

1.

부자가 가진 혼란을 말합니다. 부자는 늘 귀로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입으로 값비싸고 맛난 음식을 먹으며,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표출하고 살지만 정작 자신의 본분을 잊고 삽니다. 부자는 돈을 흥청망청 쓰고 밤에는 육체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더욱더 돈을 씁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데, 자신들도 부끄러운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장자는 부자들이 자신들의 본분을 망각한 채 놀기 때문에 난, 즉 혼란스럽다고 말합니다. 지나치게 많은 돈이 사람을 혼란한 상태에 빠뜨리는 것을 우리는 주위에서 봅니다. 친구들 앞에서 지갑은 열지 않고 입만 열어 돈 자랑하는 사람이 바로 혼란한 사람입니다.

 

2.

부자는 사람들을 의식해서 체면을 중시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체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지켜야 할 규칙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를 장자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산비탈을 오르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가 부자에 대해 한 말이 장자의 뜻과 일치합니다. “부자는 당나귀 한 마리가 무거운 금화를 잔뜩 싣고 평생 걷는 것과 같다.” 누가 시켜서 하는 고생이 아니라 체면 때문에 스스로 사서 하는 고생입니다.

 

3.

돈이 많으면 영양 과잉으로 병이 생길 수 있습니다. 부자들은 권력에 관심이 많으며 그것을 끝없이 탐합니다.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은 실제로 병이 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권력의 비호를 받으려고 합니다. 정경유착인 이래서 생기는 것입니다. 재벌들이 어쩌다 TV에 나올 때면 얼굴이 거의 썩어 있는 상태입니다.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이 병자처럼 보입니다. 많은 돈을 가졌는데 그런 몰골이라니 보통사람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4.

부자들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은행에 돈을 산만큼 쌓아 두고서도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새로운 투자와 개발에 혈안입니다. 자식에게 많은 돈을 물려주기 위해 탈세를 일삼습니다. 자식이 하는 사업에 일감을 몰아주려고 안달입니다. 이런 부자들을 우리는 자주 봅니다. 욕심의 끝을 향하는 그들에게는 고민도 많을 것입니다. 부자들은 욕심 때문에 형제간에도 소송을 걸고 싸웁니다. 형이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고 감히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고 화를 내는 부자 동생도 있습니다. 천륜도 깨드리는 것이 부자들의 욕심입니다.

 

5.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걱정도 많아집니다. 벼슬이 없으면 근심도 없다는 말이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자신이 부당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부당한 방법으로 자신의 돈을 빼앗아 갈까봐 부자들은 고민합니다. 탈세로 돈을 벌었기 때문에 세금을 걱정합니다. 돈이 많으면 더 많은 돈을 바라게 되고 고민이 깊어집니다. 자기가 죽은 후에는 자식이 더 많은 돈을 벌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목적이 오로지 돈을 더 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위해 돈을 쓰는 건 가슴 아픈 일일 뿐입니다.

 

6.

돈이 많으면 늘 불안해집니다. 도둑이 집에 침입하지 않을까, 주변에 모여드는 사람들이 자신의 돈을 강탈해가지 않을까, 길에서 강도를 만나지 않을까, 사회를 위해 기부를 하라는 사람이 오지 않을까 항상 경계하게 됩니다. 자신을 납치하여 거액을 달라고 할까봐 혼자서 나다니는 것조차 두려워집니다. 이것이 공포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부자들은 이런 공포를 떠안고 살고 있습니다.

 

장자는 빈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가난할수록 인생의 다른 부분의 가치를 알 기회가 그만큼 더 생긴다. 그러나 돈이 너무 많아지면 물질의 유혹에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돈이 많은 건 인생에 막대한 손해다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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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량심四無量心

 

사무량심Brahmavihāras(중생을 한없이 어여삐 여기는 네 가지 마음)은 균형에 관한 또 다른 불교의 가르침으로 진정한 사랑에 담겨 있는 정서적 균형을 의미한다. 브라마비하라Brahmavihāras란 용어는 두 개의 산스크리트어, 즉 ‘신’ 또는 ‘궁극’을 의미하는 브라마Brahma, 그리고 ‘주거지’를 의미하는 비하라vihara에서 유래했다. 이 가르침을 수행하는 사람은 신과 함께 머물고, 궁극의 경지인 붓다의 정토, 즉 극락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그렇게 대단한 성취를 생산할 수 있을까? 사무량심은 자무량심love(慈無量心, maitri), 비무량심compassion(悲無量心, karuna), 희무량심joy(喜無量心, mudita), 사무량심equanimity(捨無量心, upeksha)의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무진을 근본으로 하여 모든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려는 마음인 자무량심은 타인이 행복과 행복의 원인을 갖도록 하려는 의도를 의미한다. 이는 단지 공허한 바람이 아니라 타인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필요한 기술을 익힘을 의미한다. 산스크리트어 마이트리maitri는 ‘친구’와 관련된 용어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신의 행복을 바라듯이 친구의 행복을 바라는 친구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다. 2세기의 불교 존자尊者로 인도의 대승불교를 연구하여 그 기초를 확립하여 대승불교를 크게 선양한 용수龍樹(Nāgārjuna)에 따르면 자무량심을 수행하면 화가 가라앉는다고 한다. 보살이 자비심으로 중생을 고해에서 건져내어 해탈의 낙을 얻게 하려는 마음인 비무량심이란 타인이 고통과 고통의 원인에서 해방되도록 우리가 바라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기술을 익힘을 의미한다. 용수는 비무량심을 수행하면 모든 슬픔과 근심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고통이 사라지고 기쁨을 느끼게 하려는 마음인 희무량심이란 나와 타인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을 구분 없이 즐겁게 생각하는 능력을 말한다. 용수는 희무량심을 수행하면 슬픔이 사라진다고 장담한다. 중생을 평등하게 보아, 특정인을 사랑하거나 원망(친원親怨)하는 차별을 두지 않으려는 마음인 사무량심은 침착한 마음과 버리는 능력을 의미한다. 용수는 사무량심을 수행하면 증오와 혐오 그리고 애착을 끊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네 가지 요소들은 상호 관련을 갖고 존재하며 진정한 사랑이란 이 네 가지를 포함한 것을 말한다. 한 가지라도 포함되지 않으면 완전한 의미에서 진정한 사랑이 아닌 것이다.
진정한 사랑에는 반드시 타인과 내가 행복하고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우리의 마음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에는 기쁨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을 마시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마시의 선행에는 기쁨이 없고 분노와 고통이 가득하므로 그녀의 선행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다.
사무량심은 비록 타인의 결정이 어리석더라도 타인을 대신해서 우리가 결정을 하거나 타인이 내린 결정을 우리가 바꿀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 타인이 진정한 자신이 되어 스스로 결정하게끔 하는 능력을 지니는 것이다. 자무량심, 비무량심과 더불어서 사무량심은 인본주의 심리학자로 미국 심리학회 회장, 미국 응용심리학회 회장을 역임한 칼 로저스가 비소유적 온화함(Rogers 1957)이라 일컫던 것과 유사하다. 우리의 온정이 소유적이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누군가 궁핍한 친구에게 돈을 주었다고 해보자. 이는 외견상 진정한 사랑의 행동이다. 누군가가 가난으로 고통받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무량심의 요소가 담겨 있다. 그렇지만 나중에 돈을 받은 친구가 자신의 처지에 걸맞지 않은 비싼 음식점에서 식사하는 장면을 돈을 준 친구가 보게 된다면 어떨까? 이때 자애로웠던 마음이 분노로 바뀐다. 버리는 마음인 사무량심이 부족하면 선물에 진정한 사랑이 없음이 드러난다.
붓다는 진정한 사랑을 수행하면 잘 자고, 깨어 있으면서 마음이 가벼우며, 불쾌한 꿈을 꾸지 않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며, 동물을 사랑하게 되고, 신의 가호를 받으며, 위험을 면하고, 명상 시에 쉽게 집중하고, 표정이 밝고 맑아지며, 임종 시에 정신이 맑아지고, 극락왕생하는 것처럼 여러 가지 좋은 점들이 있다고 가르쳤다. 분명 붓다는 사랑의 수행을 높이 평가했다.
자무량심을 수행하는 일은 아주 간단하다. 그중 하나는 사랑의 감정을 불러오고 자신을 포함하여 만물을 향해 모든 방향으로 그 빛을 발산하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비무량심, 희무량심, 사무량심도 똑같은 방법으로 수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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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올바른 방법으로 벌어야 한다

 

 

가난하더라도 도를 즐기는 편안한 생활을 안빈낙도安貧라고 합니다. 이는 공자孔子제자들에게 강조했던 정신 중 하나로 공자의 제자 중 특히 안회顔回가 안빈낙도를 실천했습니다. 안회는 너무도 청빈하게 살았기 때문에 쌀뒤주가 항상 비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스승 공자가 가르쳐 준 도를 즐겼다고 합니다. 평생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했지만, 외부의 환경을 탓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적이 없었고 오히려 주어진 환경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성인聖人의 도를 실천했습니다. 학덕이 높고 재질이 뛰어나 공자의 가장 촉망받는 제자였던 안회는 공자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가에서는 그를 공자 다음가는 성인으로 받들어 안자顔子라고 높여 부릅니다.
장자莊子에는 위나라 공자 모가 담자談子에게 한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비록 몸은 속세에 살고 있지만 마음은 왕실의 부귀영화만을 생각하고 살고 있네. 간단히 말해서 몸은 비록 민간에 나와 있지만 마음만은 늘 궁궐에 있다는 뜻일세. 지금은 은거 중이지만 내 공자의 신분이 아닌가. 전에 왕실에서 누렸던 부귀영화가 그리우니 이를 어쩌면 좋겠는가?”

그러자 담자가 말했습니다.

목숨을 소중히 여기시면 재물이나 녹봉 따위는 잊게 되실 겁니다.”

그렇지만 공자 모는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담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저히 포기하지 못하겠다면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했는데도 포기가 안 되는데 괜히 무리하면 더 크게 다치십니다. 이중으로 상처를 입으시면 목숨마저 부지하기 힘듭니다.”

담자는 안빈낙도의 생활을 즐길 자신이 없다면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많은 돈을 버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돈을 올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벌었다면 지탄의 대상이 됩니다. 오늘날 부자들이 존경을 받지 못하는 건 그들이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고 방법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장자는 그렇게 생각 하지 않았습니다. 장자에 이와 관련된 상당히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장자의 이웃 중에 조상曺商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송나라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은 조상이 송나라를 대표해서 진나라에 특사로 파견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가 집을 나설 때는 분명히 마차 몇 대가 갔을 뿐이었는데 진왕의 마음에 들었는지 돌아올 때는 무려 마차 백 대가 함께 왔습니다. 우쭐해진 조상이 장자에게 말했습니다.

자네처럼 피골이 상접해서는 누렇게 뜬 얼굴로 찢어지게 가난한 마을에서 짚신이나 삼으며 살라고 한다면 난 절대로 그렇게 못하네. 날 보게. 송나라 특사로 한 번 다녀왔을 뿐인데 마차 백 대를 벌었으니 이게 바로 내 능력 아니겠는가.”

조상은 장자 앞에서 이렇게 오만함을 드러냈습니다. 장자가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진왕이 병이 들어 의사를 모셔왔는데 종기를 치료해줘서 마차 한 대를 주었다고 하더군. 그리고 치질을 치료해준 의사에게는 마차 다섯 대를 주었다고 하네. 한 마디로 치료 부위가 천할수록 상으로 받는 마차의 대수가 늘어난다는 뜻이지. 자네가 마차 백 대를 하사받았으니 치료해준 병이 치질 정도 되나? 정말 추잡하군. 어서 여기를 떠나게.”

조상은 장자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찾아왔지만 본전도 찾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유래된 성어가 연옹지치吮癰舐痔입니. 연옹지치는 종기의 고름을 빨고, 치질 앓는 밑을 핥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부귀를 얻기 위해 부끄러운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부자들 가운데는 연옹지치식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장자가 한 말이 자신들에게 한 것으로 이해하고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반면에 조상과는 매우 대조적인 도양설屠羊說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직업이나 특징을 집어넣어 이름을 지었는데, 도양설은 이름에 도양屠羊이라는 한자가 들어간 것으로 보아 양을 잡는 일을 업으로 한 사람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초나라 사람이었는데 초나라 소왕 때 오나라가 초나라를 침략했습니다. 초나라는 패했고 소왕은 도망을 갔습니다.

도망갈 때 몇몇 대신과 백성이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몇 달이 지나고 소왕은 함께 도망갔던 사람들과 초나라로 돌아왔습니다. 도양설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소왕은 귀국한 후 자신을 따랐던 사람들에게 상을 내렸습니다. 한 명씩 일일이 상을 주고 마지막으로 도양설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소왕이 말했습니다.

나를 따라 피난을 갔다 다시 돌아왔기에 상을 내리노라.”

그러자 도양설이 거절하며 말했습니다.

왕은 국외로 도망가 왕위를 잃으셨고 저는 제 가게를 잃었습니다. 왕이 돌아와 왕위를 되찾으셨고 저는 제 가게를 되찾았습니다. 제게 아무런 피해가 없는데 무슨 상을 내리신다는 말씀입니까? 받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가 거절하자 기분이 상한 소왕은 억지로라도 그에게 상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도양설은 다시 말했습니다.

저는 그저 평범한 백성입니다. 왕이 나라를 잃으신 건 저의 책임이 아니므로 제게 벌을 내리신다 해도 어떠한 벌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왕이 다시 왕위를 찾으신 것도 저의 공로가 아닙니다. 따라서 저는 그 어떤 상도 받을 수 없습니다.”

도양설이 두 번이나 거절하자 소왕은 다시 사람을 보내 상을 받기를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거절한다면 직접 와서 자신을 접견하라고 했습니다. 도양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초나라 법에 의하면 큰 공을 세운 자만이 왕을 접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한낱 양을 잡는 백정으로 용감하지도 현명하지도 못합니다. 오나라 군대가 도읍을 공격해 왔을 때도 두려운 마음에 왕을 따라나섰던 것입니다. 그런 제가 무슨 자격으로 왕을 알현하겠습니까? 왕이 아무런 공도 없는 놈을 불러다 만난다는 소리를 세상 사람들이 듣지 않을까 그것이 걱정일 따름입니다.”

비록 도양설이 양을 잡는 백정이지만 조리 있게 말하는 걸 보고 소왕은 삼공三公에 임명하고자 했습니다. 삼공은 당시 초나라 최고의 관직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양설은 거절했습니다.

삼공의 작위가 매우 높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양이나 잡는 제 처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그런 위치입니다. 그리고 녹봉도 제가 버는 것의 수만 배는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공도 없이 그렇게 많은 돈을 받으며 왕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 도양설이 비범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 분수를 알고 처지에 만족할 줄 알았습니다. 옛말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재물 대문에 죽고 새는 모이 때문에 죽는다.” 장자는 지나치게 많은 돈이 오히려 생활하는 데 부담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장자는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세상 모든 일은 중간일 때가 가장 이상적이다. 넘치는 건 오히려 해가 된다. 세상 만물이 다 그러하지만 돈이 특히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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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교수님이 알려주는 공부법

 

 

 

 

철학책 적극적으로 읽기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지난 수 세기 동안의 가장 유명한 지성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 아니 그 저자들이 우리에게 자신의 최고의 생각을 드러내는 치밀하고 신중한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다.
✚ 르네 데카르트, 『방법 서설Discourse on Method』

 

우리 삶의 심오한 문제와 위대한 철학자들의 사상을 다룬 책을 읽는 건 흥미진진하고 짜릿하면서도 부담스러울 수 있다. 공부를 하다 보면 전혀 이해되지 않는 논문이나 책을 읽어야 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심지어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읽어도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를 때도 있다. 이때 절대로 포기하면 안 된다. 철학 텍스트는 원래 이해하기 어렵다. 20년 이상 철학을 공부한 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 철학논문이나 철학서를 쉽게 이해하지 못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면, 그건 틀림없이 거짓말이거나 자기기만일 것이다. 철학은 공부하기가 쉽지 않은 학문이다. 철학은 대부분 추상적인 주제를 다룬다. 그러므로 철학이나 논술 텍스트에 담긴 주장은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울 수 있다. 철학을 읽는다는 것은 사실을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애매하게 보이는 개념과 씨름하는 것이다. 지금 읽고 있는 논문이나 책이 꽤 오래전의 저작이라면, 거기에 담긴 개념도 고대의 언어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철학 텍스트에는 전문용어가 등장하고, 익숙한 단어도 낯선 방식으로 구사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철학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분명하게 글을 쓰지도 않는다. 심지어 어떤 철학자들은 일부러 애매하게 글을 쓰는 것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다행히 여러분이 읽어야 할 텍스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전략이 있다.

 

 

소극적인 태도는 금물이다

독서는 때때로 생각을 피하는 기발한 수단이다.
✚ 아서 헬프스 경, 『평의회의 친구들Friends in Council』

 

독서를 소극적인 행위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독서는 적극적인 활동이다. 글이나 책을 읽을 때는 저자의 견해를 단순히 흡수하지 말고 텍스트 내용에 대해 생각하고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텍스트 내용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 그것을 철저하게 이해할 수 있고 더 오래 기억할 수 있다. 이렇게 해야 의미 있고 생생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런 지식은 단지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암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삶을 둘러싼 중요한 쟁점에 관해 생각하는 자극제가 될 것이다. 텍스트와 진정한 상호작용을 하지 않은 채 단순히 글자를 읽는 데 급급하면,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소용없다. 그렇게 의무적으로 읽은 무미건조하고 애매한 내용은 졸음만 유발할 뿐이다.

 

독서가 정신에 미치는 효과는 운동이 육체에 미치는 효과와 같다.
✚ 리처드 스틸

 

물론 텍스트 내용 가운데 일부를 기억할 필요는 있으며, 철학공부에서는 암기력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당면한 쟁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거기에 몰입하지 못하면, 텍스트 내용을 기억하기 어렵다. 그리고 텍스트에 담긴 저자의 견해를 자기 것인 양 흉내 낼 수는 있어도 그 진의를 파악하지는 못한다. 일단 적극적인 독서 습관을 들이면, 차츰 저자의 집필의도에 맞게 텍스트의 내용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내 글이 다른 사람들에게 사고의 부담을 덜어주는 방편이 되지는 않았으면 한다. 가능하다면 그 사람 자신의 생각을 자극하는 수단이 되었으면 좋겠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의 서문

 

적극적으로 읽기의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첫 번째 방법은 읽으면서 메모를 하는 것이다. 이때 메모는 나중에 참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요점을 놓치지 않기 위한 것이다. 우선 특히 재미있거나 감동적이거나 중요한 구절을 고르고 나서 거기에 대한 궁금증이나 반론을 논문이나 책의 여백에 간단히 적어두면 된다. 그리고 읽은 내용을 나중에 친구들과 토론해도 된다. 텍스트를 읽다가 잠시 멈추고 방금 읽은 내용을 생각하라. 이처럼 적극적으로 철학 읽기는 소설이나 신문을 읽는 것보다 훨씬 천천히 진행된다. 이렇게 해서 좋은 습관을 길러야 한다. 철학 텍스트를 대충 훑어보거나 골자를 파악해도 무방한 대상으로 여긴다면, 그 주제를 진정으로 파악할 수 없다.
소극적인 읽기를 피하는 두 번째 방법은 “저자의 의도는 무엇일까?”라는 질문뿐 아니라 “저자의 주장은 옳은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다. 물론 답변하기 힘든 질문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철학자로서 반드시 던져야 하는 기본적인 질문이다. 다른 철학자들의 글을 읽는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그들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가리는 것이다. 어떤 철학자의 주장이 옳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르다면 왜 그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문제에 대해 가능한 한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한다. 진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최고의 희망은 타당한 논거를 통해 결론을 도출하는 합리적인 논증이다. 어떤 경우 우리는 잘못된 종류의 질문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철학을 진전시킬 때 가장 바람직한 것은 언제나 추론을 통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장과 반론을 검토하여, 대안적인 설명이나 더욱 매끈한 이론을 찾는다. 어떤 사상가의 결론에 동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사상가가 적절한 형태의 추론을 통해 결론에 도달했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러므로 언제나 저자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 그리고 그 사람의 결론이 타당한 논거와 증거를 갖고 있는지를 중요시해야 한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중요한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저자의 기본적인 가정은 옳은가? 어떤 사람이 창세기의 모든 내용이 참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주장을 펼친다면, 그것은 논리적으로는 완벽한 주장일지 모른다. 그러나 만약 창세기의 모든 내용이 진실이라는 기본 전제가 참이 아니라면, 예를 들어 이 세상은 6일 만에 창조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의 결론이 옳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물론 이 주장만을 근거로 해서는 결론을 거짓으로 단정할 수도 없다). 저자의 기본 전제를 검토하고,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확인하라. 그런 다음 저자의 추론과정을 검토하라. 저자의 결론이 그가 제시한 논거와 부합하는가? 혹시 저자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반론과 반례가 있지는 않은가? 저자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가? 단 하나의 사례를 근거로 주장을 전개하지는 않는가? 철학 텍스트를 읽을 때는 이런 식의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한다. 적극적인 읽기와 비판적인 읽기를 배우는 것은 철학 교육에서 중요하다.
그렇다고 잘못된 가정과 추론이 엿보이는 논문이나 책을 무조건 멀리하라는 말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배운다는 건 현 상태에 만족하는 태도나 독단주의에 맞서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자신의 사고력을 다듬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이 갖고 있는 신념의 이유를 검토하는 자극제가 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신념을 바꾸는 촉매제가 될 수도 있다. 많은 위대한 철학자들은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상가들에게 반박함으로써 그 주제를 깊이 천착하게 되었다. 일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 가운데 일부는 플라톤의 견해에 대한 반박에서 비롯되었고, 임마누엘 칸트의 몇몇 사상도 그가 데이비드 흄의 저작을 읽은 데서 나왔으며,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사상도 대부분 그가 마음에 대한 잘못된 설명에 반박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우리는 반론을 접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견해를 굳게 믿기 마련이고, 그것은 하나의 편견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있고 기꺼이 그렇게 할 자세를 갖춘 사람은 타인의 비판을 계기로 자신의 신념을 훨씬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며, 심지어 기존의 견해를 바꿀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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