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다 왕국은 남부 아시아의 열강으로 대두할 수 있었다

 

 

 

 

 

 

브라만이 누리는 면세와 공공의무의 면제라는 특권은 기원전 500년경 갠지스 계곡에서부터 움튼 인도의 두 번째 도시 문명사회에서 널리 인정된 건 아니었다. 아리아인의 유입 초기에 브라만 계급은 아리아인의 전통에 비추어볼 때 상당히 생경한 타 종교 종사자들과 경쟁해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이나교도나 불교도, 그리고 사명외도를 믿는 사람들은 브라만에 대한 특권 부여에 상당한 반감을 표명했다. 아리아인의 방식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이런 토착적인 믿음의 사상을 일부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이때 힌두교로 편입된 환생과 윤회, 그에 따른 응보와 같은 개념은 이후 힌두교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힌두교는 현대 인도인이 가장 많이 믿는 종교이다.
인도 북부 통합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덕에 한 발 앞당겨졌다. 기원전 326년 알렉산드로스는 인더스 계곡으로 진격했다. 이 관문만 통과하면 페르시아 제국 정복은 따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였다. 패배를 모르는 군왕 알렉산드로스는 인더스 계곡 전체를 손에 넣었다. 하지만 그의 눈부신 승리에도 불구하고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마가다 지역의 난다 왕국으로의 진군을 거부했다. 열병과 악천후에 시달려 지칠 대로 지친 병사들에게는 황제의 명도 소용없었다. 얼마간의 수비대가 알렉산드로스의 점령지에 남겨지긴 했지만, 알렉산드로스의 때 이른 죽음으로 세계 제패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기원전 317년에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그리스 군대도 인도 아대륙에서 철수하고 만다. 알렉산드로스의 뒤를 이은 후임자들 간의 분쟁에 관한 소식을 들은 지휘관들은 서쪽으로 향했다. 이후 남아시아 대륙에 몇 차례 짧은 기간에 걸친 외세의 침략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미미한 군사적 움직임이 대부분이라 인도에는 이에 대한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마가다 출신의 피 끓는 젊은이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알렉산드로스의 뒤를 좇는 모험을 하기로 결심한다. 한 애송이 모험가의 공상 같기만 했던 계획은 현실이 되
어버린다. 찬드라굽타는 갠지스 강 남안의 파탈리푸트라Pataliputra에서 난다 왕조를 궤멸시킨 후, 마케도니아에서 온 제왕이 증발해버린 인도 북서부의 정치적 공백을 십분 이용했다. 그는 기원전 317년에 마우리아 왕조를 창건하고 파탈리푸트라를 수도로 정했다. 그리스와 인도의 자료에 따르면 찬드라굽타는 그 출생의 합법성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며, 난다 왕조의 마지막 자손이긴 하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매우 낮았다고 한다.

찬드라굽타는 인도 북서부에 주둔한 마케도니아의 잔존세력을 완전히 축출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점령했던 광대한 영토의 동쪽 부분을 물려받은 셀레우코스 1세와도 성공적인 국경 협상을 하여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넘겨받기도 했다. 그에 대한 답례로 찬드라굽타는 셀레우코스가 서아시아에서 사용할 전쟁용 코끼리 500마리를 선사했다. 셀레우코스는 파탈리푸트라에 메가스테네스를 외교사절로 파견하기도 했으며, 찬드라굽타의 궁에 머물 때는 마우리아 왕조에 대한 기록을 담은 사료를 편찬하기도 했다. 메가스테네스는 마우리아 군체계의 전문성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마우리아의 군대는 총 30명으로 이뤄진 장수의 휘하에 여러 개의 작은 조직들이 복속되어 있어, 보병대와 전차부대・코끼리부대・해군・보급부대 등의 하위부대를 관리하는 구조로 편성되어 있었다.
마가다 왕국이 남부 아시아의 열강으로 대두할 수 있었던 건 휘하 무관들만의 공은 아니었다. 찬드라굽타를 보필하던 관료들의 뛰어난 행정능력도 못지않은 보탬이 되었던 것이다. 찬드라굽타는 엄청나게 뛰어난 장수들로부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모든 것은 노련한 재상 브라만 카우틸랴의 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카우틸랴의 저작물로 전해지는 『아르타샤스트Arthashatra(실리론實利論)』를 통해 그가 마우리아 왕조의 체제에 대해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마우리아가 합당한 녹봉을 받는 문무대신들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으며, 이런 체제는 효율적인 조세제도를 통해서만 확립될 수 있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농민으로부터 걷어들이는 세수가 국가재정 안정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지만, 카우틸랴는 마우리아 왕조의 치세 하에서 점점 그 규모가 확대되고 있는 무역도 세금징수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금・행정・군사력이라는 세 요소를 유기적으로 연관지으려 했던 그의 시도는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 건립의 주춧돌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처럼 제국의 정치적 지형이 급변하던 시절 인도의 종교 또한 완벽하게 탈바꿈했다. 자이나교와 불교가 엄청난 기세로 그 세를 늘려갔다. 백성들만이 두 종교에 의탁한 것은 아니었다. 찬드라굽타도 자이나교에서 마음의 안식을 얻었다. 그는 끔찍한 기근이 발생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기원전 298년에 아들 빈두사라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퇴위 후 인도 남부로 향한 찬드라굽타는 그곳에서 자이나교의 은둔자가 된다. 마이소르 주(현재의 명칭은 카르나타카 주)에 위치한 자이나교의 유적지 스라바나 벨골라Sravana Belgola에는 찬드라굽타의 말년에 관한 내용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이에 따르면 그는 말년에 출가하여 성지 스라바나 벨골라에서 고행을 하며 금식하다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수많은 나라들이 난립해 있던 광대한 영토를 한 손아귀에 움켜쥔 최고권력자였지만, 혜성같이 등장한 낮은 계층의 영웅이라는 점에서 찬드라굽타는 고대 인도의 정국에서는 매우 새로운 존재였다. 이같이 차별화되는 출신 덕에 그가 자이나교를 선택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이나교는 당시의 불교에 비하면 상당히 꾸밈없는 것을 지향하는 종교였다. 자이나교의 이상은 개인의 생존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탈인간적이고 추상적인 것과 관련이 있었다. 자이나교의 교리에 따르면 금욕생활을 지속하는 것만이 현세의 고통에서 영혼을 해방시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