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가 청운의 뜻을 품고 미국에 가다

 

 

 

안창호는 1899년에 평안남도 강서江西군 동진면 암화리에 세운 초등과정의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하여 평소 그의 지론인 점진적 민족개조사업에 투신했습니다. 그는 황무지 개척 사업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점진학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 사립 초등학교이자 최초의 남녀공학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구국운동救國運動을 전개했습니다. 그는 자아혁신과 자기개조를 통해서 민족혁신과 민족개조를 이룩하려면 무엇보다도 교육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여 고향에 점진학교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학교의 명칭은 점진적으로 공부와 수양을 계속하여 민족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그의 점진론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가 지은 교가校歌 속에도 그 정신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점진 점진 점진 기쁜 마음과

점진 점진 점진 기쁜 노래로

학과를 전문하되 낙심 말고

하겠다 하세 우리 직무를 다.

 

이는 그가 평소에 강조하던 무실역행사상務實力行思想을 그대로 담은 것으로,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가지고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907년에는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여 점진적으로 대성大成하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뜻을 표현했습니다.

안창호가 청운의 뜻을 품고 미국에 상륙한 때는 22세의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1902년 부인 이혜련과 함께 인천항을 출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습니다. 이때 중간 경유지였던 하와이 근해에서 새벽안개 속에 희망의 표상처럼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의 실루엣을 보고 그의 호號를 도산島山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안창호는 길에서 한인 두 사람이 상투를 마주 잡고 싸우는 광경을 미국인들이 재미있게 보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뛰어들어 싸움을 말리고 싸우는 연유를 물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 근방에 사는 중국 교민들에게 인삼 행상을 하던 이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협정한 판매 지역을 범했다는 이유로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 재류하는 동포를 두루 찾아 그 생활 상태를 조사했습니다. 그는 재류 동포가 문명한 국민다운 생활을 하도록 노력하리라 결심하고 그 뜻을 동지로 동행한 이강, 김성무, 정재관 등에게 전했습니다. 세 사람은 자신들이 안창호의 생활비를 벌 터이니 안창호더러는 동포 지도에 전력하라고 그를 격려했습니다. 이광수는 이것이 그가 “몸을 바쳐서 민족운동을 한 첫날이었다. 빛나는 정치운동이나 혁명운동이 아니라 만리타국에 유리하여 와있는 불과 몇 백 명의 무식한 동포의 계몽을 위하여 청운의 웅지雄志를 버리고 나서는 22세의 청년 안창호를 상상할 것이다”라고 적었습니다.

안창호는 동포의 불결한 숙소를 몸소 청결히 하고 미화했습니다. 동포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집 청소와 주변 쓰레기 정리, 겨울에는 눈도 쓸어주었습니다. 이것이 몇 달 지나지 않아서 동포의 생활을 변화시켰습니다. 외양만 변한 것이 아니라 동포의 정신생활에까지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동포의 신뢰를 얻게 되자 안창호는 인삼 행상의 구역을 공평하게 정하되 한 달씩 서로 구역을 교환하는 것과, 인삼의 가격을 협정하여 서로 경쟁하여 값을 떨어뜨리게 하지 말 것을 제의했습니다. 안창호는 동포에게 협동과 준법遵法의 훈련을 하여 인삼 행상들을 단합시켜 계契를 만들어 매입과 매출을 하나의 큰 조직에서 관리함으로써 신용과 이익의 안전을 보장하려고 했습니다. 또한 한인의 노동력을 통합, 공급하는 기관을 만들어서 미국인의 노동력 주문을 받고 노동자들의 최저 임금을 보장하고 또 실직이 없게 하려고 했습니다. 이를 두고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여기서도 도산은 그의 평생의 사업 원리를 적용하였으니, 그것은 점진적으로 민중의 자각을 기다려서 하는 것, 민중 자신 중에서 지도자를 발견하여 그로 하여금 민심을 결합케 하고 결코 도산 자신이 지도자의 자리에 서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세우고 <공립신보>를 발간하고 다시 확대하여 미주국민회가 되고 <신한민보新韓民報>라는 신문이 될 때에도 도산은 늘 배후에 있었다. 그가 국민회장이 된 일이 있으나 그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면서 하우스보이로 취직해 2~3년 동안 일했고, 1904년 리버사이드로 이주하여 오렌지 따는 일을 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기독교 경영의 신학강습소에서 영어와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유학생 신분이던 1905년 장남이 필립이 태어났고, 그해 4월 5일 그는 샌프란시스코뿐만 아니라 캘리포니아 주 여러 도시에 흩어져 있는 한국인을 조직하고, 나아가서는 하와이, 멕시코에 있는 동포까지도 합하여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결성했습니다. 이광수는 대한인국민회 결성에 대한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대한인국민회는 그 출발로 보아, 또 조직자요 지도자인 도산의 의도와 인격으로 보아 단순한 교민 단체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민족 수양운동이요, 독립을 위한 혁명운동이요, 민주주의 정치를 실습하는 정치운동이었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었다. 대한인국민회는 재미동포의 보호기관이요, 취직알선기관이요, 노동조합이요, 권업기관勸業機關이요, 문화향상기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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