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이성적 행위자로 존중하는 길

 

 

 

 

스스로 결정을 하도록 한다고 해서, 어떤 방식으로건 인간의 선택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행태를 변경하기 위해 영향을 미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이성적인 토의와 비이성적인 수단이다. 어떤 사람이 마음먹고 있는 바를 하지 않도록 설득하기 위해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할 적절한 이유를 제시한다면, 그를 하나의 이성적 행위자로 대하는 셈이다. 이성적 행위자만이 제시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적 행위자가 이해하리라는 기대에서 그런 이유를 제시하더라도, 그의 존엄성은 전혀 손상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해 능력을 도외시하면서 부정직한 수단으로 그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려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나의 예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업 광고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을 생각해보자. 한 관점에 따르면, 광고는 소비자에게 제품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행위인바, 이런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소비자가 사고 싶어도 그 제품에 관하여 아는 바가 전혀 없으므로 사지 못할 것이다. 물론 광고자들은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제품을 내보이겠지만, 그렇다고 실상을 조작하는 건 아니다.

런데 이러한 시각은 너무나 장밋빛 안개 속에서 광고활동을 바라보는 것으로 생각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두 번째 견해에 따르면, 광고자들은 단순히 더 많은 제품들을 내다 팔기 위해 명백한 거짓말까지는 하지 않을지 몰라도,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제품의 이미지를 행복한 가족, 벌거벗은 여성, 산악 풍경 등에 결부하여 매출을 늘릴 수 있다면, 설령 이것들이 제품 가치나 기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해도 그리할 것이다. 칸트의 견해를 엄격히 따르자면, 두 번째 견해는 조작적이어서 나쁜 방법이다. 타당하지 않은 이유를 내세워 어떤 제품에 매력을 느끼게 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의 행태에 영향을 미치려 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이성적 행위자로 대하려면 이러저러한 행위를 하는 데 대하여 타당한 이유를 제시하고 그들이 스스로 마음을 정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이 사례가 의미하는 바는 사람을 이성적 행위자로 대하려면 다음 두 가지 기본적인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강제와 기만이 바로 그것이다. 두 가지 모두 나쁜 까닭은 강압과 기만을 당하는 사람이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하는 일을 강압과 기만을 실행하는 사람이 한다는 점이다. 어떻게 할지에 대한 자유로운 선택권을 소비자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광고자가 바라는 대로 소비자가 선택하도록 상황을 뒤틀어놓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강압하거나 강요하는 경우, 예를 들어, 총부리를 머리에 들이대고 수표를 발행하라고 밀어붙이는 건 위협을 당하는 사람이 그 상황에서 자유로이 선택할 수 없게 만드는 행위다. 누군가를 강압하는 행위는 그 사람에게 수표를 발행해달라고 요청하는 행위와는 다르다. 요청한다는 것은 요청받는 사람이 자신의 결정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강압한다고 해서 강압받는 사람이 반드시 어떤 행위를 하게 만드는 건 아니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즉 강압하는 사람은 강압 받는 사람에게 거부할 자유를 남겨주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요구를 거부할 경우, 끔찍스러운 결과가 빚어질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기만의 경우에는 이 희미한 한 줄기 자유마저 허용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돈을 빼앗기 위해 다른 사람을 기만한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할지 결정할 자유마저 허용하지 않는 셈이다. 기만당하는 사람이 실상을 제대로 안다면 선택하지 않을 행위를 자유로이 대응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려있으므로 선택하는 것이다. 기만당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유로운 선택을 한다고 믿기에 실상을 바탕으로 하는 자유로운 선택의 여지는 사라져버리고 만다.
칸트의 생각은 이 장의 처음에서 살펴본 두 가지 사례에서도 잘 들어맞는다. 두 사례에서 각 주인공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처지에 몰렸다고 불평한다. 첫 번째 사례, 경찰은 사람들을 한구석으로 몰아붙인다(사람들에게 한구석으로 가라고 요청하거나 왜 그들이 한구석으로 가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않고서). 두 번째 사례, 어떤 사람이 (예를 들어, 부모가) 상대에게 생각해볼 여유조차 주지 않고 마치 자신이 상대의 결정을 대신해줄 위치에 있다는 듯 행위를 한다. 칸트는 다른 이의 일에 참견하여 당사자의 뜻과 관계없이, 그리고 당사자가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을 무력화하면서 결정을 대신하는 행위(극단의 예를 들자면, 노예화)가 왜 나쁜지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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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와 융은 근친상간과 신비주의 문제에 관해 논쟁을 펼쳤다

 

 

 

 

 

 

 

 

 

 

융은 인생의 전환점이 될 만한 결정을 앞두고 있었다. 『리비도의 변용과 상징』 2부를 집필하면서 그는 무엇을 연구했을까? 리비도 개념과 근친상간의 금기에 대한 그의 이해는 프로이트와는 완전히 다른 노선이었다. 두 사람의 편지는 상승하는 위기감을 반영하고 있다.
사랑의 원형인 오시리스와 이시스는 남매이자 부부였다. 오시리스(의지)는 동생 세트(어둠)에게 살해당해 몸이 여러 조각으로 절단되었다. 이시스(지혜)는 흩어진
시체 조각을 모아 그를 부활시켰다. 이집트 군주들은 신에 대한 이러한 경외심을 표현하기 위해 남매의 결혼을 장려했다. 프로이트와 융은 근친상간과 신비주의 문제에 관해 논쟁을 펼쳤으며, 이는 결국 두 사람의 결별 원인이 되었다.

 

프로이트 교수님,
근친상간의 문제에 대한 저의 의견에 교수님의 반대 의견이 얼마나 강한가를 알고 나니 염려가 됩니다. 객관적인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는 저는 근친상간 개념에 대한 저의 해석을 밀고 나갈 수밖에 없기에, 이 딜레마에서 벗어날 방법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힘겹고 치열하게 이 문제 전체를 고찰한 후반부를 교수님께서 읽고 나면 제가 경솔한 근거나 회귀적 편견을 바탕으로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아실 것입니다 … 저는 근친상간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입증하려고 연구를 시작했지만 처음에 생각하던 것과 실제는 달랐습니다 … 논쟁이 될 만한 점에 대해서는 추후에 함께 이견을 좁혀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당분간 저는 저의 길을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스위스인들이 얼마나 고집이 센지 아시지요.
융 드림

 

친구에게,
리비도에 대한 문제는 시간을 두고 보기로 하세. 나는 자네의 변화가 어떤 속성인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고 그 동기 역시 전혀 알 수가 없네. 나에게 편견이 있음을 잘 알고 있으니 사정을 더 자세히 듣고 나면 자네의 변화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네. 우리가 서로의 의견에 즉각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학문적인 차이가 우리의 개인적 관계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네. 우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근본적인 의견 차가 있었다는 점이 떠오르는군.
프로이트로부터

 

 


프로이트 교수님께,
저의 변화는 변덕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을 지키기 위한 싸움의 문제입니다. 교수님을 존경하는 저의 마음도 저를 말릴 수는 없습니다 … 물론 저는 은인이신 교수님과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이 객관적으로 판단해주시고 노여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실질적으로 생각해볼 때 저는 제대로 평가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신분석학 운동을 위해 랑크Rank, 슈테켈Stekel, 아들러Adler 등이 한 일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했습니다. 저는 콤플렉스로 가득 찬 바보 취급 당하는 걸 거부하는 것 외에는 저항할 길이 없음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융 드림

 

 


융 박사에게,
나는 이 (리비도) 논문을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네 … 지금 나는 자네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엄청난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고 생각하네. 자네는 제 기능을 다한 콤플렉스들을 상징적으로 활용하여 모든 신비주의 수수께끼를 푼 것으로 보이네. 자네와 부인에게 안부를 전하며,
여전히 변치 않은 프로이트로부터

 

 


프로이트 교수님께,
무례한 표현일 수 있겠지만 교수님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자네는 제 기능을 다한 콤플렉스들을 상징적으로 활용하여 모든 신비주의 수수께끼를 푼 것으로 보인다”라고 쓰신 글은 저의 글을 크게 과소평가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친애하는 교수님,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하지만 그 문장은 교수님이 저를 폄하함으로써 저의 연구를 이해하려는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수님은 저의 시각을 일종의 정점인 것처럼 말씀하시지만 사실 이것은 산의 가장 아래 지점일 뿐입니다. 그러한 시각은 수년간 우리에게 자명하게 보였던 사실입니다. 다시 한 번, 솔직한 저의 표현에 사과드립니다. 저는 때때로 신경증의 잣대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지적으로 이해받고 싶은 순수한 인간적 욕망 때문에 괴롭습니다.
융 드림

 

 


융 박사에게,
객관적인 발언을 개인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버릇은 (퇴행적인) 인간의 특성일 뿐만 아니라 빈 사람 특유의 단점이라네. 그런 주장은 자네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네. 하지만 화를 내지 않고도 (자네가) 다음과 같은 실언을 고려할 만큼“ 객관적”인가? “심지어 아들러의 무리도 저를 당신과 한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프로이트로부터

 

프로이트 교수님께,
제가 진심으로 몇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교수님이 환자를 다루는 기법을 제자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큰 실수입니다 … 교수님은 도처를 다니시면서 주변의 모든 증후성 행동의 냄새를 맡음으로써 모든 사람을 자신의 과오를 부끄러워하며 이를 인정하는 아들과 딸들로 만들어버리시지요. 그사이 교수님은 아버지로서 최고의 자리에 멋지게 남게 되고요 … 친애하는 교수님, 저에게 증후성 행동이 있다는 교수님의 지속적인 주장을 저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행동은 교수님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시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행여나 부정을 탈까 하여 언급하고 싶지도 않지만 저는 절대로 신경증을 앓고 있지 않습니다! 제 행동을 스스로 분석한 결과 저는 예전보다 훨씬 더 나은 상태입니다. 환자가 자기분석을 통해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는지 잘 아실 겁니다. 교수님이 자신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서 추종자들의 아버지 역할을 멈춘 후 추종자들의 약점을 끊임없이 지적하는 대신 가끔씩 자신을 돌아보신다면, 저도 제 태도를 고치고 교수님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는 저의 죄를 단번에 뿌리 뽑겠습니다.
이 같은 기이한 우정의 징표에 분명히 노하시겠지만 이 방법이 교수님에게 이로우리라 생각합니다.
융 드림

1913년 3월 1일

 

회장 겸 박사님에게,
내가 추종자들을 환자처럼 대한다는 주장은 확실히 터무니없네. 나는 빈에서 정확히 그 반대의 이유로 비난받고 있으니 말이지 … 그 주장을 굽히지 않을 것이라면 이 편지에 답장할 필요도 없네. 앞으로는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어려워질 것이고 더욱이 편지를 주고받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상황이 될 테니 말이지. 자신이 신경증을 앓고 있음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우리 정신분석학자들의 관례이네. 하지만 비정상적으로 행동하면서 자신이 정상이라고 계속 외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병에 대한 통찰력이 부족하다고 의심할 근거가 되지. 그래서 나는 우리의 개인적 관계를 완전히 끊을 것을 제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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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자이나교의 이론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이처럼 제국의 정치적 지형이 급변하던 시절 인도의 종교 또한 완벽하게 탈바꿈했다. 자이나교와 불교가 엄청난 기세로 그 세를 늘려갔다. 백성들만이 두 종교에 의탁한 것은 아니었다. 찬드라굽타도 자이나교에서 마음의 안식을 얻었다. 그는 끔찍한 기근이 발생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기원전 298년에 아들 빈두사라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퇴위 후 인도 남부로 향한 찬드라굽타는 그곳에서 자이나교의 은둔자가 된다. 마이소르 주(현재의 명칭은 카르나타카 주)에 위치한 자이나교의 유적지 스라바나 벨골라Sravana Belgola에는 찬드라굽타의 말년에 관한 내용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이에 따르면 그는 말년에 출가하여 성지 스라바나 벨골라에서 고행을 하며 금식하다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수많은 나라들이 난립해 있던 광대한 영토를 한 손아귀에 움켜쥔 최고권력자였지만, 혜성같이 등장한 낮은 계층의 영웅이라는 점에서 찬드라굽타는 고대 인도의 정국에서는 매우 새로운 존재였다. 이같이 차별화되는 출신 덕에 그가 자이나교를 선택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이나교는 당시의 불교에 비하면 상당히 꾸밈없는 것을 지향하는 종교였다. 자이나교의 이상은 개인의 생존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탈인간적이고 추상적인 것과 관련이 있었다. 자이나교의 교리에 따르면 금욕생활을 지속하는 것만이 현세의 고통에서 영혼을 해방시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자이나교와 불교 둘 다 아리아인의 문화에서 비롯된 종교는 아니었다. 물론 인도인의 장례문화와 브라만이 지독히도 싫어했던 금욕주의도 마찬가지였다. 아리아인 고위 성직자들은 마가다 왕국 곳곳에 생겨난 둥그런 무덤을 “악마에 홀린 사람들이 하는 짓”이라고 혹평했다. 그들은 사각형만이 신이 좋아하는 형태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둥그런 형태의 무덤과 사리탑은 불교도가 있는 모든 지역에 속속 생겨났다. 힌두교도와 달리 불교도는 이런 시설물을 종교적 헌신의 상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브라만의 반발은 금욕사상에 대한 그들의 경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브라만은 엄격한 금욕생활을 했던 자이나교 승려들의 삶에 엄청난 불쾌감을 표시했다.
인더스 문명에서는 요가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므로 인도의 금욕주의가 매우 오래된 사상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가 자세를 한 신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 인더스 인장만으로는 이런 금욕사상이 고대 인도의 토착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속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이나교가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는 최초로 금욕사상을 펼친 종교라는 점만은 확실하다. 붓다와 동시대인이
었던 자이나교의 성인 마하비라는 네 단계의 명상을 거치는 동안 깨달음을 얻어 윤회의 업보를 없애고 해탈했다고 한다. 자이나교의 이론에 따르면 첫 번째 단계에서는 영혼이 하나의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옮겨간다. 두 번째 단계에 이르러서야 영혼은 이동을 멈추고 고요히 정지해 있게 되며, 세 번째 단계와 네 번째 단계를 거치면서 육신과 영혼이 완벽한 정지상태에 이르게 되어 그때서야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자이나교의 참선을 통한 해탈의 개념이 인도인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는 『마하바라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하바라타』에는 참선을 하는 수도자는 “마음을 굳건히 하여 미동도 없이 놓인 돌과 같이 고요해야 한다. 기둥과 같은 미세한 떨림도 없어야 하며 산과 같이 꿈쩍도 하지 않는 완벽한 정지상태에 도달해야 한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붓다는 이러한 자이나교의 이론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그는 욕망이나 의도를 인간의 중요한 속성으로 여겼다. 자이나교승려들이 금욕을 통해 정신과 신체를 억압하는 것과 달리, 불교승려들이 정신적인 훈련을 통해 욕망과 두려움을 없애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불교도들의 목표는 속세의 온갖 복잡다단한 문제들로부터 마음이 해방되는 것이었다. 해탈을 얻는 전혀 새로운 방식이 등장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실제로 작용하는 현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을 만들어낸 이면의 동력이 중요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자이나교의 이론가들은 불교의 이런 가르침을 두고 불교의 윤회개념에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아냥거렸다. 그들은 불교도가 아이를 구워먹는 사례를 들먹이며 불교의 이론적 오류를 밝혀내려고 했다. 자이나교의 이론가들은 불교 이론에 따르면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아이를 구워 먹었다면 아무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니냐며 빈정거렸다. 이 일화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자이나교도는 영혼이 물질에 구속된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영계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으로 물질계를 떠나 우주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존재가 되어야만 윤회에서 벗어난 해탈을 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또한 자이나교승려들은 살생을 금기시했다. 그들은 우연히 벌레를 삼켜 업을 쌓는 일을 막기 위해 베일로 입을 가리고 다니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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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디스트의 폭력성

 

 

 

 

 

 

세계의 질서에 대한 도전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첫 번째 접근법은, 1991년 출간된 『민족과 국가 그리고 공포』46에서 재래식 군사전략 및 국가관계에 국한되지 않고 문제를 짚어본 배리 부잔이 소개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9・11 테러 사태가 벌어지자 사람들은 지하드운동의 비정규전이라는 새로운 양상의 전쟁도 안보 연구에서 다뤄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테러리즘 폭력을 색다른 시각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지하드운동을 상대로 벌인 전쟁의 복잡성은 전문가들도 대부분 소화하지 못한 실정이다. 부시에서 오바마 대통령으로 행정부가 바뀌긴 했어도 이해도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논객과 정책입안자들은 신개념 전쟁을 “폭동” 으로 축소해버린 데다 종교와 문화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구사한 미 군사전략은 이라크 전쟁에서 개발했던 대게릴라 전술에 크게 의존했다. 이 전술은 탱크 몇 대를 보내는 것보다는 낫지만— 물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문제의 일부를 해결할 뿐이다. 전쟁은 이슬람교와 서방세계의 문명 사이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지만 지하드운동은 난폭한 이슬람주의자들이 벌인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전사지 “극단주의 범죄자 가” 아니다.
통계에 밝은 정치학자인 로버트 파프47는 2005년에 쓴 『승리를 위해 죽다』에서 지하드운동을 종교와는 거의 무관한 사회운동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지하드운동과, 그것의 근간이 되는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정치화된 세계 종교의 개념은 통계수치로 감을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 수단이 세계 혁명의 비전을 불러일으키는 경위를 이해하려면 이슬람교가 꾸며낸 무슬림 공동체로 불리고 이상적인 공동체가 서방세계에 맞서 동원되는 방식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정치적 이슬람교가 상상 속의 무슬림 공동체를 비정규전이라는 지하드운동의 이데올로기로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인가? 통계적인 방법으로는 답을 제시할 수 없다.
세속적인 목적을 추구하면서도 종교를 운운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은 소수의 무슬림 공동체를 구성하나 조직력이 탄탄하고 무기도 잘 갖추었으며 메시지가 다수의 관심을 자극한다. 적은 머릿수에 비해 전 세계 네트워크의 효율성과 기동력은 탁월하다. 이 집단은 비정규전으로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면 이를 진압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나는 이 책에서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 및 지하드운동과 고전 지하드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제기해왔다. 또한 이라크에서 불거진 시아파・수니파 무슬림 간의 분쟁을 감안해볼 때 수니파와 시아파 무슬림의 차이는 그나마 친숙한 편이다. 실은, 이슬람 내부에도 정치화될 수 있는 종교적 다양성이 더러 존재한다. 이 같은 정치화로 서로 다른 종파의 무슬림 공동체에서 분쟁이 벌어지고 있다. 아프리카계 이슬람교는 동남아시아의 종파와는 다르며, 인도 아대륙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슬람교의 원류인 아랍 종파는 종교적・문화적 다양성 면에서 월등히 앞설 것이다. 획일적으로 통일된 이슬람주의도 없다.
이슬람주의 지하드운동은 수니파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되었음에도 이슬람교의 다양성을 부인하며 모든 무슬림 신도를 지하드 전사로 통일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겉과 속이 다르게 다른 종파의 사상을 차용하기도 한다. 예컨대, 초기 무슬림 형제단은 수니파 이슬람교와는 거리가 먼 자살테러를 자행한 적이 없으나, 최근 수니파 이슬람주의자들은 시아파의 혁신을 채택키로 했다. 그들은 시아파의 개념인 위장(타키야)을 차용하여 기만(이함) 전술에 새로운 모습을 부여했다. 각 종파만의 정신이 있겠지만, 수니파 이슬람주의 조직은 시아파의 순교사상에 집착하고 테러를 희생tadhiya(타디야)이라고 하며 정당성마저 차용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이슬람주의인 비국가 주동세력이 다양한 문화의 언어로 종교화된 정치를 거론한다는 것이다. 새뮤얼 헌팅턴이 태어나기 훨씬 전에도 이슬람주의자들은 독자적인 “문명의 충돌” 을 발전시켜 왔다. 국제관계 분야는 이슬람주의자들의 전례를 이해하고 국가보다는 종교와 문화, 민족성 및 문명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문명은 세계정치의 주역이 될 수 없다. 헌팅턴도 이 문제를 의식한 탓에 “핵심 국가” 가 각 문명을 이끌 수 있다고 하면 이를 적당히 넘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 구조가 이슬람교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슬람 민족국가로 알려진 56개국 중 무슬림 공동체 전체를 이끌 수 있는 곳이 전혀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말이다. 게다가 이 집단에 든 일부 불량국가들 중에는 세계정치에서 지하드운동의중심 명분이 되는 것이 없다. 이란에서 국가 지원을 받는 지하드운동이 이에 가장 근접하지만 지하드운동은 그것이 없이도 번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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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유를 어떻게 인식할까

 

 

 

 

 

 

 

칸트가 이 사례를 든 까닭은 인간이 서로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가령 폭군이 다스리는 왕국에 산다고 하자. 어느 날 폭군이 갑자기 나를 잡아가더니 허위진술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한다. 폭군에 대항하여 반기를 들고 일어난 용감하고 덕망 있는 한 투사를 처형하려는 구실을 마련하는 것이다. 허위진술에 서명하여 죄 없는 반란자를 없애려는 폭군의 음모를 도와주느냐, 아니면 죽임을 당하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내가 짐승이라면 자기 보존의 본능에 따라 거짓말을 하고 살 길을 찾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생각할 때 나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고, 거짓말해야 할 까닭도 없다. 나는 다만 자기 보존의 강력한 본능에 이끌려 자기 기만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일 뿐이다. 자유로운 선택의 길은 열려 있지 않은 듯하다. 바로 이 대목에서 사르트르가 말하는 ‘나쁜 신념’의 죄를 저지를 참이다. 사실 나에게는 모든 선택의 길이 항상 열려 있는데도,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구실을 내세워 일을 수월하게 풀어보려는 것이다.
여기서 칸트는 인간이 불합리하게 행위할 때가 있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합리적으로 행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본능에 떠밀려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고 말하는 건 다만 스스로 마음 편히 생각하려고 내세우는 나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사실은 인간이 어떤 일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앞에 놓인 여러 행위들의 대안이 지닌 장단점을 저울질할 능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그 밖의 자연 만물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지닌 자유는 (사르트르가 그랬듯이) 오히려 부담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성적 행위자에게는 자연의 다른 부분들이 누리지 못하는 도덕적 지위와 존엄이 주어져 있다. 칸트의 이러한 견해는 이성적 존재는 신성하기에 그를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말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난다. 이성적 행위자는 동물이나 어린아이와는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 이성적 행위자에 걸맞은 대우를 해야 한다. 이것이 대체 무슨 뜻일까? 행위의 대안들을 비교하면서 동물이나 어린아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선택하거나 결정할 수 있다는 인간이란 존재를 어떻게 대우하는 것이 합당할까? 그 답은 스스로 선택하도록 이성적인 인간을 그냥 놔두라는 것이다. 이성적 행위자가 어떻게 행위할지 스스로 정하도록 허용하는 것만이 스스로 선택할 능력이 있는 인간을 그가
지닌 능력의 중요성에 걸맞게 대우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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