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디스트의 폭력성

 

 

 

 

 

 

세계의 질서에 대한 도전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첫 번째 접근법은, 1991년 출간된 『민족과 국가 그리고 공포』46에서 재래식 군사전략 및 국가관계에 국한되지 않고 문제를 짚어본 배리 부잔이 소개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9・11 테러 사태가 벌어지자 사람들은 지하드운동의 비정규전이라는 새로운 양상의 전쟁도 안보 연구에서 다뤄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테러리즘 폭력을 색다른 시각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지하드운동을 상대로 벌인 전쟁의 복잡성은 전문가들도 대부분 소화하지 못한 실정이다. 부시에서 오바마 대통령으로 행정부가 바뀌긴 했어도 이해도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논객과 정책입안자들은 신개념 전쟁을 “폭동” 으로 축소해버린 데다 종교와 문화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구사한 미 군사전략은 이라크 전쟁에서 개발했던 대게릴라 전술에 크게 의존했다. 이 전술은 탱크 몇 대를 보내는 것보다는 낫지만— 물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문제의 일부를 해결할 뿐이다. 전쟁은 이슬람교와 서방세계의 문명 사이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지만 지하드운동은 난폭한 이슬람주의자들이 벌인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전사지 “극단주의 범죄자 가” 아니다.
통계에 밝은 정치학자인 로버트 파프47는 2005년에 쓴 『승리를 위해 죽다』에서 지하드운동을 종교와는 거의 무관한 사회운동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지하드운동과, 그것의 근간이 되는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정치화된 세계 종교의 개념은 통계수치로 감을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 수단이 세계 혁명의 비전을 불러일으키는 경위를 이해하려면 이슬람교가 꾸며낸 무슬림 공동체로 불리고 이상적인 공동체가 서방세계에 맞서 동원되는 방식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정치적 이슬람교가 상상 속의 무슬림 공동체를 비정규전이라는 지하드운동의 이데올로기로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인가? 통계적인 방법으로는 답을 제시할 수 없다.
세속적인 목적을 추구하면서도 종교를 운운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은 소수의 무슬림 공동체를 구성하나 조직력이 탄탄하고 무기도 잘 갖추었으며 메시지가 다수의 관심을 자극한다. 적은 머릿수에 비해 전 세계 네트워크의 효율성과 기동력은 탁월하다. 이 집단은 비정규전으로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면 이를 진압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나는 이 책에서 이슬람주의와 이슬람교 및 지하드운동과 고전 지하드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제기해왔다. 또한 이라크에서 불거진 시아파・수니파 무슬림 간의 분쟁을 감안해볼 때 수니파와 시아파 무슬림의 차이는 그나마 친숙한 편이다. 실은, 이슬람 내부에도 정치화될 수 있는 종교적 다양성이 더러 존재한다. 이 같은 정치화로 서로 다른 종파의 무슬림 공동체에서 분쟁이 벌어지고 있다. 아프리카계 이슬람교는 동남아시아의 종파와는 다르며, 인도 아대륙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슬람교의 원류인 아랍 종파는 종교적・문화적 다양성 면에서 월등히 앞설 것이다. 획일적으로 통일된 이슬람주의도 없다.
이슬람주의 지하드운동은 수니파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되었음에도 이슬람교의 다양성을 부인하며 모든 무슬림 신도를 지하드 전사로 통일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겉과 속이 다르게 다른 종파의 사상을 차용하기도 한다. 예컨대, 초기 무슬림 형제단은 수니파 이슬람교와는 거리가 먼 자살테러를 자행한 적이 없으나, 최근 수니파 이슬람주의자들은 시아파의 혁신을 채택키로 했다. 그들은 시아파의 개념인 위장(타키야)을 차용하여 기만(이함) 전술에 새로운 모습을 부여했다. 각 종파만의 정신이 있겠지만, 수니파 이슬람주의 조직은 시아파의 순교사상에 집착하고 테러를 희생tadhiya(타디야)이라고 하며 정당성마저 차용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이슬람주의인 비국가 주동세력이 다양한 문화의 언어로 종교화된 정치를 거론한다는 것이다. 새뮤얼 헌팅턴이 태어나기 훨씬 전에도 이슬람주의자들은 독자적인 “문명의 충돌” 을 발전시켜 왔다. 국제관계 분야는 이슬람주의자들의 전례를 이해하고 국가보다는 종교와 문화, 민족성 및 문명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문명은 세계정치의 주역이 될 수 없다. 헌팅턴도 이 문제를 의식한 탓에 “핵심 국가” 가 각 문명을 이끌 수 있다고 하면 이를 적당히 넘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 구조가 이슬람교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슬람 민족국가로 알려진 56개국 중 무슬림 공동체 전체를 이끌 수 있는 곳이 전혀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말이다. 게다가 이 집단에 든 일부 불량국가들 중에는 세계정치에서 지하드운동의중심 명분이 되는 것이 없다. 이란에서 국가 지원을 받는 지하드운동이 이에 가장 근접하지만 지하드운동은 그것이 없이도 번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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