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에 대한 융의  “아들” 역할은 변하고 있었다

 

 

 

 

 

프로이트에 대한 융의  “아들” 역할은 이미 변하고 있었다. 1909년은 프로이트와 융의 관계가 정점에 이르는 동시에 전환점을 맞이한 해였다. 봄에 융과 엠마가 프로이트의 집에 닷새 동안 머문 것이 그들이 집에서 가진 세 번째 만남이었다. 융이 자서전에서 당시의 방문을 기록한 부분을 보면 닷새 중 마지막 날 밤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그들의 견해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프로이트의 예지precognition와 초심리학parapsychology 전반에 대한 의견을 흥미 있게 들었다. 1909년 빈으로 그를 찾아갔을 때 그 두 가지에 대한 그의 의견을 물었다. 유물론적 편견이 있는 그는 그 질문들이 모두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며 답을 하지 않았다. 나의 실증주의는 너무 얄팍해서 그의 날카로운 반응에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그가 초심리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주술적” 현상이 실재함을 인정하기 몇 년 전 일이다. 프로이트가 그런 식으로 반응할 때 나의 몸에서 흥미로운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나의 횡격막이 마치 철로 되어 있기라도 하듯 붉게 달아올라 새빨간 하늘이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순간 우리 옆에 있던 책장에서 아주 큰 폭발음이 들렸다. 깜짝 놀란 우리는 책장이 우리 쪽으로 쓰러질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나는 프로이트에게 말했다“. 보십시오. 이것이 소위 촉매에 의한 구체화 현상의 예입니다.” “그런 허튼소리 그만하게”라고 그가 소리쳤다. “허튼소리가 아닙니다”라고 내가 대답했다“. 교수님이 착각하고 계신 겁니다.” “제가 곧 또 한 번 굉음이 날 거라고 말씀드리면 제 주장이 증명되겠지요.” 그 말을 내뱉자마자 아까와 같은 폭발음이 책장에서 발생했다. 오늘날까지도 그렇게 확신한 까닭을 나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소리가 다시 나리라는 점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알고 있었다 … 프로이트는 겁에 질려 나를 바라보았다 … 그 후 그는 나를 불신하게 되었고 나도 그를 거역하는 어떤 일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논쟁은 퀴스나흐트에서도 계속되었다. 융은 프로이트의 집에서 떠날 때가 되자 “나는 교수님의 가부장적인 권위에서 비롯된 압박감에서 벗어났습니다”라고 썼고 그 답으로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친구에게,
자네를 나의 장남이자 … 나의 후계자로 삼은 바로 그날 밤 자네가 아버지로서의 나의 위엄을 떨어뜨린 것이 참 이상하네. 내가 자네를 그렇게 대한 것과는 반대로 자네는 그렇게 나의 권위를 빼앗은 것에 즐거워하는 듯하네. 내가 폴터가이스트poltergeist[악취와 소음이 나며, 물건들이 날아다니는 등의 괴현상]에 대해 느낀 바를 이야기하려면 지금도 아버지 역할에 의지해야 해서 유감이군. 하지만 내 태도는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네. 자네의 이야기와 실험이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네 … 처음엔 … 자네가 여기 있을 때 그렇게 자주 들리던 소리가 자네가 떠나고 나서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면 그 현상의 증거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려고 했네. 하지만 그 후로도 그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렸네. 그 현상은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일어났고 더욱이 자네나 자네의 그런 특이한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라네 … 자네의 존재라는 마법이 사라지자 나의 흔들림, 적어도 믿으려는 나의 의지가 사라졌지. 딱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어떤 내면적인 이유로 나는 그런 현상이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네 … 그래서 나는 아버지처럼 뿔테 돋보기안경을 다시 끼고 사랑스러운 나의 아들에게 냉정해지라는 경고를 하고 싶네. 큰 희생을 감수하고 이해하는 것보다는 이해하지 않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지 … 나는 이 흥미로운 착각에서 손을 떼겠지만 자네의 유령 콤플렉스 조사에 대한 소식은 앞으로도 관심 있게 듣도록 하겠네.
프로이트로부터

 

그날 밤 두 사람이 충돌한 주제는 초자연적 현상만이 아니었다.

 

 


프로이트가 나에게 한 말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친애하는 융, 성 이론을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해주게. 그것은 무엇보다도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네. 우리는 그것으로 흔들리지 않는 방파벽이 될 신조를 만들어야 하네.” … 나는 좀 놀라 그에게 물었다“. 방파벽으로 무엇을 막는다는 겁니까?” 그는“ 검은 진흙의 밀물과 썰물이지”라고 답하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바로 신비주의occultism 말일세.” … 나는 과학적 판단과는 전혀 관계없이 개인적인 권력욕만을 의미하는“ 신조”와“ 방파벽”이라는 말에 놀랐다. 그 말은 우리 우정의 중심에 일격을 가했다. 나는 내가 그런 태도를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프로이트가“ 신비주의”라고 말한 것은 사실상 떠오르는 현대 학문인 초심리학을 포함하여 철학과 종교가 정신에 관해 규명한 전부였기 때문이다.

 

 


6개월 후 융과 프로이트는 미국으로 여행을 떠났고 융이 보는 앞에서 프로이트가 졸도하는 일이 두 번 발생했다. 프로이트가 처음 졸도했을 때 융은 아버지의 “유언”으로 간주될 수 있는 말을 듣고 불안감을 느꼈다. 이 여행은 둘의 관계에 치명타가 되었다.

 

 


우리는 매일 함께 지내며 서로의 꿈을 분석했다. 당시 나는 중요한 꿈을 몇 번 꾸었는데, 프로이트는 그 꿈을 전혀 해석하지 못했다. 그가 아무리 최고의 분석가라도 꿈의 수수께끼는 풀지 못할 수도 있으므로 그의 능력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인간은 실수를 하기도 하므로 그가 꿈을 분석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우리가 서로의 꿈을 분석하던 일을 멈추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꿈의 분석은 나에게 많은 의미가 있었고 나는 우리의 관계를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프로이트가 연장자인 만큼 나보다 더 성숙하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런 점에서 나는 아들의 입장에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 관계 전체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생겼다. 프로이트가 꿈을 꾸었다. 그의 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여기서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 꿈을 분석하면서 사생활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준다면 더 많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 말을 들은 프로이트는 의아한, 아니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위신을 망칠 수는 없어!” 사실 그 순간 그는 위신을 잃어버렸다. 그 말은 내 기억 속에 깊이 남았다. 그 일은 우리 관계의 끝을 암시했다. 프로이트는 진리보다 자신의 위신을 우선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융에게는 두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내적으로는 수수께끼 같은 상징적인 꿈들이 그를 정신 깊은 곳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개인적인 무의식의 차원을 넘어 그가 나중에 “집단 무의식의 차원”으로 표현하는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는 신화학, 고고학, 영지주의 기독교, 원시문화, 점성학 등 새로운 학문에 빠져들었으며 프로이트와 사상적 차이가 드러나는 운명적인 저서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명성을 얻은 융은 프로이트의 승인을 받아 국제정신분석학회의 초대 회장겸 학회지의 편집장이 되었다. 그는 클라크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은 후 뉴욕에서 강의를 몇 차례 했으며 『리비도의 변용과 상징』을 출간했다. 프로이트가 융의 집에 나흘간 방문한 후 둘의 관계가 흔들리는 전조를 발견한 것은 엠마 융이었다. 그녀는 융 모르게 프로이트에게 편지를 보냈다.

 

프로이트 교수님,
제가 교수님께 이런 편지를 쓸 용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 교수님이 저희 집을 방문한 이후로 교수님과 제 남편의 관계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하기에 제가 힘이 닿는 데까
지 노력해보고 싶습니다.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제 생각에는 교수님이『 리비도의 변용과 상징』에 그다지 동의하고 있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물론 교수님이 직접적으로 불만을 표시하지는 않으셨지만 카를과 함께 제대로 토론을 한다면 두 분에게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친애하는 교수님, 만약 방법이 있다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체념한 교수님의 모습을 보는 것을 견딜 수가 없으며 교수님의 체념은 교수님의 친자식뿐만 아니라 … 영혼의 아들과도 관계가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체념하실 리가 없겠지요.

 

프로이트 교수님,
교수님이 카를에 대해 보여주신 신뢰에 제가 얼마나 기쁘고 영광스러웠는지 짐작하시겠지요. 하지만 교수님이 때로는 카를에게 지나치게 마음을 쏟는 것처럼 보입니다. 교수님이 바라는 이상으로 그가 교수님을 추종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목표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안 보이십니까? 그렇게 마음을 쏟는 이유는 그만큼 많은 것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그동안 거둔 명성과 성공을 누리는 대신 왜 벌써 포기를 생각하십니까? 교수님은 너무나 오랫동안 애쓰셨으니 그만큼 승리의 행복을 만끽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성장하고 나는 쇠약해지지”라는 아버지의 감정으로 카를을 보지 마시고 그를 교수님처럼 자신의 원칙을 실천해야 하는 한 사람으로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제 말에 노여워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따뜻한 사랑과 존경을 담아, 엠마 융 드림

 

이 주제와 관련된 일련의 편지 중 마지막 편지를 보면 융 부부의 관계에도 나름의 어려움이 있었음이 드러난다.

 

프로이트 교수님께,
편지 보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지난번 편지를 썼을 때처럼 항상 절망적인 상태는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 저는 제가 얼마나 운이 좋은지 잘 알고 있으며 보통 제 운명의 짝에 대해 말을 아끼지만 카를을 어떻게 견뎌내야 할지 갈등을 느끼며 괴로울 때도 종종 있습니다. 저는 친구도 없고 저희가 어울리는 모든 사람은 카를하고만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저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제가 따분하게 생각하거나 흥미가 없는 몇몇 사람뿐이지요.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그와 사랑에 빠지지만 저는 한 사람의 아내로, 또는 친구로 남성들과 거리를 둡니다. 저는 사람들을 사귀고 싶은 강한 바람이 있고 카를도 저에게 그와 아이들에게 더 이상 집중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그러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자체성애autoerotism(자신의 몸으로부터 성적 만족을 얻는 행동)가 강한 상태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매우 힘듭니다 … 저는 절대 카를과 경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점 때문에 저는 보통 사람들과 있을 때 더욱 바보처럼 이야기하게 됩니다 … 교수님이 저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제가 왜 그렇게 괴로워하는지 이제 아시겠지요. 저는 카를이 무언가를 눈치챌까 봐 겁나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는 교수님과 제가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교수님이 저에게 보내신 편지를 한 통 보고 그가 놀라긴 했지만 제가 그에게 알려준 내용은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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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과 프로이트 두 사람 중 답장을 재촉하는 쪽은 프로이트였다

 

 

 

 

 

 

 

 

융과 프로이트 두 사람 중 답장을 재촉하는 쪽은 프로이트였는데, 그는 기다리던 편지가 오지 않으면 초조함을 나타내는 전보를 종종 보냈다. 1909년에 융은 답장이 늦은 이유를 “엄청난 스트레스”로 돌리며 그의 환자였던 사비나 슈필라인과 관련한 문
제 등 여러 고민을 털어놓았다.

 

 


저를 엉망으로 만드는 콤플렉스는 인내의 한계를 넘게 하는 최악의 시련입니다. 몇 년 전 무한의 노력을 기울여 매우 힘겨운 신경증을 치료한 여성 환자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굴욕적인 방법으로 저의 신뢰와 선의를 해쳤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갖는 기쁨을 제가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비열한 스캔들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그녀를 늘 신사적으로 대했지만 지나치게 민감할지도 모르는 저의 양심의 기준에서 보면 제 자신이 깨끗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제 의도는 항상 순수했기 때문에 마음이 매우 아픕니다. 하지만 교수님도 아시다시피 악마는 가장 좋은 것으로도 추악한 것을 만들어냅니다. 그동안 저는 자기분석을 해왔지만 지금까지 일부다처제적인 요소들에 대해 완전히 부적절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결혼의 지혜에 대해 말도 못할 정도로 많이 배웠습니다. 저는 이제 어디서 어떻게 하면 그 악마를 짓밟을 수 있을지 알게 되었습니다. 고통스러우면서도 매우 유익한 그런 깨달음은 저의 내면을 지독하게 휘저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앞으로 제 삶에서 가장 큰 강점이 될 도덕적 가치를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아내의 관계는 확신과 깊이에서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처음 몇 년 동안 두 사람은 그 문제 여성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자신의 채울 수 없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 아이를 갖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인”, “히스테리가 있는 환자”라고 부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것은 환자가 의사에게 감정을 투사하는 전형적인 전이transference현상으로 이 경우에는 의사도 잘 표출하지 않던 그의 정신적 측면을 내비쳤다는 점에서 환자에 대한 전이가 의사에게도 잠복된 형태로 일어났다. 전이는 다루기 어려운 정신의학적 상호작용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치료가 끝날 때까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으며 융과 슈필라인의 유대감은 아슬아슬한 채로 몇 년간 지속되었다.

 

의도하지 않았던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한다는 것을 깨닫고 저는 마침내 그녀에게 결별을 고했습니다. 물론 안타깝게도 그녀는 철저하게 나를 유혹할 계획을 짜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복수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 소문을 듣기도 하고 슈필라인에게 직접 편지도 받은 프로이트는 인생의 선배로서 융에게 조언을 했다.

 

친구에게,
고통스럽겠지만 그런 경험은 필요하기도 하고 피할 수도 없는 일이네. 그런 경험 없이는 인생도, 우리가 무엇을 대하고 있는 것인지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지. 나는 이런 일을 심각하게 겪어본 적은 없지만 몇 번이나 그럴 위기가 있었고 겨우 그 위기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네. 당시 암울한 상황이 내 연구를 짓누르고 있었고 나는 자네보다 열 살 더 많을 때 정신분석에 입문했기에 그와 비슷한 경험을 무사히 피할 수 있었다네. 하지만 상처가 지속되지는 않을 걸세. 그런 경험은 우리에게 필요한 두꺼운 얼굴가죽이 생기게 해주고 항상 문제가 되는“ 역전이countertransference”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네. 그런 여성들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정신적 수단을 이용하여 우리를 유혹하려고 하는 건 자연의 매우 경이로운 일들 가운데 하나라네. 그들이 목적을 달성하든, 그 반대의 일이 벌어지든 그와 관련된 생각들은 놀랍게 변화한다네.
프로이트로부터

 

슈필라인은 그 이후에도 프로이트에게 편지를 보냈고 프로이트는 융에게 부성애를 담아 조언을 해주었다. “소모적인 반응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상황이 최악에 이르고 나서 며칠 후 융은 프로이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슈필라인과 관련하여 말씀드릴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저는 사물을 너무 어두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 그저께 그녀가 제 집에 와서 매우 정중하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 그녀는 가장 훌륭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전이를 극복했고 지금까지 재발하지 않았습니다 … 저는 무기력한 후회에 빠진 것은 아니지만 저의 예전 환자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데 크게 일조했기 때문에 제가 저지른 죄에 대해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 저는 이론적으로 말한다고 생각하며 그녀와 아이 문제를 논의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에로스 신이 틈을 노리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런 결과를 예측하지 못한 채 환자가 모든 소망과 희망을 간직하도록 한 것이지요. 상황이 더욱 심각해져서 이 관계가 계속 유지된다면 성관계로 발전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저는 도덕적으로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자신을 방어했습니다. 저는 환자의 성적 농간에 희생양이 되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그녀의 어머니에게 나는 당신 딸의 성적 욕구를 충족해줄 사람이 아니라 그녀의 의사일 뿐이며, 그녀는 나를 자유롭게 해주어야 한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환자가 바로 전까지도 제 친구였고 나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제 행동이 나빴다고 아버지와 같은 교수님께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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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다 왕국은 남부 아시아의 열강으로 대두할 수 있었다

 

 

 

 

 

 

브라만이 누리는 면세와 공공의무의 면제라는 특권은 기원전 500년경 갠지스 계곡에서부터 움튼 인도의 두 번째 도시 문명사회에서 널리 인정된 건 아니었다. 아리아인의 유입 초기에 브라만 계급은 아리아인의 전통에 비추어볼 때 상당히 생경한 타 종교 종사자들과 경쟁해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이나교도나 불교도, 그리고 사명외도를 믿는 사람들은 브라만에 대한 특권 부여에 상당한 반감을 표명했다. 아리아인의 방식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이런 토착적인 믿음의 사상을 일부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이때 힌두교로 편입된 환생과 윤회, 그에 따른 응보와 같은 개념은 이후 힌두교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힌두교는 현대 인도인이 가장 많이 믿는 종교이다.
인도 북부 통합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덕에 한 발 앞당겨졌다. 기원전 326년 알렉산드로스는 인더스 계곡으로 진격했다. 이 관문만 통과하면 페르시아 제국 정복은 따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였다. 패배를 모르는 군왕 알렉산드로스는 인더스 계곡 전체를 손에 넣었다. 하지만 그의 눈부신 승리에도 불구하고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마가다 지역의 난다 왕국으로의 진군을 거부했다. 열병과 악천후에 시달려 지칠 대로 지친 병사들에게는 황제의 명도 소용없었다. 얼마간의 수비대가 알렉산드로스의 점령지에 남겨지긴 했지만, 알렉산드로스의 때 이른 죽음으로 세계 제패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기원전 317년에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그리스 군대도 인도 아대륙에서 철수하고 만다. 알렉산드로스의 뒤를 이은 후임자들 간의 분쟁에 관한 소식을 들은 지휘관들은 서쪽으로 향했다. 이후 남아시아 대륙에 몇 차례 짧은 기간에 걸친 외세의 침략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미미한 군사적 움직임이 대부분이라 인도에는 이에 대한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마가다 출신의 피 끓는 젊은이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알렉산드로스의 뒤를 좇는 모험을 하기로 결심한다. 한 애송이 모험가의 공상 같기만 했던 계획은 현실이 되
어버린다. 찬드라굽타는 갠지스 강 남안의 파탈리푸트라Pataliputra에서 난다 왕조를 궤멸시킨 후, 마케도니아에서 온 제왕이 증발해버린 인도 북서부의 정치적 공백을 십분 이용했다. 그는 기원전 317년에 마우리아 왕조를 창건하고 파탈리푸트라를 수도로 정했다. 그리스와 인도의 자료에 따르면 찬드라굽타는 그 출생의 합법성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며, 난다 왕조의 마지막 자손이긴 하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매우 낮았다고 한다.

찬드라굽타는 인도 북서부에 주둔한 마케도니아의 잔존세력을 완전히 축출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점령했던 광대한 영토의 동쪽 부분을 물려받은 셀레우코스 1세와도 성공적인 국경 협상을 하여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넘겨받기도 했다. 그에 대한 답례로 찬드라굽타는 셀레우코스가 서아시아에서 사용할 전쟁용 코끼리 500마리를 선사했다. 셀레우코스는 파탈리푸트라에 메가스테네스를 외교사절로 파견하기도 했으며, 찬드라굽타의 궁에 머물 때는 마우리아 왕조에 대한 기록을 담은 사료를 편찬하기도 했다. 메가스테네스는 마우리아 군체계의 전문성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마우리아의 군대는 총 30명으로 이뤄진 장수의 휘하에 여러 개의 작은 조직들이 복속되어 있어, 보병대와 전차부대・코끼리부대・해군・보급부대 등의 하위부대를 관리하는 구조로 편성되어 있었다.
마가다 왕국이 남부 아시아의 열강으로 대두할 수 있었던 건 휘하 무관들만의 공은 아니었다. 찬드라굽타를 보필하던 관료들의 뛰어난 행정능력도 못지않은 보탬이 되었던 것이다. 찬드라굽타는 엄청나게 뛰어난 장수들로부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모든 것은 노련한 재상 브라만 카우틸랴의 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카우틸랴의 저작물로 전해지는 『아르타샤스트Arthashatra(실리론實利論)』를 통해 그가 마우리아 왕조의 체제에 대해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마우리아가 합당한 녹봉을 받는 문무대신들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으며, 이런 체제는 효율적인 조세제도를 통해서만 확립될 수 있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농민으로부터 걷어들이는 세수가 국가재정 안정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지만, 카우틸랴는 마우리아 왕조의 치세 하에서 점점 그 규모가 확대되고 있는 무역도 세금징수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금・행정・군사력이라는 세 요소를 유기적으로 연관지으려 했던 그의 시도는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 건립의 주춧돌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처럼 제국의 정치적 지형이 급변하던 시절 인도의 종교 또한 완벽하게 탈바꿈했다. 자이나교와 불교가 엄청난 기세로 그 세를 늘려갔다. 백성들만이 두 종교에 의탁한 것은 아니었다. 찬드라굽타도 자이나교에서 마음의 안식을 얻었다. 그는 끔찍한 기근이 발생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기원전 298년에 아들 빈두사라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퇴위 후 인도 남부로 향한 찬드라굽타는 그곳에서 자이나교의 은둔자가 된다. 마이소르 주(현재의 명칭은 카르나타카 주)에 위치한 자이나교의 유적지 스라바나 벨골라Sravana Belgola에는 찬드라굽타의 말년에 관한 내용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이에 따르면 그는 말년에 출가하여 성지 스라바나 벨골라에서 고행을 하며 금식하다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수많은 나라들이 난립해 있던 광대한 영토를 한 손아귀에 움켜쥔 최고권력자였지만, 혜성같이 등장한 낮은 계층의 영웅이라는 점에서 찬드라굽타는 고대 인도의 정국에서는 매우 새로운 존재였다. 이같이 차별화되는 출신 덕에 그가 자이나교를 선택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이나교는 당시의 불교에 비하면 상당히 꾸밈없는 것을 지향하는 종교였다. 자이나교의 이상은 개인의 생존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탈인간적이고 추상적인 것과 관련이 있었다. 자이나교의 교리에 따르면 금욕생활을 지속하는 것만이 현세의 고통에서 영혼을 해방시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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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지하디스트 이슬람주의를 권위주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레몽 아롱에 따르면, 인류 역사를 되짚어볼 때 문명의 이종혼교성heterogeneity이 존재했다고 한다. 즉 빈라덴과 같은 인물과 알카에다처럼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한 조직체들은 이슬람세계의 평화시대라는 이슬람주의 질서에 이데올로기적 의욕이 앞서서 문명적 다양성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존의 세계질서에 도전하는 이슬람주의는 구분선을 그어 무슬림과 인류를 갈라놓고 있는데, 이는 이슬람교와 서방세계의 관계가 흘러가는 맥락이기도 하다. 경계선의 골은 점차 깊어만 간다.
이쯤에서 정치적 이슬람교의 최고 사상가이자 선구자인 사이드 쿠틉을 다시금 언급해야겠다. 서방세계의 문명위기를 감지한 그는 문화적 관점에서 기존의 세계질서에 도전했다. 그는 이슬람교의 경쟁적인 문명만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으며 이슬람교의 지배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쿠틉은 『진리를 향한 이정표』 및 『세계 평화와 이슬람교World Peace and Islam』 등의 소책자를 제작하며 이슬람교만이 범세계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거듭 말하지만, 바로 여기서 빈라덴과 지하드 전사들의 세계관이 비롯된 것이다. 이는 “발광하는 폭력배” 나 범법자의 시각이 아니라, 주류 지하디스트 이슬람주의를 권위주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세계정치에서 베스트팔렌 질서를 거부하고 이슬람세계의 질서가 이를 대체해야 한다는 사상은 평화적이고도 지하디스트다운 이슬람주의의 모든 분파가 공감하는 바이다.
헤들리 불은 쿠틉의 작품을 읽진 않았으나 “서방세계에 대항한” 문명적인 반란이 “이슬람교 원리주의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국제질서의 탈양극적 위기에 대한 쿠틉의 사상은 이슬람세계에서 널리 유포되었고, 이슬람교의 새로운 역할을 역설함으로써 이슬람주의자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정치적 이슬람교가 1928년, 무슬림 형제단의 창설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은 그것이 냉전의 종식(심지어는 시초)보다 앞선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보면, 정치적 이슬람교가 민중의 지지를 끌어낼 수는 없었다. 아롱이 지적한 “문명의 이종혼교성” 은 양극성 세계질서로 베일에 가려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그것이 벗겨졌다. 다시 출현한 이종혼교성은 정치화된 종교가 지지하고 있다.
이슬람주의 질서의 문명적 계획이 실패할 것 같다고 해서 주요 공략 대상인 베스트팔렌 질서가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베스트팔리아 너머” 로 가고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베스트팔렌 질서에 신성한 면은 전혀 없다. 때문에 그 존재를 비롯하여, 변모한 세계라는 조건하에 그 근간을 재조사하려는 의도를 두고는 의문을 제기해도 타당하다. 그러나 지하디스트 이슬람주의의 폭력이나 알라 신의 통치 이데올로기는 그럴듯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이슬람주의는 이슬람교가 아니기 때문에 무슬림조차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나는 비무슬림과 친민주주의 무슬림이 이슬람주의식 질서를 용납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종교가 다양한 인류에게 세속적 민족국가의 위기가 아무리 크다손 치더라도 특정 종교에 기반을 둔 대안은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이다. 왜 그럴까? 국가차원에서 신이슬람 질서(니잠 이슬라미)44는 자유와 민주정치를 지향하는 무슬림과 비무슬림은 수용할 수 없는 전체주의적 정치선언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주의 문헌에 정통한 전문가들은 이슬람주의자들이 질서를 운운하지만 그것이 수니파 이슬람교의 전통적인 칼리프 질서 회복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칼리프는 시아파가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슬람교의 보편적인 이데올로기는 비무슬림을 겨냥하여 종파의 구별 없이 무슬림 공동체를 통일하는 데 뜻을 두고 있다. 요컨대, 이슬람주의자는 행동하는 정치인이고, 세계관을 두고는 종교인이라 할 수 있다. 얀센의 말마따나, “이슬람교 원리주의의 이중적 본성” 도 일리가 있다.45 종교와 민족성 및 문화는 이슬람교와 서방세계가 대립하게 된 원흉이다. 지하드운동의 경우, 문명 간 경쟁은 폭력의 동기가 된다. 이슬람주의 지하드운동을 한 번 지나가면 그만인 사상이나 시사문제들의 대응책으로 치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1장에서는 지하드운동과 이슬람주의의 종말을 예견한 질 케펠의 입장에 이의를 제기했는데, 이는 그가 심각한 오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지하디스트 이슬람주의는 단순한 테러리즘이 아니므로 “문명의 충돌” 과 같은 경박한 미사여구나 “테러와의 전쟁” 이라는 강박관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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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세계에 맞선 반란과 신세계 무질서

 

 

 

 

 

 

이슬람주의의 지하디스트 분파를 둘러싼 정치적 아젠다는 경쟁문명에 대항하는 전쟁이라는 문화적 맥락에서 제기된다. 적대감의 명분이 서방세계 패권주의의 토대가 된 비대한 정치적 권력뿐만 아니라 서방세계의 가치관과 지식에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슬람주의자들은 데카르트 사상의 합리주의를 “인식론적 제국주의” 를 표현한 것으로 간주한다. 지하드운동의 지적 기반에는 세계의 탈서양화가 있으며, 세계질서의 개념과 더불어 이슬람주의자들은 문화적 내러티브를 강요할 것이다.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나는 헤들리 불의 전통과 새로 부각되고 있는 스탠리 호프만의 “세계의 무질서” 사상을 참고하도록 하겠다. 이슬람주의의 위협은 그들이 이상적인 질서를 창출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무색해질 뿐이다. 즉 폭력에는 의존하나 그들이 말한 것을 성취할 힘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하드운동은 무료할 여유가 없이 국제적인 동요를 일으킨다. 지하드운동의 비정규전은 이슬람주의자들이 기술 면에서 우월한 적에 대해 보상을 얻을 수는 있으나, 이처럼 균형이 잡히지 않은 분쟁은 그들을 동요와 무질서 밖으로 벗어날 수 없게 한다. “알라 신의 통치” 질서는 추종자들을 동원할 명분이 되더라도 늘 신기루에 불과할 것이나, 글로벌 지하드를 내세우는 이슬람주의식 국제주의는 탈양극성 정치의 세계 혁명 운동이자 이데올로기로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알카에다41에 관한 쟁점은 단순한 테러리즘에 국한되지 않는다. 알카에다는 질서를 둘러싼 두 가지 개념 사이에서 문명의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는 새뮤얼 헌팅턴이 조만간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고 본 “문명의 충돌” 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종교가 이미 세계정치로 귀환했다는 점은 국제안보가 당면한 문제를 시사하므로, 국제관계의 새로운 접근법이 될 것이다. 정치화된 종교를 현 질서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들 가운데 하나로 풀이하는 것이다.
세계질서를 둘러싼 문명의 경쟁을 이해하기 위해 서양 전문가들은 구조적인 세계화가 서양 가치관의 보편화를 자동적으로 불러일으키진 않을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한편, 개발은 비서양적인 방어 문화의 출현으로 이어질 가치의 위기를 초래할 것이다. 가치관의 서양화를 배제한 구조의 세계화는 지구촌 전역에서 이루어져 왔다. 이 같은 맥락에서, 신성한 종교가 정치의 탈을 쓰고 귀환한다는 것은 탈서양화의 일환으로 보아야 할 것인데, 서방세계는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서양 문화의 상대주의는 해결책이 아니라 몰이해를 부추기는 걸림돌에 불과하다. 포스트모던 문화의 상대주의는 이슬람주의가 타협을 모르는 절대주의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상대주의와 절대주의가 만나면 패배자는 문화의 상대주의자들이다.
현 국제정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레몽 아롱과 헤들리 불의 작품이 도움이 될 것이다. 기존의 세계질서에 이슬람주의식 부흥이 문명적으로 도전한 데는 정치적・문화적・종교적 쟁점들을 모두 포함한다. 이슬람교를 겨냥한 “유대・기독교인의 모략” 42을 직감한 지하디스트 이슬람주의자들은 “서방세계에 맞선 반란” 이— 이 주제와 관련된 불의 문헌에 잘 나타나 있다— 정당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지하드를 동원하여 탈서양화를 도모하고 있으므로, 이슬람주의의 세계관이 달라지지 않는 한 세계의 평화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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