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이성적 행위자로 존중하는 길

 

 

 

 

스스로 결정을 하도록 한다고 해서, 어떤 방식으로건 인간의 선택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행태를 변경하기 위해 영향을 미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이성적인 토의와 비이성적인 수단이다. 어떤 사람이 마음먹고 있는 바를 하지 않도록 설득하기 위해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할 적절한 이유를 제시한다면, 그를 하나의 이성적 행위자로 대하는 셈이다. 이성적 행위자만이 제시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적 행위자가 이해하리라는 기대에서 그런 이유를 제시하더라도, 그의 존엄성은 전혀 손상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해 능력을 도외시하면서 부정직한 수단으로 그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려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나의 예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업 광고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을 생각해보자. 한 관점에 따르면, 광고는 소비자에게 제품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행위인바, 이런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소비자가 사고 싶어도 그 제품에 관하여 아는 바가 전혀 없으므로 사지 못할 것이다. 물론 광고자들은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제품을 내보이겠지만, 그렇다고 실상을 조작하는 건 아니다.

런데 이러한 시각은 너무나 장밋빛 안개 속에서 광고활동을 바라보는 것으로 생각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두 번째 견해에 따르면, 광고자들은 단순히 더 많은 제품들을 내다 팔기 위해 명백한 거짓말까지는 하지 않을지 몰라도,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제품의 이미지를 행복한 가족, 벌거벗은 여성, 산악 풍경 등에 결부하여 매출을 늘릴 수 있다면, 설령 이것들이 제품 가치나 기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해도 그리할 것이다. 칸트의 견해를 엄격히 따르자면, 두 번째 견해는 조작적이어서 나쁜 방법이다. 타당하지 않은 이유를 내세워 어떤 제품에 매력을 느끼게 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의 행태에 영향을 미치려 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이성적 행위자로 대하려면 이러저러한 행위를 하는 데 대하여 타당한 이유를 제시하고 그들이 스스로 마음을 정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이 사례가 의미하는 바는 사람을 이성적 행위자로 대하려면 다음 두 가지 기본적인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강제와 기만이 바로 그것이다. 두 가지 모두 나쁜 까닭은 강압과 기만을 당하는 사람이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하는 일을 강압과 기만을 실행하는 사람이 한다는 점이다. 어떻게 할지에 대한 자유로운 선택권을 소비자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광고자가 바라는 대로 소비자가 선택하도록 상황을 뒤틀어놓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강압하거나 강요하는 경우, 예를 들어, 총부리를 머리에 들이대고 수표를 발행하라고 밀어붙이는 건 위협을 당하는 사람이 그 상황에서 자유로이 선택할 수 없게 만드는 행위다. 누군가를 강압하는 행위는 그 사람에게 수표를 발행해달라고 요청하는 행위와는 다르다. 요청한다는 것은 요청받는 사람이 자신의 결정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강압한다고 해서 강압받는 사람이 반드시 어떤 행위를 하게 만드는 건 아니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즉 강압하는 사람은 강압 받는 사람에게 거부할 자유를 남겨주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요구를 거부할 경우, 끔찍스러운 결과가 빚어질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기만의 경우에는 이 희미한 한 줄기 자유마저 허용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돈을 빼앗기 위해 다른 사람을 기만한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할지 결정할 자유마저 허용하지 않는 셈이다. 기만당하는 사람이 실상을 제대로 안다면 선택하지 않을 행위를 자유로이 대응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려있으므로 선택하는 것이다. 기만당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유로운 선택을 한다고 믿기에 실상을 바탕으로 하는 자유로운 선택의 여지는 사라져버리고 만다.
칸트의 생각은 이 장의 처음에서 살펴본 두 가지 사례에서도 잘 들어맞는다. 두 사례에서 각 주인공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처지에 몰렸다고 불평한다. 첫 번째 사례, 경찰은 사람들을 한구석으로 몰아붙인다(사람들에게 한구석으로 가라고 요청하거나 왜 그들이 한구석으로 가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않고서). 두 번째 사례, 어떤 사람이 (예를 들어, 부모가) 상대에게 생각해볼 여유조차 주지 않고 마치 자신이 상대의 결정을 대신해줄 위치에 있다는 듯 행위를 한다. 칸트는 다른 이의 일에 참견하여 당사자의 뜻과 관계없이, 그리고 당사자가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을 무력화하면서 결정을 대신하는 행위(극단의 예를 들자면, 노예화)가 왜 나쁜지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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