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 지하디스트 이슬람주의를 권위주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레몽 아롱에 따르면, 인류 역사를 되짚어볼 때 문명의 이종혼교성heterogeneity이 존재했다고 한다. 즉 빈라덴과 같은 인물과 알카에다처럼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한 조직체들은 이슬람세계의 평화시대라는 이슬람주의 질서에 이데올로기적 의욕이 앞서서 문명적 다양성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존의 세계질서에 도전하는 이슬람주의는 구분선을 그어 무슬림과 인류를 갈라놓고 있는데, 이는 이슬람교와 서방세계의 관계가 흘러가는 맥락이기도 하다. 경계선의 골은 점차 깊어만 간다.
이쯤에서 정치적 이슬람교의 최고 사상가이자 선구자인 사이드 쿠틉을 다시금 언급해야겠다. 서방세계의 문명위기를 감지한 그는 문화적 관점에서 기존의 세계질서에 도전했다. 그는 이슬람교의 경쟁적인 문명만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으며 이슬람교의 지배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쿠틉은 『진리를 향한 이정표』 및 『세계 평화와 이슬람교World Peace and Islam』 등의 소책자를 제작하며 이슬람교만이 범세계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거듭 말하지만, 바로 여기서 빈라덴과 지하드 전사들의 세계관이 비롯된 것이다. 이는 “발광하는 폭력배” 나 범법자의 시각이 아니라, 주류 지하디스트 이슬람주의를 권위주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세계정치에서 베스트팔렌 질서를 거부하고 이슬람세계의 질서가 이를 대체해야 한다는 사상은 평화적이고도 지하디스트다운 이슬람주의의 모든 분파가 공감하는 바이다.
헤들리 불은 쿠틉의 작품을 읽진 않았으나 “서방세계에 대항한” 문명적인 반란이 “이슬람교 원리주의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국제질서의 탈양극적 위기에 대한 쿠틉의 사상은 이슬람세계에서 널리 유포되었고, 이슬람교의 새로운 역할을 역설함으로써 이슬람주의자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정치적 이슬람교가 1928년, 무슬림 형제단의 창설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은 그것이 냉전의 종식(심지어는 시초)보다 앞선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보면, 정치적 이슬람교가 민중의 지지를 끌어낼 수는 없었다. 아롱이 지적한 “문명의 이종혼교성” 은 양극성 세계질서로 베일에 가려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그것이 벗겨졌다. 다시 출현한 이종혼교성은 정치화된 종교가 지지하고 있다.
이슬람주의 질서의 문명적 계획이 실패할 것 같다고 해서 주요 공략 대상인 베스트팔렌 질서가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베스트팔리아 너머” 로 가고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베스트팔렌 질서에 신성한 면은 전혀 없다. 때문에 그 존재를 비롯하여, 변모한 세계라는 조건하에 그 근간을 재조사하려는 의도를 두고는 의문을 제기해도 타당하다. 그러나 지하디스트 이슬람주의의 폭력이나 알라 신의 통치 이데올로기는 그럴듯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이슬람주의는 이슬람교가 아니기 때문에 무슬림조차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나는 비무슬림과 친민주주의 무슬림이 이슬람주의식 질서를 용납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종교가 다양한 인류에게 세속적 민족국가의 위기가 아무리 크다손 치더라도 특정 종교에 기반을 둔 대안은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이다. 왜 그럴까? 국가차원에서 신이슬람 질서(니잠 이슬라미)44는 자유와 민주정치를 지향하는 무슬림과 비무슬림은 수용할 수 없는 전체주의적 정치선언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주의 문헌에 정통한 전문가들은 이슬람주의자들이 질서를 운운하지만 그것이 수니파 이슬람교의 전통적인 칼리프 질서 회복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칼리프는 시아파가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슬람교의 보편적인 이데올로기는 비무슬림을 겨냥하여 종파의 구별 없이 무슬림 공동체를 통일하는 데 뜻을 두고 있다. 요컨대, 이슬람주의자는 행동하는 정치인이고, 세계관을 두고는 종교인이라 할 수 있다. 얀센의 말마따나, “이슬람교 원리주의의 이중적 본성” 도 일리가 있다.45 종교와 민족성 및 문화는 이슬람교와 서방세계가 대립하게 된 원흉이다. 지하드운동의 경우, 문명 간 경쟁은 폭력의 동기가 된다. 이슬람주의 지하드운동을 한 번 지나가면 그만인 사상이나 시사문제들의 대응책으로 치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1장에서는 지하드운동과 이슬람주의의 종말을 예견한 질 케펠의 입장에 이의를 제기했는데, 이는 그가 심각한 오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지하디스트 이슬람주의는 단순한 테러리즘이 아니므로 “문명의 충돌” 과 같은 경박한 미사여구나 “테러와의 전쟁” 이라는 강박관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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