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도서출판 지와 사랑)

 

 

 

 

유학의 종교성에 대한 논의

 

중국 고대인에게는 독립된 하느님의 개념이 있었지만 후대 유학자들은 이를 부정했다. 그들은 줄곧 천인합일의 종합적 사유방식을 제창함으로써 하늘과 인간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래서 유학에는 신의 개념이 없고 종교를 형성할 수 없었다. 중국 역사서 24사二十四史(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로 인정되는 24종류의 사서. 『신원사新元史』와 『청사고清史稿』를 더하여 ‘25사’나 ‘26사’로 나타내기도 한다)에는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연구하고 옛날과 현재의 변화를 밝히는 것을 임무로 삼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적혀 있다. 이 정도로 천인합일은 중국에서 일관되게 관철된 사상이다. 그래서 중국에는 자체의 종교사가 없다. 유학의 종교성은 하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의 내적 자아와 외적 육체의 관계를 어떻게 잘 처리하는가를 골자로 하는 도덕에서 드러난다.
유학이 종교인가 하는 문제는 20세기 학술계를 가장 뜨겁게 달군 논쟁들 가운데 하나로 지금까지도 학자들이 일치된 합의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잡지 『문사철文史哲』은 1998년에 학자들 장다이네(장대련張岱年), 지셴린, 차이상쓰(채상사蔡尙思), 장리원(장립문張立文), 리선(이신李申), 궈지융(곽제융郭齊勇) 여섯 명을 초청하여 담론의 장을 마련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견해를 발표했지만 의견 차가 너무 컸다. 유학을 종교로 인정한 학자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 학자도 있었다. 유학은 종교이면서 종교가 아니라고 말한 학자도 있었다. 차이상쓰는 유학은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훗날 2001년 7월 28일 『문회보文滙報』에 「유학은 종교」라는 소논문을 발표하여 과거 자신의 견해를 수정했다. 그는 중국에만 있는 공자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예교禮敎이며 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늘에 대한 공경, 임금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효도라고 했다. 그래서 공자의 사상이 종교가 아니라고 한 과거 자신의 말이 틀렸음을 인정했다.
최근 몇몇 학자들이 유학의 종교화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이는 유학을 시장경제 체제의 요구에 부합하는 종교로 전환해 시장경제를 주도하는 핵심적인 가치관으로 삼으려는 데 목적이 있다. 마르크스와 베버가 개신교가 자본주의 발전을 이끌었다고 제기한 것처럼 말이다. 이들의 노력이 현실화 될 것인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것이다.
몇 년 전, 대만의 학자 황쥔지에(황준걸黃俊杰)는 『유학의 종교성 함의탐구』라는 책을 출판했다. 기본 관점은 유학이 서양의 종교와는 다른 짙은 종교성과 종교적 감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학이 종교인가 하는 문제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식으로 결론을 내릴 문제가 아니라 먼저 종교의 개념을 따진 뒤에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필자도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실 이 문제의 본질은 인간이라는 주체 외에 독립된 하느님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다. 유학의 종교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지고지상한 신을 부정하기 때문에 신학적 의미로 볼 때 유학은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학을 종교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도덕에서 출발하여 이론을 세운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예교론자이다. 지금부터 유학의 종교성을 논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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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가 청운의 뜻을 품고 미국에 가다

 

 

 

안창호는 1899년에 평안남도 강서江西군 동진면 암화리에 세운 초등과정의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하여 평소 그의 지론인 점진적 민족개조사업에 투신했습니다. 그는 황무지 개척 사업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점진학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 사립 초등학교이자 최초의 남녀공학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구국운동救國運動을 전개했습니다. 그는 자아혁신과 자기개조를 통해서 민족혁신과 민족개조를 이룩하려면 무엇보다도 교육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여 고향에 점진학교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학교의 명칭은 점진적으로 공부와 수양을 계속하여 민족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그의 점진론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가 지은 교가校歌 속에도 그 정신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점진 점진 점진 기쁜 마음과

점진 점진 점진 기쁜 노래로

학과를 전문하되 낙심 말고

하겠다 하세 우리 직무를 다.

 

이는 그가 평소에 강조하던 무실역행사상務實力行思想을 그대로 담은 것으로,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가지고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907년에는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여 점진적으로 대성大成하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뜻을 표현했습니다.

안창호가 청운의 뜻을 품고 미국에 상륙한 때는 22세의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1902년 부인 이혜련과 함께 인천항을 출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습니다. 이때 중간 경유지였던 하와이 근해에서 새벽안개 속에 희망의 표상처럼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의 실루엣을 보고 그의 호號를 도산島山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안창호는 길에서 한인 두 사람이 상투를 마주 잡고 싸우는 광경을 미국인들이 재미있게 보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뛰어들어 싸움을 말리고 싸우는 연유를 물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 근방에 사는 중국 교민들에게 인삼 행상을 하던 이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협정한 판매 지역을 범했다는 이유로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 재류하는 동포를 두루 찾아 그 생활 상태를 조사했습니다. 그는 재류 동포가 문명한 국민다운 생활을 하도록 노력하리라 결심하고 그 뜻을 동지로 동행한 이강, 김성무, 정재관 등에게 전했습니다. 세 사람은 자신들이 안창호의 생활비를 벌 터이니 안창호더러는 동포 지도에 전력하라고 그를 격려했습니다. 이광수는 이것이 그가 “몸을 바쳐서 민족운동을 한 첫날이었다. 빛나는 정치운동이나 혁명운동이 아니라 만리타국에 유리하여 와있는 불과 몇 백 명의 무식한 동포의 계몽을 위하여 청운의 웅지雄志를 버리고 나서는 22세의 청년 안창호를 상상할 것이다”라고 적었습니다.

안창호는 동포의 불결한 숙소를 몸소 청결히 하고 미화했습니다. 동포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집 청소와 주변 쓰레기 정리, 겨울에는 눈도 쓸어주었습니다. 이것이 몇 달 지나지 않아서 동포의 생활을 변화시켰습니다. 외양만 변한 것이 아니라 동포의 정신생활에까지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동포의 신뢰를 얻게 되자 안창호는 인삼 행상의 구역을 공평하게 정하되 한 달씩 서로 구역을 교환하는 것과, 인삼의 가격을 협정하여 서로 경쟁하여 값을 떨어뜨리게 하지 말 것을 제의했습니다. 안창호는 동포에게 협동과 준법遵法의 훈련을 하여 인삼 행상들을 단합시켜 계契를 만들어 매입과 매출을 하나의 큰 조직에서 관리함으로써 신용과 이익의 안전을 보장하려고 했습니다. 또한 한인의 노동력을 통합, 공급하는 기관을 만들어서 미국인의 노동력 주문을 받고 노동자들의 최저 임금을 보장하고 또 실직이 없게 하려고 했습니다. 이를 두고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여기서도 도산은 그의 평생의 사업 원리를 적용하였으니, 그것은 점진적으로 민중의 자각을 기다려서 하는 것, 민중 자신 중에서 지도자를 발견하여 그로 하여금 민심을 결합케 하고 결코 도산 자신이 지도자의 자리에 서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세우고 <공립신보>를 발간하고 다시 확대하여 미주국민회가 되고 <신한민보新韓民報>라는 신문이 될 때에도 도산은 늘 배후에 있었다. 그가 국민회장이 된 일이 있으나 그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면서 하우스보이로 취직해 2~3년 동안 일했고, 1904년 리버사이드로 이주하여 오렌지 따는 일을 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기독교 경영의 신학강습소에서 영어와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유학생 신분이던 1905년 장남이 필립이 태어났고, 그해 4월 5일 그는 샌프란시스코뿐만 아니라 캘리포니아 주 여러 도시에 흩어져 있는 한국인을 조직하고, 나아가서는 하와이, 멕시코에 있는 동포까지도 합하여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결성했습니다. 이광수는 대한인국민회 결성에 대한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대한인국민회는 그 출발로 보아, 또 조직자요 지도자인 도산의 의도와 인격으로 보아 단순한 교민 단체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민족 수양운동이요, 독립을 위한 혁명운동이요, 민주주의 정치를 실습하는 정치운동이었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었다. 대한인국민회는 재미동포의 보호기관이요, 취직알선기관이요, 노동조합이요, 권업기관勸業機關이요, 문화향상기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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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균이 샘창자(십이지장)로 이행하는 것을 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입에서 위까지 이어지는 30-35cm 정도의 관을 삼킨 음식飮食이 지나가는 통로通路라 하여 식도食道라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밥줄이라고도 하며 직업을 잃었을 때에 “발줄 떨어졌다”고 말합니다. 식도esophagus는 인두咽頭와 위胃 사이의 관상부를 말합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하여 입에 거미줄 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목에 힘도 못 주고 밥줄을 보호하느라 노심초사합니다.

식도의 내강內腔은 엄지손가락 굵기 정도지만, 음식물이 통과할 때에는 상당히 확장됩니다. 음식물을 삼켜 인두를 지나면 식도 상부의 가로무늬근이 수축을 시작하고, 그 운동이 점차 민무늬근으로 파급되어 연동운동이 시작되므로 음식물이 아래쪽으로 내려갑니다. 음식물이 식도를 통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형물일 때 5초, 액상물은 0.4~1.5초입니다. 음식물이 식도를 따라 내려가는 작용은 연하압嚥下壓과 연동운동(꿈틀운동) 및 음식물의 크기와 그 중력에 의합니다. 위의 입구에 있는 분문噴門에는 괄약근이 있어 평상시에는 근육이 수축되어 분문을 닫고 있으나 음식물이 들어가면 반사적으로 열려 내용물을 받아들입니다. 단, 강한 산酸 등이 들어왔을 때에는 분문은 닫힌 채 열리지 않고 식도 하단에 고여 그 부위를 침해합니다. 또, 유해물이 위로 들어왔을 때에는 분문이 열려 내용물이 식도를 역행하여 구토vomit로 내뱉게 됩니다. 차멀미나 과음했을 때 토하게 되는데, 위의 강한 수축과 함께 위의 분문의 괄약근이 열려야 하기 때문에 힘이 많이 듭니다. 젖먹이일 때에는 괄약근이 발달하지 못해 젖을 잘 토하지만, 나이가 들면 음식을 먹고 물구나무를 서도 토하는 일이 없습니다.

목젖 혹은 구개수palatine uvula는 구강 연구개의 중앙 아래에 늘어진 모양으로 현옹수懸壅垂라고도 합니다. 구강의 천장을 이루고 있는 구개는 앞쪽의 경구개와 뒤쪽의 연구개로 구별합니다. 구개수는 구강과 인두咽頭의 경계에 해당하지만 무엇을 마실 때에는 인두의 후벽에 붙습니다. 음식물이 입에서 인두로 내려갈 때에 목젖이 코의 뒷문을 닫아 음식물이 코로 들어가는 걸 막습니다. 그 닫힘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음식물이 코로 역류하게 되는데 이것이 사레에 들리는 것입니다.

사람의 위 근육은 신축성이 좋아 1.5리터의 음식물을 저장합니다. 위는 명치뼈the bone above the pit of the stomach 아래에 있으며, 소화불량dyspepsia이나 위궤양gastric ulcer일 때 그 부분이 거북하고 쓰립니다. 위장 점막이 흡연, 스트레스, 약제, 헬리코박터균의 감염, 악성종양 등에 의해 손상되어 가장 표면에 있는 점막층보다 깊이 패이면서 점막근층 이상으로 손상이 진행된 상태를 위궤양이라 합니다. 위에 음식물이 들어오면 들어오는 순서대로 쌓이지만 보통 3-4시간, 탄수화물carbohydrate을 빨리 내보내므로 짧게는 2-3시간 머무는 동안 15-20초에 한 번씩 일어나는 연동운동으로 위액과 섞이고, 특히 유문부幽門部의 맷돌과 같은 운동에 의해 1mm 이하의 작은 입자가 되어 작은창자small intestine로 내려갑니다.

위의 위쪽에 분문괄약근이 있고 아래쪽에는 유문괄약근이 있습니다. 유문괄약근은 때가 되면 여닫이운동을 하여 음식물을 조금씩 아래로 내려보내는데 이를 유문반사幽門反射라 합니다. 유문반사란 위의 음식물을 샘창자duodenum로 한꺼번에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조끔씩 내려가게 하는 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위의 음식물이 죽처럼 묽어지면 유문이 열리면서 음식물이 조금 내려가고 유문괄약근은 곧 닫힙니다. 위는 강산성이고 샘창자는 알카리성이므로, 위에서 내려간 음식물이 알카리성인 이자액과 쓸개즙에 섞여 일단 알카리성이 되면 다시 유문이 살짝 열리면서 음식물을 내려보냅니다.

위액gastric juice은 무색투명하고 약간 점성이 있는 강산성액입니다. 위액 속의 염산을 위산이라고도 하는데, 펩신의 단백질 소화에 필요한 물질일 뿐만 아니라, 살균작용도 있으므로 여러 가지 세균이 샘창자(십이지장)로 이행하는 것을 막습니다. 펩신은 단백질을 분해하는 효소로서, 이것에 의해 부분적으로 분해된 단백질을 펩톤peptone이라 합니다. 위액 속에는 이 밖에도 응유효소milk-clotting enzyme가 있어 유단백질milk protein을 응고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위벽에 분포하는 3만5천 개 정도의 위샘에서는 하루에 약 2-3리터의 위액을 분비하는데, 보통 때에는 위액이 분비되지 않다가 음식물이 들어오면 순간적으로 많은 양이 분비됩니다. 위샘은 크게 점액분비세포, 주세포, 부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점액분비세포에서는 뮤신mucin이라는 점액 단백질을 분비하는데, 이것이 위벽을 덮고 있어 세균이나 자극성 물질뿐만 아니라 위 자체에서 분비되는 단백질 분해효소인 펩신으로부터 위벽을 보호합니다. 펩신이 단백질로 되어 있는 위벽을 소화시키지 못하는 것은 항펩신물질인 이 뮤신을 분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밥은 굶어도 속이 편해야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위의 신경과 관련된 말입니다. 대부분의 위장병은 신경성입니다. 여기서 신경이란 자율신경, 즉 제10뇌신경에서 나온 부교감신경parasympathetic nerve과 등골에서 나온 교감신경sympathetic nerve을 말합니다. 부교감신경은 뇌와 척수를 이어주는 줄기 역할을 하는 뇌줄기brainstem와 척수에서 시작되는 날신경섬유efferent fibers, 운동 자극을 말초로 전달하는 자율신경autonomic nerve, 신경 세포체의 집합인 신경절,ganglion, 신경절이후 섬유로 구성됩니다. 신경과 신경이 연결되는 신경절에서는 아세틸콜린이라는 신경전달물질로 신호전달이 이루어집니다. 부교감신경의 기능은 에너지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심박동수를 감소하고 동공을 수축하며 소화관의 연동운동과 분비샘의 분비가 증가하고 항문과 방광의 조임근은 이완하며 방광벽을 수축합니다. 교감신경은 척수에서 시작되는 날신경섬유와 교감신경절을 포함한 좌우 교감신경줄기, 분지, 교감신경 및 국소신경절 등으로 구성됩니다. 교감신경은 신체가 위급한 상황일 때 이에 대처하는 기능을 합니다. 교감신경이 흥분하면 근육의 세동맥은 확장되고 심장박동수가 증가하며 피부와 소화관의 세동맥은 수축하여 혈압이 상승합니다. 따라서 피부나 위장관의 혈액이 뇌, 심장, 근육으로 집중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또한 동공의 확대, 항문과 방광의 조임근의 수축이 나타나며 소화기관과 방광의 민무늬근육이 이완됩니다. 털세움근도 영향을 받아 털이 일어서고 땀이 분비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위는 소화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술이나 알코올, 약 등을 흡수하기도 합니다. 독한 술은 입 또는 식도에서부터 흡수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음식물을 지나치게 많이 섭취하면 위의 연동운동과 효소, 염산의 제조를 위해 산소와 양분을 많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혈이 위로 주로 모이게 되고, 대신에 뇌나 다른 기관에 혈의 공급이 줄어들어 식곤증食困症이 옵니다. 그래서 식후에 목욕을 하거나 과한 운동을 하면 혈이 사방으로 퍼져 소화불량에 걸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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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교수님이 알려주는 공부법>(지와 사랑)

 

 

 

질문을 하라

 

철학은 질문을 하더라도 해답을 결코 얻지 못하는 활동으로 볼 수 있다. 이 말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 적어도 우리는 우리가 잘못된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인식할 때 철학에서 발전을 거둘 수 있다. 그러나 철학에는 해답이 없다는 생각에도 어느 정도의 진실은 담겨 있다. 철학의 뿌리는 인간조건에서 자연스레 제기되는 난해하고 근원적인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여기 있는가?”, “실재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이런 질문들은 쉽게 대답할 수 없으며, 정답이란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이런 문제들을 탐구하는 것이 시간낭비라는 말은 아니다.
사실 철학의 가치는 특유의 불확실성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철학적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은 상식이나 습관적 믿음에서 말미암은 선입견 속에 갇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에게 세상은 명확하고 한정적이고 자명한 것으로 보인다. 익숙한 대상에는 의문을 품지 않고, 낯선 가능성을 거부한다. 이와 반대로 철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일상적인 것도 해답을 알 수 없는 문제로 보인다.
철학은, 비록 우리에게 진정한 해답을 확실하게 알려주지 못하지만, 우리 사고의 폭이 확장되고 우리가 관습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 철학적으로 사고하면 사물의 본질에 대한 확신이 줄어들지만, 사물의 개연성에 관한 지식은 크게 늘어난다. 철학은 의심의 영역을 여행해본 적 없는 자들의 오만한 독단론을 제거하고, 익숙한 것을 익숙하지 않은 측면에서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호기심을 늘 유지시킨다.
어렵고 골치 아픈 질문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학생은 철학을 공부할 자격이 없다. 철학적 토론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는 황당한 질문도 과감히 던질 줄 알아야 한다. 때로는 가장 간단한 질문이 가장 중요한 질문일 수 있다. 물론 철학 토론에도 예의가 있다. 그러므로 다른 토론자의 발언기회도 보장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스스로 질문을 고안해 던지지 못하는 학생은 철학을 생생한 학문으로 유지할 수 없으며, 사고의 화석화를 초래하는 수동적인 태도에 안주하고 말 것이다.
질문을 던질 때마다 상대의 답변을 매우 주의 깊게 경청하라. 이는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일 것이다. 그러나 질문을 던지고 나서 답변을 귀담아듣지 않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다. 상대의 답변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준비를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상대의 답변을 통해 자신이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은 오히려 반길 만한 일이다. 그 점을 알지 못하면, 계속 잘못된 생각을 고집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필기할 만한 점이 없다고 느끼거나 토론에서 귀담아 들을 점이 전혀 없다는 생각을 지닌 채 세미나실을 나서거나 토론을 마치더라도 당황해하지 말기 바란다. 토론 자체가 바로 생각을 정리하고 오해를 해소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토론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연습을 하고 사고력을 다지는 기회가 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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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과 독립관 그리고 안창호의 궐기

 

 

 

1896년 1월 귀국 직후 갑오개혁에 의해 입법기관으로 설치된 중추원中樞院 고문에 임명된 서재필은 국민계몽에 관심을 갖고 이상재, 이승만 등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정부에 건의하여 보조금을 받고 개화파 인사들의 후원 아래, 1896년 4월 7일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대중신문인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했습니다. <독립신문>은 가로 22㎝, 세로 33㎝의 평판 중형의 크기로 4면 발행되었는데, 1면과 2면은 논설, 관보, 잡보, 외국통신, 3면은 광고를 순 한글로 실었고, 4면은 영문으로 논설을 비롯한 국내 정치활동을 소개했습니다. 독립신문의 논설이나 각종 기사를 서재필이 직접 썼습니다. 서재필은 태종太宗 7년, 즉 1407년 현재에 서대문 밖 북서쪽에 영은문迎恩門과 함께 세워 명明나라와 청淸나라에 사신使臣을 맞이하던 사대事大의 유물인 모화관慕華館을 독립관이라 개칭하여, “거기서 조선에서는 최초인 연설회를 연속 개최하여 세계의 대세와 정치를 잘하고 못하는 것과 국가의 나아갈 길을 논하고, 일변으로 서재필 자신이 광무제光武帝와 당시의 코 높은 관리들을 계몽하고 힐책하여 나라의 운명이 알을 포개어 놓은 것처럼 위태함을 경고하였다. 독립협회는 세를 확대하여 만민공동회가 되었다”고 이광수는 적었습니다.

안창호는 열아홉 살 때인 1897년에 서재필, 이승만, 유길준, 윤치호 등이 결성한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했으며, 이승만, 양기탁, 윤치호, 이상재, 이동녕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 가입하여 민중계몽에 앞장서는 한편 필대은과 함께 만민공동회의 관서關西 지부를 발기하고 21세의 약관으로 평양 쾌재정快哉亭에서의 연설을 필두로 도덕과 지식 애국심을 기초로 한 실력배양론을 주창함으로써 근대화에 대한 열풍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이때에 총각 안창호는 동지 필대은 등과 함께 평양에서 궐기하여 쾌재정에 만민공동회 발기회를 열고 그 자리에서 감사 조민희趙民熙를 앞에 놓고 수백 명 집회 중에 일대 연설을 하여 조민희로 하여금 감탄을 금하지 못하게 하고 안창호의 명성이 관서 일대에 진동케 되었던 것이다.

 

훗날 종교가이며 교육자로서 민족의 지도자가 된 이승훈李昇薰(1864~1930)은 이 연설에 감명을 받고 독립운동의 의지를 굳혔다고 술회할 정도였습니다. 이승훈은 오산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재직했으며,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대표로 참여했고, 동아일보사 사장을 역임했으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은 분입니다. 안창호가 연설에서 주장한 것은 힘이 독립의 기초라면서 도덕 있는 국민이 되고 지식 있는 국민이 되고 단합하는 국민이 되어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남에게 멸시를 안 받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안창호는 이씨 부인과 약혼 중에 있었습니다. 1896년 구세학당 보통부를 졸업하고 보통부의 조교로 취직하던 그해 고향에 잠깐 들렀을 때 할아버지 안태열이 전주이씨 이석관李錫寶의 장녀로 당시 열세 살의 이혜련李惠練과 성혼시켰습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인 약혼이 되었음을 알고 할아버지에게 파혼을 주장했으나 관철되지 않자 파혼하지 못하고 그는 다시 서울로 되돌아와야 했습니다. 안창호는 결혼은 공부하고 돌아온 뒤에 할 터이니 그때를 기다리든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데로 출가시키라고 이씨 집에 선언하고 자신은 10년 이내에는 돌아올 기약이 없음을 밝힌 뒤 서울로 왔습니다.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시국을 관망하면서 배제의 모체인 정동 미국 선교사의 사숙에서 얼마 동안 공부하다가, 만민공동회가 구세력의 사주使嗾를 받은 보부상파褓負商派의 습격을 받고 정부의 큰 탄압을 받아서 부서지고, 서재필은 미국으로 물러가고, 윤치호는 중국으로 빠져나가고 이승만은 감옥에 갇히게 된 이듬해인 기해년, 22세 때에 인천서 미국선을 편승하고 미주로 향하였으니, 이때에 이씨 부인은 죽을 데를 가더라도 같이 간다 하여 편발編髮로 도산을 따라와서 바로 배 타기 직전 인천에서 초례醮禮(혼인을 지내는 예식)를 치르고 남편 도산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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