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출판 지와 사랑의 신간 <법왕 달라이 라마> 중에서

달라이라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의 행복을 소중히 여기는 생각과 감정을 키우는 일과 관련한 또 하나의 사실은 자신의 이익과 소망이 실제로는 다른 지각 있는 중생들을 위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산물로서 충족된다는 점입니다. 제 총 카파Je Tsong Khapa가 ‘깨달음의 길에 대한 대강해Great Exposition of the Path to Enlightenment’(Lamrim Chenmo)에서 지적했듯이, “수행자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충족시키는 생각과 활동에 주력할수록 자신의 열망이 충족되거나 실현되는 일이 별다른 노력 없이 부산물로서 나타납니다.
” 제가 매우 자주 하는 말이라서 여러분 중에 들으신 분들이 있을 텐데요. 어떤 면에서는 연민의 마음으로 불도를 닦는 수행자들, 즉 보살들은 현명하게 이기적인 사람들인 반면,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어리석게 이기적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늘 불행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좀 더 현명해질 때가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이것이 저의 믿음입니다. 어
느 시점에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정말로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 있을까?”
저의 작은 경험에 근거한다면 저의 답은 주저 없이 “예!” 입니다. 이 답은 제게 분명합니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척 특이합니다. 때로 마음은 매우 완고해서 바꾸기가 정말 힘듭니다. 하지만 이유를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고 확고하게 믿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매우 정직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다면 마음이 변할 수 있습니다.
기원과 기도만으로는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결국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믿음과 이유를 갖는다면 마음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이때 시간이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정신적 태도가 확실히 변할 수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 특히 자신을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현실적인 나머지 오직 실용성만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중생의 행복을 빌고, 모든 중생의 행복을 소중히 여기려는 생각을 키우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너무 이상적이다. 그런 일이 사람들에게는 전혀 불가능하므로 어떠한 방법으로도 마음을 변화시키거나 정신을 수련할 수 없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조건 아래서 직접 교류하는 지인들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 더욱더 효과적인 접근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지각 있는 중생은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에 모든 지각 있는 중생을 생각한다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어쩌면 이 행성에 사는 무한한 지각 있는 중생과는 연결된다고 느끼지만, 무수한 세계와 우주의 무수한 지각 있는 중생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왜 모든 생물을 이 지구권 안에 포함시켜야 하죠?” 하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일면 타당한 이의 제기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그러한 이타적인 마음을 키우는 효과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핵심은 고통을 느끼고 행복을 경험할 능력을 지닌 모든 형태의 생명에 공감할 수 있는 시야를 키우는 것입니다. 이는 살아 있는 유기체를 하나의 지각 있는 중생으로 규정하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감정은 매우 강력해서 모든 생물 하나하나에 대해 특정한 용어로 칭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보편적인 찰나성(비영구성)을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만물과 모든 사건이 찰나적이라는 생각을 키울 때 그 찰나성을 인식하기 위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 하나하나를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은 그렇게 작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점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 시의 첫 번째 구절에서 ‘내가’라는 매개체가 분명히 명시됩니다. “내가 늘 다른 생명을 소중히 여기도록 기원합니다.” 이 단계에서 불교에서는 이 ‘나’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생각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여러분, 나, 다른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경험하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는 무엇무엇을 본다”라든지 “나는 무엇무엇을 듣는다”라고 말하며, 끊임없이 일인칭 대명사를 사용합니다. 우리 모두 매일매일 경험하는 일반적인 단계의 ‘자아’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아’ 혹은 ‘나’라는 것이 누구인지 이해하려고 할 때 질문이 생깁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의 분석 범위가 매일의 일상을 조금 넘어서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을 회상하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의 어느 시점을 회상할 때 우리는 그 나이에 가졌던 몸과 마음의 상태 그리고 ‘자아’를 거의 그대로 느낍니다. 우리가 어릴 때 ‘자아’가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자아’가 있습니다. 두 시기를 관통하는 ‘자아’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노년의 경험 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몸의 상태와 ‘나’라는 의식인 ‘자아’를 거의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많은 철학자들, 특히 종교 철학자들은 시간과 상관없이 계속 유지되는 이런 ‘자아’ 혹은 ‘나’라는 개인적 특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특히 인도는 전통적으로 이를 중요시했습니다. 불교를 따르지 않는 인도의 학교에서는 아트만이라는 말을 합니다. 대략 ‘자아’ 혹은 ‘영혼’이라고 번역됩니다. 그 밖의 비인도 종교 전통에서는 존재의 ‘영혼’ 같은 것들에 관해 논의합니다. 인도적인 맥락에서는 아트만이 개인의 경험적 사실과 구별되는 매개체로서 뚜렷한 의미를 지닙니다.
예를 들면 힌두교 전통에서는 환생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환생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나 역시 의식이나 영혼이 금방 죽은 시신의 몸에 있다고 가정하는 일종의 심령 의식에 대한 문헌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환생을 인정한다면, 다른 몸에 영혼이 깃든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개인의 경험적 사실과 구별되는 일종의 독립적인 매개체가 있다고 인정하는 셈입니다. 대체적으로 불교를 따르지 않는 인도의 학파에서는 ‘자아’가 이러한 독립적인 매개체, 즉 아트만이라는 결론에 거의 이르렀습니다. 자아는 몸, 마음과는 구별됩니다. 대체적으로 불교 전통은 심신과 구별되는 자아, 아트만, 혹은 영혼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불교 학파에서는 ‘자아’, 혹은 ‘나’를 몸과 마음의 집합체로 이해해야 한다는 합의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나’, 혹은 ‘자아’라고 말할 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불교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많은 불교 학교들에서는 최종적으로 ‘자아’를 사람의 의식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합니다. 분석을 통해 우리는 몸이 임시적인 실재라는 것과 시간 속에서 계속되는 것이 실제로 사람의 의식이라는 것을 밝힐 수 있습니다.
물론 ‘자아’를 의식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불교 철학자들도 있습니다. 부다팔리타Buddhapalita와 찬드라키르티Chandrakirti와 같은 불교 철학자들은 영원하거나 지속되는 ‘자아’ 같은 것을 찾고 싶은 욕구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종류의 추론을 하는 것은 일면 무언가에 집착하려는 뿌리 깊은 욕구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자아’의 본질을 분석하면 아무런 결론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한 탐구가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입니다.
부다팔리타와 찬드라키르티가 주장했듯이 이는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언어와 경험에 대한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는 형이상학적인 자아에 대한 탐구입니다. 따라서 ‘자아’, 즉 사람, 매개체는 순전히 ‘자아’의 느낌을 경험함으로써만 이해되어야 합니다. ‘자아’와 사람을 이해하는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서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의 존재로서 자신의 존재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자아’와 사람은 몸과 마음에 의존하는 명칭으로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찬드라키르티는 『중도 안내Guide to the Middle Way(Madhyamakavatara)』에서 마차의 예를 들었습니다. 마차의 개념을 분석해 보면 마차를 형성하는 부분들과 관계없는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진정한 의미의 마차를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차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자아’, ‘자아’의 본질을 분석하면 개인의 존재를 형성하는 몸과 마음과 관계없는 ‘자아’를 찾을 수 없습니다. ‘자아’를 의존적으로 발생하는 존재로 이해하는 건 모든 지각 있는 중생을 이해하는 것으로도 확대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지각 있는 중생은 몸과 마음의 실재에 의존하는 명칭입니다. 몸과 정신의 실재는 존재의 정신적, 신체적 구성성분의 결합을 기초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