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의식은 하나다

 

 

우리 의식의 정원은 하나의 정원이다. 우리는 땅에 선을 그어 나의 정원과 다른 사람들의 정원으로 나눌 수 없다. 우리의 정원에 잡초가 우거지면 그 씨앗이 바람에 날려 주변의 정원으로 날아가고, 다시 그 정원 주변의 정원에까지 퍼진다. 우리의 이웃들이 잡초가 자라도록 내버려두면 그 씨앗이 우리의 정원에 날아든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의식의 정원을 분리할 수 있다는 생각은 망상 바로 그 자체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정원에 있는 악한 씨앗을 관리하고 그 씨앗이 자라나 퍼지지 않도록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은 주변의 모든 사람을 돕는 일이다. 어떤 이유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을 때 이를 관찰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슬픔, 화 혹은 질투는 우리의 정원에 쉽게 뿌리내린다. 마음을 챙기지 않으면, 우리도 화가 나고 초조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내면의 부정적인 씨앗을 다스리는 법을 안다면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보호할 수 있다.
우리는 단순히 잡초를 퍼뜨리지 않는 일보다 더 건설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다. 주변 사람들 안에 있는 긍정적인 씨앗에 물을 주는 것이다. 긍정적인 자 질만 있는 사람이란 없다. 모든 사람의 의식에는 꽃과 잡초가 섞여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지닌 좋은 자질에 집중하면 그들의 좋은 자질을 격려하는 셈이다. 이런 행동은 주변 환경을 더 유익하고 긍정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런 환경이 다시 우리의 긍정적인 자질을 살찌우게 하여, 자애로움과 행복의 긍정적인 순환 고리가 생겨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도서출판 지와 사랑의 신간 <법왕 달라이 라마> 중에서

 

 

 

달라이라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의 행복을 소중히 여기는 생각과 감정을 키우는 일과 관련한 또 하나의 사실은 자신의 이익과 소망이 실제로는 다른 지각 있는 중생들을 위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산물로서 충족된다는 점입니다. 제 총 카파Je Tsong Khapa가 ‘깨달음의 길에 대한 대강해Great Exposition of the Path to Enlightenment’(Lamrim Chenmo)에서 지적했듯이, “수행자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충족시키는 생각과 활동에 주력할수록 자신의 열망이 충족되거나 실현되는 일이 별다른 노력 없이 부산물로서 나타납니다.

” 제가 매우 자주 하는 말이라서 여러분 중에 들으신 분들이 있을 텐데요. 어떤 면에서는 연민의 마음으로 불도를 닦는 수행자들, 즉 보살들은 현명하게 이기적인 사람들인 반면,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어리석게 이기적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늘 불행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좀 더 현명해질 때가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이것이 저의 믿음입니다. 어
느 시점에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정말로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 있을까?”
저의 작은 경험에 근거한다면 저의 답은 주저 없이 “예!” 입니다. 이 답은 제게 분명합니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척 특이합니다. 때로 마음은 매우 완고해서 바꾸기가 정말 힘듭니다. 하지만 이유를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고 확고하게 믿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매우 정직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다면 마음이 변할 수 있습니다.
기원과 기도만으로는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결국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믿음과 이유를 갖는다면 마음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이때 시간이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정신적 태도가 확실히 변할 수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 특히 자신을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현실적인 나머지 오직 실용성만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중생의 행복을 빌고, 모든 중생의 행복을 소중히 여기려는 생각을 키우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너무 이상적이다. 그런 일이 사람들에게는 전혀 불가능하므로 어떠한 방법으로도 마음을 변화시키거나 정신을 수련할 수 없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조건 아래서 직접 교류하는 지인들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 더욱더 효과적인 접근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지각 있는 중생은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에 모든 지각 있는 중생을 생각한다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어쩌면 이 행성에 사는 무한한 지각 있는 중생과는 연결된다고 느끼지만, 무수한 세계와 우주의 무수한 지각 있는 중생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왜 모든 생물을 이 지구권 안에 포함시켜야 하죠?” 하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일면 타당한 이의 제기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그러한 이타적인 마음을 키우는 효과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핵심은 고통을 느끼고 행복을 경험할 능력을 지닌 모든 형태의 생명에 공감할 수 있는 시야를 키우는 것입니다. 이는 살아 있는 유기체를 하나의 지각 있는 중생으로 규정하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감정은 매우 강력해서 모든 생물 하나하나에 대해 특정한 용어로 칭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보편적인 찰나성(비영구성)을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만물과 모든 사건이 찰나적이라는 생각을 키울 때 그 찰나성을 인식하기 위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 하나하나를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은 그렇게 작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점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 시의 첫 번째 구절에서 ‘내가’라는 매개체가 분명히 명시됩니다. “내가 늘 다른 생명을 소중히 여기도록 기원합니다.” 이 단계에서 불교에서는 이 ‘나’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생각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여러분, 나, 다른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경험하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는 무엇무엇을 본다”라든지 “나는 무엇무엇을 듣는다”라고 말하며, 끊임없이 일인칭 대명사를 사용합니다. 우리 모두 매일매일 경험하는 일반적인 단계의 ‘자아’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아’ 혹은 ‘나’라는 것이 누구인지 이해하려고 할 때 질문이 생깁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의 분석 범위가 매일의 일상을 조금 넘어서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을 회상하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의 어느 시점을 회상할 때 우리는 그 나이에 가졌던 몸과 마음의 상태 그리고 ‘자아’를 거의 그대로 느낍니다. 우리가 어릴 때 ‘자아’가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자아’가 있습니다. 두 시기를 관통하는 ‘자아’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노년의 경험 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몸의 상태와 ‘나’라는 의식인 ‘자아’를 거의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많은 철학자들, 특히 종교 철학자들은 시간과 상관없이 계속 유지되는 이런 ‘자아’ 혹은 ‘나’라는 개인적 특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특히 인도는 전통적으로 이를 중요시했습니다. 불교를 따르지 않는 인도의 학교에서는 아트만이라는 말을 합니다. 대략 ‘자아’ 혹은 ‘영혼’이라고 번역됩니다. 그 밖의 비인도 종교 전통에서는 존재의 ‘영혼’ 같은 것들에 관해 논의합니다. 인도적인 맥락에서는 아트만이 개인의 경험적 사실과 구별되는 매개체로서 뚜렷한 의미를 지닙니다.

예를 들면 힌두교 전통에서는 환생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환생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나 역시 의식이나 영혼이 금방 죽은 시신의 몸에 있다고 가정하는 일종의 심령 의식에 대한 문헌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환생을 인정한다면, 다른 몸에 영혼이 깃든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개인의 경험적 사실과 구별되는 일종의 독립적인 매개체가 있다고 인정하는 셈입니다. 대체적으로 불교를 따르지 않는 인도의 학파에서는 ‘자아’가 이러한 독립적인 매개체, 즉 아트만이라는 결론에 거의 이르렀습니다. 자아는 몸, 마음과는 구별됩니다. 대체적으로 불교 전통은 심신과 구별되는 자아, 아트만, 혹은 영혼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불교 학파에서는 ‘자아’, 혹은 ‘나’를 몸과 마음의 집합체로 이해해야 한다는 합의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나’, 혹은 ‘자아’라고 말할 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불교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많은 불교 학교들에서는 최종적으로 ‘자아’를 사람의 의식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합니다. 분석을 통해 우리는 몸이 임시적인 실재라는 것과 시간 속에서 계속되는 것이 실제로 사람의 의식이라는 것을 밝힐 수 있습니다.
물론 ‘자아’를 의식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불교 철학자들도 있습니다. 부다팔리타Buddhapalita와 찬드라키르티Chandrakirti와 같은 불교 철학자들은 영원하거나 지속되는 ‘자아’ 같은 것을 찾고 싶은 욕구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종류의 추론을 하는 것은 일면 무언가에 집착하려는 뿌리 깊은 욕구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자아’의 본질을 분석하면 아무런 결론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한 탐구가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입니다.

부다팔리타와 찬드라키르티가 주장했듯이 이는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언어와 경험에 대한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는 형이상학적인 자아에 대한 탐구입니다. 따라서 ‘자아’, 즉 사람, 매개체는 순전히 ‘자아’의 느낌을 경험함으로써만 이해되어야 합니다. ‘자아’와 사람을 이해하는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서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의 존재로서 자신의 존재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자아’와 사람은 몸과 마음에 의존하는 명칭으로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찬드라키르티는 『중도 안내Guide to the Middle Way(Madhyamakavatara)』에서 마차의 예를 들었습니다. 마차의 개념을 분석해 보면 마차를 형성하는 부분들과 관계없는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진정한 의미의 마차를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차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자아’, ‘자아’의 본질을 분석하면 개인의 존재를 형성하는 몸과 마음과 관계없는 ‘자아’를 찾을 수 없습니다. ‘자아’를 의존적으로 발생하는 존재로 이해하는 건 모든 지각 있는 중생을 이해하는 것으로도 확대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지각 있는 중생은 몸과 마음의 실재에 의존하는 명칭입니다. 몸과 정신의 실재는 존재의 정신적, 신체적 구성성분의 결합을 기초로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왜 눈이 침침해지는 걸까?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외형편外形篇 안眼문에 다음의 내용이 있습니다.

“모든 맥은 눈으로 이어진다. 눈은 오장육부五臟六腑의 정기가 모인 곳이다. 오장육부의 정기는 맥의 흐름을 따라 눈으로 올라오므로, 장부의 정기精氣는 눈에서 드러난다. 장부가 쇠락하고 기혈氣血이 쇠락하면 결국 시력의 저하를 부른다.”

기혈氣血이란 말 그대로 기氣와 혈血을 합친 것으로 혈기血氣라고도 합니다. 체내를 돌면서 인체의 활동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생리적 물질을 정기正氣 혹은 정혈精血이라 하고, 체내로 침입하는 병적인 인자를 방어하는 기능을 하는 것을 위기衛氣, 체내의 영양을 돕는 기능을 하는 것을 영기營氣, 정신활동과 관련된 것을 신기神氣라 합니다. 그 밖에도 기氣는 체온유지, 생리활동을 돕는 에너지를 제공하고, 혈액순환이나 여러 가지 물질을 운반하며, 혈액, 땀, 소변 등을 조절하기도 합니다. 혈血은 혈액 및 혈액이 가지는 영양작용을 가리키는데, 혈은 음식물로부터 이뤄지며, 온 몸을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영양작용을 하기 때문에, 모든 장부 조직은 혈의 영양을 받아야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 할 수 있습니다. 혈의 순환 및 기능은 기의 힘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기가 부족할 때에는 혈이 잘 돌지 못해 병이 생깁니다. 기는 혈의 작용에 의해 발휘되기도 하므로 기와 혈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눈이 침침해지는 사람 가운데 만성피로가 누적된 사람이 많습니다. 나이가 들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가 눈이 쉽게 피로해지는 것입니다.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서 일하는 사람에게 눈이 침침해지는 현상이 보통입니다. 오래 독서한다든가 모니터를 오래 본다든가 하면 과거와 달리 눈이 침침해지는데, 눈이 늙어가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일종의 노화현상입니다. 노안老眼인 것입니다.

<동의보감>에는 눈이 오장육부의 정기가 모인 곳으로 적혀 있습니다. 오장五臟은 간장, 심장, 비장, 폐, 신장을 말합니다. 육부六腑는 대장, 소장, 쓸개, 위, 삼초三焦, 방광을 말합니다. 상초上焦, 중초中焦, 하초下焦로 구분되는 삼초三焦는 해부학상으로는 형태가 없고 오직 기능만을 말합니다. 한의학에서는 삼초를 결독지관決瀆之官이라 하여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음식물의 소화와 영양물질인 정기精氣의 수송을 담당하는 비脾의 생리기능인 운화運化, 섭식攝食, 배설排泄 작용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의학은 오장육부에 뿌리를 두고 온 몸으로 뻗어 나오는 모든 경맥이 눈과 이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오장육부의 맑은 기운인 정기精氣가 오장육부와 이어진 경맥을 타고 눈으로 올라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장부의 정기가 눈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을 보고서 그 사람의 장부의 정기가 튼튼한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만약 그 사람의 눈빛이 힘에 넘친다면 그 사람의 오장육부도 힘이 넘친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눈은 오장육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인 셈입니다. 나이가 들면 오장육부의 기능이 저하하는데, 게다가 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면 눈에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습니다. 눈이 침침해지는 것입니다. 과음, 뜨거운 성질의 음식과 밀가루 음식을 먹고, 바람과 서리를 오래 맞는 것도 눈이 침침해지는 원인이라고 한의학에서는 말합니다. 눈이 침침해지지 않으려면 정기 혹은 기력을 보충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운동을 열심히 하고, 영양가가 높은 음식을 먹어야 하며,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물리쳐야 합니다.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고, 산보를 하거나 관심이 있는 책을 읽거나 명상적인 음악을 듣고, 충분한 수면을 취해야 합니다. 남에게 화를 내지 않고, 고민하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고, 탐욕을 물리치며, 곡식과 푸성귀 위주로 단순하고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이런 음식은 몸에 탁기를 쌓게 하지 않으며 기를 맑게 하고 진기를 길러주어 백병의 약이 되며 양생의 힘이 된다고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64괘 중에서 스물일곱 번째가 이頤입니다.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頤 정길貞吉 관이觀頤 자구구실自求口實

사이령구舍爾靈龜 관아타이觀我朶頤 흉凶

전이顚頤 불경拂經 우구于丘 이頤 정征 흉凶

불이정拂頤貞 흉凶 십년물용十年勿用 무유리无攸利

전이顚頤 길吉 호시탐탐虎視耽耽 기욕축축其欲逐逐 무구无咎

불경拂經 거정居貞 길吉 불가섭대천不可涉大川

유이由頤 려厲 길吉 리섭대천利涉大川

 

첫 번째 효사爻辭는 이頤 정길貞吉 관이觀頤 자구구실自求口實입니다. 이頤(턱 이)의 도道를 추구하면 끝貞이 길吉하며, 관이觀頤를 통해야 스스로自 언행口實의 일치를 구求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頤의 도道 또한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정貞의 시절에 이르러야 비로소 성취될 수 있음을 우선 말한 것입니다. 관이觀頤는 관觀의 도道를 먼저 깨달아 이頤의 도道를 얻는다는 말입니다. 관의 도란 자신을 알고, 상대를 알며, 어떤 사태와 사건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아는 것입니다. 이런 지혜를 갖춘 뒤 위턱과 아래턱의 조화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음양의 원리를 깨치면, 이것이 바로 이頤의 도道가 되는 것입니다. 자구구실自求口實의 구口와 실實이 각각 말과 행동을 뜻하므로 자구구실自求口實은 언행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관觀의 도道를 거쳐 이頤의 원리를 깨치면, 그런 언행일치의 경지가 저절로 얻어진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 효사爻辭는 사이령구舍爾靈龜 관아타이觀我朶頤 흉凶입니다. 이런 이頤의 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도 경계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바로 그렇게 조심해야 할 것들을 논한 구절입니다. 사이령구舍爾靈龜(집 사, 너 이, 신령 령, 거북 귀)는 영적인 거북靈龜이 떠난다舍는 듯이므로 미래를 읽을 수 있는 판단력의 상실을 의미입니다. 이頤의 도道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능력 중 하나가 어떤 사건이나 사태의 과거, 현재, 미래를 꿰뚫어볼 수 있는 눈입니다. 이는 관觀의 도道를 수행함으로써 얻어지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런 통찰력과 판단력이 상실되었으므로 흉합니凶. 판단력이 상실된 것은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관아觀我는 자기만 본다는 말이며, 관아생觀我生, 관국지광觀國之光, 관기생觀其生이라는 세 가지 관觀의 도 가운데 한 가지에만 집착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 나와 상대 사이의 조화를 이룰 수 없고, 나와 특정한 사건 사이의 연관관계를 올바로 파악할 수도 없습니다. 이를 『주역』은 늘어진朶(늘어질 타) 턱頤, 즉 타이朶頤라는 말로 묘사했습니다. 그런 턱으로는 음식을 씹을 수도 없고, 말을 제대로 할 수도 없어 흉합니다凶.

 

세 번째 효사爻辭는 전이顚頤 불경拂經 우구于丘 이頤 정征 흉凶입니다. 전이顚頤(꼭대기 전)는 턱頤이 이마顚에 붙었다는 말이며, 불경拂經(털 불, 경서 경)은 그런 자가 세상을 경영하면經 만사가 어긋난다拂는 뜻입니다. 즉 이頤의 도道를 이루지 못한 사람은 세상 경영에 나서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언덕에 올라于丘 그런 턱頤으로 세상을 호령하니, 그렇게 나아가면征 흉합니다凶.

 

네 번째 효사爻辭는 불이정拂頤貞 흉凶 십년물용十年勿用 무유리无攸利입니다. 이頤의 도道는 정貞의 시절에나 가능해집니다. 그러니 끝까지 최선을 다해 마음을 닦고 수행해야 합니다. 불이정拂頤貞은 이처럼 이頤의 도道가 끝까지貞 나아가지 못한拂 상태, 중도에 그만두거나 포기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흉합니다凶. 그러니 “10년 공부 도로 아미타불”이라고 10년十年 공부도 쓰지 못하고勿用, 이로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다无攸利.

 

다섯 번째 효사爻辭는 전이顚頤 길吉 호시탐탐虎視耽耽 기욕축축其欲逐逐 무구无咎입니다. 여기서는 전이顚頤도 길吉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전이顚頤의 턱은 이마에 붙은 턱이되 높은 지위에서 세상을 호령하는 턱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먹이를 노려보는 호랑이의 눈처럼虎視耽耽(즐길 탐), 어떤 목표를 향해 강렬하고도 순수하게 매진하는其欲逐逐(하고자 할 욕, 쫓을 축) 턱입니다. 앞의 전이顚頤가 미친 턱이라면 여기서의 전이는 미친 턱이되 순수성을 간직한 강고한 턱입니다. 그래서 허물이 없습니다다无咎.

 

여섯 번째 효사爻辭는 불경拂經 거정居貞 길吉 불가섭대천不可涉大川입니다. 불경拂經이면 끝까지貞 거居해야 길吉하고, 섭대천涉大川은 불가不可하다는 뜻입니다. 불경拂經은 이頤의 도道를 깨닫지 못해 아직 세상 경영에 나설 수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나오지 말고 끝까지貞 은거해야居 길합니다吉. 바꾸어 말하면 이런 사람이 세상에 나오면 흉합니다凶. 그래서 섭대천涉大川(건널 섭), 큰 내를 건너는 모험도 불가不可하다고 한 것입니다. 불경拂經은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의 경륜이 아직 현재의 시류에 맞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일곱 번째 효사爻辭는 유이由頤 려厲 길吉 리섭대천利涉大川입니다. 유由(말미암을 유)는 사람 사이의 인연, 어떤 일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의미합니다. 유이由頤는 이頤의 도道가 세상에 그 뜻을 펼칠 인연을 만났다는 말로 풀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연을 만났다고 해서 쉽게 이頤의 도道가 펼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렵습니다厲. 하지만 길吉하고, 섭대천涉大川의 모험을 감행해도 이롭습니다利.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64괘 중에서 스물여섯 번째가 대축大畜입니다.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축大畜 리정利貞 불가식不家食 길吉 리섭대천利涉大川

유려有厲 리기利己

여설복輿說輹

양마축良馬逐 리간정利艱貞 일한여위日閑輿衛 리유유왕利有攸往

동우지곡童牛之牿 원길元吉

분시지아獖豕之牙 길吉

하천지구何天之衢 형亨

 

첫 번째 효사爻辭는 대축大畜 리정利貞 불가식不家食 길吉 리섭대천利涉大川입니다. 대축大畜(기를 축)은 리利와 정貞의 시절에 통합니다. 대축은 장년 이후의 원숙한 나이가 되어서야 가능합니다. 이에 비해 소축小畜은 형亨의 시절에 정해집니다. 불가식不家食은 가족을 먹이지 못한다는 말이므로 가정에 대한 소흘함을 말합니다. 대체로 큰 성공을 이룬 사람으로 가정에 충실했던 경우가 드뭅니다. 섭대천涉大川은 큰 강물을 건넌다는 말이므로 남들이 두려워하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위험천만한 모험을 감행하는 결단력과 용기, 추진력을 뜻합니다. 『주역』은 대축大畜을 이루기 위한 여정에서 식솔들을 돌보지 못하는 어려움은 불가피하면서도 길吉하고, 큰 강을 건너는 모험과 성취는 이롭다利고 격려합니다.

 

두 번째 효사爻辭는 유려有厲 리기利己입니다. 사사로운 욕심利己에 매달리면 대축은 이룰 수 없고 위태로움만 있게有厲(위태로울 려) 됩니다.

 

세 번째 효사爻辭는 여설복輿說輹입니다. 「소축小畜」에서도 비슷한 구절이 나왔습니다輿說輹. 거기서는 설說을 벗어난다는 의미의 탈脫로 읽어서, 수레의 바퀴가 빠져버린 형국으로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장 전체의 주제를 고려할 때 그냥 설說(말씀 설)로 읽고, 어떤 일을 하는 방법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자연스럽습니다. 여輿(수레 여)는 수레이니, 대축大畜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기본 전략을 의미합니다. 설복說輹(당토 복)은 수레의 바퀴를 굴리는 방법이니, 전략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술에 해당합니다.

 

네 번째 효사爻辭는 양마축良馬逐 리간정利艱貞 일한여위日閑輿衛 리유유왕利有攸往입니다. 여설복輿說輹이 대축大畜을 준비하는 젊은 시절의 수련에 해당한다면, 이 구절은 대축을 구현해나가는 과정에서의 끊임없는 자기 갱신과 수련을 강조한 부분입니다. 양마축良馬逐(쫓을 축)은 좋은 말이 달린다는 의미이므로 대축을 이룰 준비가 된 인재가 이제 막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하는 상황입니다. 리간정利艱貞(어려울 간)은 리利의 시기에서 정貞의 시기까지 내내 어렵다는 말이므로 준비된 인재라 하더라도 대축을 이루기가 쉽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일한여위日閑輿衛(막을 한, 지킬 위)는 날마다日 수레輿를 막아 세우고閑 지키며 점검한다衛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나아가야有攸往 이롭습니다利. 이때의 수레 역시 대축을 이루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전략과 전술을 의미합니다.

 

다섯 번째 효사爻辭는 동우지곡童牛之牿 원길元吉입니다. 동우지곡童牛之牿(우리 곡)의 동우童牛는 송아지이며, 곡牿은 우리이자 소의 뿔에 대는 황목을 이르기도 합니다. 황목은 소의 뿔이 사람을 지르지 못하도록 뿔에 감싸는 나무토막입니다. 따라서 동우지곡童牛之牿은 송아지의 우리, 혹은 송아지 뿔에 대는 안전장치라는 말이며, 이는 송아지가 함부로 날뛰지 못하도록 가두어 보호하고 가르치는 과정을 말합니다. 이는 교육을 뜻한다. 젊고 순수하며 유능한 인물을 교육시킨다는 말이며, 인재를 발굴하여 투자하고 공부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야 근원적으로元 길합니다吉.

 

여섯 번째 효사爻辭는 분시지아獖豕之牙 길吉입니다. 거세한 돼지獖豕(불깐 돼지 분, 돼지 시)의 이빨牙은 길吉하다는 말입니다. 거세한 돼지란 새끼를 낳기 위한 돼지가 아니라 도축용으로 기르는 돼지, 즉 식용 돼지입니다.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 것이 튼튼한 이빨입니다.

 

일곱 번째 효사爻辭는 하천지구何天之衢 형亨입니다. 하천지구何天之衢는 하늘의 길을 안다는 말이므로 천시天時와 통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형통하게亨 대축大畜을 이룰 수 있다는 말입니다. 대축의 성패는 하늘이 정하는 것이므로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늘의 뜻과 자연의 섭리를 다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