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유를 어떻게 인식할까

칸트가 이 사례를 든 까닭은 인간이 서로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가령 폭군이 다스리는 왕국에 산다고 하자. 어느 날 폭군이 갑자기 나를 잡아가더니 허위진술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한다. 폭군에 대항하여 반기를 들고 일어난 용감하고 덕망 있는 한 투사를 처형하려는 구실을 마련하는 것이다. 허위진술에 서명하여 죄 없는 반란자를 없애려는 폭군의 음모를 도와주느냐, 아니면 죽임을 당하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내가 짐승이라면 자기 보존의 본능에 따라 거짓말을 하고 살 길을 찾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생각할 때 나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고, 거짓말해야 할 까닭도 없다. 나는 다만 자기 보존의 강력한 본능에 이끌려 자기 기만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일 뿐이다. 자유로운 선택의 길은 열려 있지 않은 듯하다. 바로 이 대목에서 사르트르가 말하는 ‘나쁜 신념’의 죄를 저지를 참이다. 사실 나에게는 모든 선택의 길이 항상 열려 있는데도,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구실을 내세워 일을 수월하게 풀어보려는 것이다.
여기서 칸트는 인간이 불합리하게 행위할 때가 있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합리적으로 행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본능에 떠밀려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고 말하는 건 다만 스스로 마음 편히 생각하려고 내세우는 나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사실은 인간이 어떤 일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앞에 놓인 여러 행위들의 대안이 지닌 장단점을 저울질할 능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그 밖의 자연 만물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지닌 자유는 (사르트르가 그랬듯이) 오히려 부담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성적 행위자에게는 자연의 다른 부분들이 누리지 못하는 도덕적 지위와 존엄이 주어져 있다. 칸트의 이러한 견해는 이성적 존재는 신성하기에 그를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말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난다. 이성적 행위자는 동물이나 어린아이와는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 이성적 행위자에 걸맞은 대우를 해야 한다. 이것이 대체 무슨 뜻일까? 행위의 대안들을 비교하면서 동물이나 어린아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선택하거나 결정할 수 있다는 인간이란 존재를 어떻게 대우하는 것이 합당할까? 그 답은 스스로 선택하도록 이성적인 인간을 그냥 놔두라는 것이다. 이성적 행위자가 어떻게 행위할지 스스로 정하도록 허용하는 것만이 스스로 선택할 능력이 있는 인간을 그가
지닌 능력의 중요성에 걸맞게 대우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