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와 융은 근친상간과 신비주의 문제에 관해 논쟁을 펼쳤다

 

 

 

 

 

 

 

 

 

 

융은 인생의 전환점이 될 만한 결정을 앞두고 있었다. 『리비도의 변용과 상징』 2부를 집필하면서 그는 무엇을 연구했을까? 리비도 개념과 근친상간의 금기에 대한 그의 이해는 프로이트와는 완전히 다른 노선이었다. 두 사람의 편지는 상승하는 위기감을 반영하고 있다.
사랑의 원형인 오시리스와 이시스는 남매이자 부부였다. 오시리스(의지)는 동생 세트(어둠)에게 살해당해 몸이 여러 조각으로 절단되었다. 이시스(지혜)는 흩어진
시체 조각을 모아 그를 부활시켰다. 이집트 군주들은 신에 대한 이러한 경외심을 표현하기 위해 남매의 결혼을 장려했다. 프로이트와 융은 근친상간과 신비주의 문제에 관해 논쟁을 펼쳤으며, 이는 결국 두 사람의 결별 원인이 되었다.

 

프로이트 교수님,
근친상간의 문제에 대한 저의 의견에 교수님의 반대 의견이 얼마나 강한가를 알고 나니 염려가 됩니다. 객관적인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는 저는 근친상간 개념에 대한 저의 해석을 밀고 나갈 수밖에 없기에, 이 딜레마에서 벗어날 방법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힘겹고 치열하게 이 문제 전체를 고찰한 후반부를 교수님께서 읽고 나면 제가 경솔한 근거나 회귀적 편견을 바탕으로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아실 것입니다 … 저는 근친상간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입증하려고 연구를 시작했지만 처음에 생각하던 것과 실제는 달랐습니다 … 논쟁이 될 만한 점에 대해서는 추후에 함께 이견을 좁혀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당분간 저는 저의 길을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스위스인들이 얼마나 고집이 센지 아시지요.
융 드림

 

친구에게,
리비도에 대한 문제는 시간을 두고 보기로 하세. 나는 자네의 변화가 어떤 속성인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고 그 동기 역시 전혀 알 수가 없네. 나에게 편견이 있음을 잘 알고 있으니 사정을 더 자세히 듣고 나면 자네의 변화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네. 우리가 서로의 의견에 즉각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학문적인 차이가 우리의 개인적 관계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네. 우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근본적인 의견 차가 있었다는 점이 떠오르는군.
프로이트로부터

 

 


프로이트 교수님께,
저의 변화는 변덕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을 지키기 위한 싸움의 문제입니다. 교수님을 존경하는 저의 마음도 저를 말릴 수는 없습니다 … 물론 저는 은인이신 교수님과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이 객관적으로 판단해주시고 노여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실질적으로 생각해볼 때 저는 제대로 평가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신분석학 운동을 위해 랑크Rank, 슈테켈Stekel, 아들러Adler 등이 한 일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했습니다. 저는 콤플렉스로 가득 찬 바보 취급 당하는 걸 거부하는 것 외에는 저항할 길이 없음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융 드림

 

 


융 박사에게,
나는 이 (리비도) 논문을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네 … 지금 나는 자네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엄청난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고 생각하네. 자네는 제 기능을 다한 콤플렉스들을 상징적으로 활용하여 모든 신비주의 수수께끼를 푼 것으로 보이네. 자네와 부인에게 안부를 전하며,
여전히 변치 않은 프로이트로부터

 

 


프로이트 교수님께,
무례한 표현일 수 있겠지만 교수님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자네는 제 기능을 다한 콤플렉스들을 상징적으로 활용하여 모든 신비주의 수수께끼를 푼 것으로 보인다”라고 쓰신 글은 저의 글을 크게 과소평가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친애하는 교수님,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하지만 그 문장은 교수님이 저를 폄하함으로써 저의 연구를 이해하려는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수님은 저의 시각을 일종의 정점인 것처럼 말씀하시지만 사실 이것은 산의 가장 아래 지점일 뿐입니다. 그러한 시각은 수년간 우리에게 자명하게 보였던 사실입니다. 다시 한 번, 솔직한 저의 표현에 사과드립니다. 저는 때때로 신경증의 잣대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지적으로 이해받고 싶은 순수한 인간적 욕망 때문에 괴롭습니다.
융 드림

 

 


융 박사에게,
객관적인 발언을 개인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버릇은 (퇴행적인) 인간의 특성일 뿐만 아니라 빈 사람 특유의 단점이라네. 그런 주장은 자네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네. 하지만 화를 내지 않고도 (자네가) 다음과 같은 실언을 고려할 만큼“ 객관적”인가? “심지어 아들러의 무리도 저를 당신과 한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프로이트로부터

 

프로이트 교수님께,
제가 진심으로 몇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교수님이 환자를 다루는 기법을 제자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큰 실수입니다 … 교수님은 도처를 다니시면서 주변의 모든 증후성 행동의 냄새를 맡음으로써 모든 사람을 자신의 과오를 부끄러워하며 이를 인정하는 아들과 딸들로 만들어버리시지요. 그사이 교수님은 아버지로서 최고의 자리에 멋지게 남게 되고요 … 친애하는 교수님, 저에게 증후성 행동이 있다는 교수님의 지속적인 주장을 저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행동은 교수님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시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행여나 부정을 탈까 하여 언급하고 싶지도 않지만 저는 절대로 신경증을 앓고 있지 않습니다! 제 행동을 스스로 분석한 결과 저는 예전보다 훨씬 더 나은 상태입니다. 환자가 자기분석을 통해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는지 잘 아실 겁니다. 교수님이 자신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서 추종자들의 아버지 역할을 멈춘 후 추종자들의 약점을 끊임없이 지적하는 대신 가끔씩 자신을 돌아보신다면, 저도 제 태도를 고치고 교수님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는 저의 죄를 단번에 뿌리 뽑겠습니다.
이 같은 기이한 우정의 징표에 분명히 노하시겠지만 이 방법이 교수님에게 이로우리라 생각합니다.
융 드림

1913년 3월 1일

 

회장 겸 박사님에게,
내가 추종자들을 환자처럼 대한다는 주장은 확실히 터무니없네. 나는 빈에서 정확히 그 반대의 이유로 비난받고 있으니 말이지 … 그 주장을 굽히지 않을 것이라면 이 편지에 답장할 필요도 없네. 앞으로는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어려워질 것이고 더욱이 편지를 주고받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상황이 될 테니 말이지. 자신이 신경증을 앓고 있음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우리 정신분석학자들의 관례이네. 하지만 비정상적으로 행동하면서 자신이 정상이라고 계속 외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병에 대한 통찰력이 부족하다고 의심할 근거가 되지. 그래서 나는 우리의 개인적 관계를 완전히 끊을 것을 제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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