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우리나라에 큰 인물이 났다”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된 후 안창호는 대한사람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1907년 스물아홉 살의 나이로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그는 환국길에 동경에서 유학생들 가운데 저명한 인물들을 만났습니다. 그때 동경에는 1905년 서북지방 출신 유학생들이 결성한 사회운동단체인 태극학회太極學會가 있었습니다. 1895년 결성된 대조선유학생친목회大朝鮮留學生親睦會와 그 뒤를 이은 1898년의 제국청년회帝國靑年會가 해산된 이후 일본에서 처음 조직된 재일在日 유학생단체였습니다. 처음에는 후배 유학생들의 편익을 도모하고 선후배간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점차 출판을 통한 계몽운동이 활성화되었고, 이는 다시 국내의 계몽운동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1906년 8월 조직이 정비되어 학회지인 <태극학보太極學報>를 창간하고 어학강습소도 태극학교太極學校로 명명했습니다. 태극학회는 1909년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에 통합되면서 발전적으로 해소되었습니다.

이광수는 안창호가 태극학회의 간부를 방문하고 “그가 주최한 학생회에서 일장의 강연회를 행하였으니, 이것은 청중에게 우리나라에 큰 인물이 났다 하는 감격을 크게 주었다”고 적었습니다. 이광수는 안창호가 “동경에서 첫 명성을 높인 것이 한 원인이 되어서 서울에 들어오는 길로 전 사회의 주목을 끌었다”고 적었습니다.

안창호는 서울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언론계의 지도자 유근, 장지연張志淵, 박은식 등과 관계官界의 선각자 유길준 등과 청년 장교요 지사들인 이갑, 이동휘, 노백린 등과 이동녕, 이시영, 전덕기, 최광옥, 이승훈, 유동열, 유동주, 김구 등과 의를 맺었습니다.

탁지부 주사로 임명되어 김홍집金弘集의 온건 개화파 내각에 참여했던 석농石儂 유근柳瑾(1861~1921)은 총리대신 김홍집을 비롯한 어윤중 등 갑오내각 대신들이 척살되자 자리에서 물러나 언론과 교육, 그리고 계몽운동 단체에 참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조국 근대화와 자주화에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박은식朴殷植(1859~1925)은 1882년에 상경해 7월의 임오군란壬午軍亂을 목격하고 시무책을 지어 국왕에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하여 태천泰川의 큰 학자 박문일朴文一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1888년부터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일어날 때까지 6년간 능참봉을 한 것이 그의 관직생활의 전부였습니다. 1898년 9월 남궁억南宮檍, 유근, 나수연羅壽淵 등이 <황성신문 皇城新聞>을 창간한 후에는 장지연과 함께 주필이 되었습니다. 1904년 7월 양기탁梁起鐸과 베델Bethell, E.T.(裵說) 등에 의해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자, 양기탁의 추천으로 이 신문의 주필을 지냈습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제목의 논설을 써서 일제를 비판했고, 이에 일제는 <황성신문>을 정간시켰습니다. 1906년에 복간되었으나 장지연이 복귀하지 못하자, <황성신문>을 지키기 위해 1910년 8월까지 이 신문의 주필로서 활동하면서 <대한매일신보>에는 주로 객원으로서 논설만 기고했습니다. 1907년 4월 안창호를 포함하여 양기탁, 전덕기全德基, 이동녕李東寧, 이동휘李東輝, 이회영李會榮, 이갑李甲, 유동열柳東說 등을 비롯한 다수의 애국계몽 운동가들에 의해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해 원로회원으로서 교육과 출판 부문에서 활동했습니다.

한말의 개화운동가이며 최초의 국비유학생으로 미국에서 공부한 유길준兪吉濬(1856~1914)은 귀국길에 일본에 잠시 머물며 김옥균을 만났는데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개화당으로 몰려 체포되어 구금되었습니다. 구금기간에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하기 시작하여 1889년에 탈고했습니다. 그는 <서유견문>을 통해 서양의 근대문명을 조선에 소개하고 조선의 실정에 맞는 자주적 실상개화實狀開化를 주장했으며, 정부의 역할을 중시한 개혁론을 전개하여 갑오개혁의 이론적 배경을 제시했습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외무참의外務參議 등을 역임하며 개혁을 주도했고, 1895년 김홍집 내각의 내무협판內務協辦을 역임하면서 태양력 사용, 종두법 실시, 우체사 설치, 소학교 설치 등을 추진했습니다. 또한 1896년 <독립신문> 창간을 적극 후원하고 그해 내부대신에 올랐으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내각이 해산되자 겨우 목숨을 건져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1907년 순종황제의 특사로 귀국했습니다. 국권피탈 후 일본정부에서 남작男爵의 작위를 주었으나 거절했으며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교육과 계몽사업에 헌신했습니다. 모든 국민을 선비로 만든다는 국민개사國民皆士를 실천목표로 정하여 흥사단興士團을 발족하여 활동했고, 국민경제회國民經濟會를 설립했으며, 계산학교桂山學校를 설립했습니다.

독립 운동계의 풍운아로 불린 이갑李甲(1877~1917)은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간부로 활동했으며, 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그 해 10월에 사비로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조成城 학교에서 입학하여 1901년 12월 4일에 졸업한 후 일본 근위사단 보병 제1연대에 배속되어 후보생으로 군무를 익혔습니다. 그리고 그 해 12월 1일에 일본 육군사관학교 15기생으로 입학했는데 그의 나이는 26세였습니다. 이갑은 을사늑약 이후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민영휘에게 복수할 때가 왔음을 절감하고 육혈포六穴砲를 품고 단신으로 민영휘의 집으로 뛰어 들어가 옛날 그가 빼앗아간 40경 토지와 그간 10여 년 간 추수하여 먹은 돈을 전부 내놓을 것을 압박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민영휘가 상해로 도망가 이를 피해보고자 했으나 이갑은 상해까지 쫒아가서 그에게 압박을 가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농토를 도로 찾고 3만원의 돈까지 변상 받아 내었습니다. 이갑은 안창호가 주도하여 결성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다른 군인 출신 애국지사들과 함께 참여했습니다.

빈농 출신으로 사관양성소를 졸업한 후 육군참위에 임관된 이동휘李東輝(1873~1935)는 광무황제에 의해 삼남검사관三南檢査官으로 임명된 후 지방 진위대의 부패장교와 지방 관리들을 엄격하게 처벌함으로써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 후 국방요충지인 강화도 진위대장으로 부임해서도 군인들은 물론 도 인민들까지도 부형父兄과 같이 애모할 정도로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에는 대중을 자각시켜 구국운동에 나서게 하기 위해 교육 문화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기독교야말로 쓰러져 가는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종교라는 신념에서 기독교 전도활동에 힘썼습니다. 그는 서북학회西北學會와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의 지도자로서 구국운동을 전개했으며, 1909년 이후에는 캐나다 장로교선교회의 전도사로서 함경도 일대에서 기독교 전도활동도 했습니다.

평생을 무인武人으로서 항일무장 전투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헌신한 노백린盧伯麟(1875~1926)은 동경에 있는 경응의숙慶應義塾 보통과와 특별과를 마치고 1898년 11월 성성학교成城學校를 졸업한 뒤 다시 일본 육군사관학교 11기생으로 입학하여 신식 군사학을 배웠습니다. 1900년 10월 귀국하여 당시 원수부元帥府 회계국 총장인 민영환閔泳煥의 주선으로 어담魚潭, 윤치성尹致晟, 김형섭金亨燮 등과 함께 육군참위에 임관되고 한국무관학교 보병과 교관이 되어 군대양성에 진력했습니다. 1904년에는 러일전쟁이 일어남에 관전단觀戰團이 되어 중국의 다이렌大連 뤼순旅順 등지를 돌아보았으며 그 후 부위 정위 참령 부령 정령으로 승진했습니다. 그는 육군무관학교장을 비롯해 헌병대장, 육군 연성학교장을 역임했습니다. 1907년 8월 1일 한국군대 해산으로 육군연성학교가 폐교되고 그는 군부 교육국장으로 전임되어 정령正領의 계급으로 군복을 벗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는 그와 전덕기, 양기탁, 이동녕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여 군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에 앞장섰습니다.

양반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한 이동녕李東寧(1869~1940)은 부친을 도와 원산에서 광성학교를 세워 교육 계몽운동을 펼쳤고, 1896년 7월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이 조직한 독립협회에도 가담했으며, 하1898년에는 만민공동회운동에 참여하여 개화 개혁운동을 전개하다 옥고를 치렀습니다. 190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상재, 전덕기 목사 등과 함께 YMCA운동을 전개했으며,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의 인도로 기독교 감리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를 결성에 참여했습니다.

일찍부터 관직생활을 시작하고, 한말 정국 속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은 이시영李始榮(1869~1953)은 22세 되던 1891년에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교리, 승정원부승지, 궁내부수석참의 등을 차례로 역임했습니다. 37세이던 1906년에 평안남도 관찰사에 등용된 것으로 보면 그에 대한 고종황제의 신망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07년에는 중추원 칙임의관勅任議官이 되었고, 1908년에는 한성재판소장, 법부 민사국장, 고등법원판사 등 법부의 주요 직책을 역임했습니다. 1907년 형 이회영을 비롯하여 안창호, 전덕기, 이동녕 등이 신민회를 비밀리에 조직할 때 그는 관직생활을 하면서도 이에 참가했습니다.

상동교회尙洞敎會의 목사 전덕기全德基(1875~1914)는 1892년 스크랜톤Scranton, M.F. 선교사의 감화를 받아 1896년 세례를 받고 상동교회에 입교했습니다. 그는 1896년 서재필에 의하여 조직된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독립 운동에 나섰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국감리교청년회연합회(당시의 엡웰 청년회)를 소집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전개했습니다. 1906년 이준李儁, 박정동朴晶東과 함께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창설했으며, 이듬해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를 중심으로 여러 동료들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고, 그 중앙위원中央委員이 되었습니다.

최광옥崔光玉(1879?~1910)은 1904년 숭실학교를 제1회로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사범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곳에서 일본의 한인유학생들이 결성한 태극학회太極學會의 회장을 지내며 애국계몽운동을 했습니다. 1906년 귀국하여 평양의 숭실학교와 서울의 경신학교儆新學校, 의주義州의 양실학교養實學校 등에서 교편을 잡으며 교육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07년 안창호를 비롯하여 여러 동지들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고 평안지부를 맡았습니다.

일본에 건너가 세이쇼학교成城學校를 거쳐, 190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유동열柳東說(1877~?)은 졸업과 동시에 일본 근위사단에서 실무를 쌓았고,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대한제국 파견 무관 자격으로 일본군에 종군하여 선천부근에서 러시아군과 싸웠습니다. 그 뒤 참령參領으로 승진하여 시위대 기병대장과 참모국 제2과장을 역임했으나,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면서 지하운동에 가담했습니다. 이때부터 안창호를 중심으로 신민회 조직에 참여하여 배일구국운동을 펼치고, 서북학회西北學會를 통한 계몽활동을 전개했습니다. 1909년 안중근安重根의 이토伊藤博文 살해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일본헌병대에 잡혔으나, 혐의가 없어 석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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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할 수 있을까요?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한다”는 말은 간사한 기회주의자를 질타하여 하는 말입니다. “간에 기별도 안 간다”는 말은 먹은 음식물의 양이 충분하지 못할 때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간이 떨린다”는 말은 춥거나 분을 삭이지 못할 때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간담이 서늘하다” “간 떨어질 뻔했다”는 말은 너무 놀랐을 때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간이 콩알만 해졌다”는 말은 불안하고 초조할 때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간장을 녹인다”는 말은 애가 탈 때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간요肝要하다”는 말은 매우 중요한 일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대담大膽하다”는 말은 용기 있는 일을 말합니다.

오른쪽 횡격막 아래의 복부에 위치하여 늑골의 보호를 받고 있는 간肝을 간장肝臟이라고도 하며, 오장육부五臟六腑 가운데 약 1-1.5㎏이나 되는 가장 크고 하는 일이 많은 기관입니다. 간은 많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사이를 담관과 혈관이 지나갑니다. 간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의 대부분이 간세포로서 그 수는 2천억-2천5백억 개나 되며 무수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간장의 구조단위인 간소엽hepatic lobules이 모여 만들어진 간은 크게 좌엽과 우엽으로 나뉘며 우엽이 좌엽보다 훨씬 크고 두껍습니다. 간에 필요한 영양소와 산소를 공급하기 위하여 정맥 외에도 문맥이라는 특수한 혈관이 존재합니다. 음식물은 소화기관에 의해 소화, 흡수되어 심장으로 돌아가기 전 대부분의 영양소가 문맥portal circulation을 통해 간으로 들어갑니다. 간은 이 영양소를 사용하여 생명 유지에 필요한 물질을 생산, 저장, 전환시키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탄수화물, 단백질, 핵산, 알코올의 대사로부터 암모니아를 요소로 바꾸고, 쓸개즙을 생산하고 영양소를 저장하고 해독 작용을 하며 배설 및 방어 작용을 합니다. 순환 혈액량의 조절과 물, 전해질 대사 기능 외에도 혈액응고 인자의 생성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기능들을 담당하고 있는 간은 인체의 화학공장 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혈액 속에 함유되어 있는 포도당을 의미하는 혈당blood sugar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기관은 뇌이고, 혈당이 부족하면 뇌기능이 저하됩니다. 혈당 못지않게 혈장단백질plasma protein이 매우 중요한데, 작은창자에서 흡수된 아미노산은 간에 와서 단백질로 합성되며, 그 중에서도 중요한 알부민albumin이 만들어집니다. 혈장단백질은 혈장에 함유되어 있는 단백질로, 알부민과 글로불린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혈장의 약 7~8%를 차지합니다. 알부민은 간에서 만들어져 몸의 단백질 보급원이 되며, 글로불린은 비타민이나 호르몬, 구리, 철을 운반합니다. 알부민은 생체세포生體細胞나 체액 중에 넓게 분포되어 있는 단순단백질로 글로불린과 함께 세포의 기초물질을 구성하며, 동식물의 조직 속에 널리 존재합니다.

간에 병이 생기면 배에 복수腹水가 차는데, 부종浮腫과 동일한 현상으로 혈관의 혈장단백질의 농도가 낮아져서 조직의 물을 빨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부종edema은 신체조직의 틈 사이에 조직액이 괸 상태를 말합니다. 보통 때에도 혈관과 조직 사이에는 물이 드나드는데, 간이 단백질 대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혈관의 혈장단백질의 농도가 묽어져서 조직의 물이 빠져나오지 못해 배가 절구통 같은 상태가 됩니다. 부종은 제대로 먹지 못해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 몸의 많은 내분비기관에서는 여러 종류의 호르몬이 만들어져 분비되고 있는데, 제 할 일을 다 하고 나면 간에서 폐기처분됩니다. 성호르몬도 예외가 아닙니다. 여자의 몸에서도 약간의 남성호르몬male hormones이, 남자의 몸에서도 약간의 여성호르몬female hormones이 생성되는데, 자기의 성性과 관계없는 것은 간에서 계속 파괴하여 호르몬의 농도를 조절합니다. 그러나 간암 같은 병으로 호르몬 대사가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면, 남자의 경우 여성호르몬을 파괴시키지 못해 고환이 위축되거나 유방이 커지는 여성화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쓸개 혹은 담낭gallbladder은 길이 약 7~10cm 정도 되는, 간 아래쪽에 붙어 있는 주머니입니다. 간에서 분비된 쓸개즙을 농축하고 저장하는 일을 합니다. 쓸개즙은 보통 간에서 생성되고 분비되어 쓸개관(담관)을 통해 샘창자(십이지장)로 배출됩니다. 배출된 쓸개즙은 소화효소가 포함되어 있는데, 주로 지방의 소화를 돕는 역할을 합니다. 쓸개는 쓸개즙을 6~10배 정도 농축시키고 저장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쓸개즙은 음식을 먹기 시작하면 30분 내에 전부 방출되어 버리고 그 후에는 간에서 분비되는, 농축되지 않은 엷은 쓸개즙이 직접 분비됩니다. 담석증cholelithiasis 등의 질병으로 인해 쓸개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아도 일정 기간의 적응 시기만 겪으면 음식을 섭취하고 생활하는 데는 거의 지장이 없습니다. 쓸개와 관련된 가장 흔하게 발생하는 질병은 담석증으로 담석증이란 쓸개나 담관에서 발생한 담석과 관련된 모든 증상 및 합병증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담석은 담관에서 발생하기도 하지만 주로 담낭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담즙을 농축하고 저장하는 과정에서 담석이 발생할 수가 있으며 이러한 담석은 쓸개 내에 위치하면서도 증상을 유발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쓸개의 벽을 만성적으로 자극하여 만성 담낭염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담낭관을 막아 급성 담낭염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담석에 의한 증상이 심하거나 급성 담낭염과 같은 합병증이 발생하면 쓸개를 제거하는 수술을 시행하기도 합니다. 또한 담석증에 비해서는 드물지만 주로 만성 담낭염을 가진 고령의 환자에서 악성 종양인 담낭암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쓸개집에는 빌리루빈bilirubin이라는 물질이 들어있습니다. 골수에서 만들어진 적혈구가 약 120일 동안 산소를 운반하는 짐꾼 노릇을 충실히 수행하고 나면 간이나 비장에서 소멸되는데, 이때 적혈구의 헤모글로빈이 파괴된 물질이 빌리루빈입니다. 이 물질의 농도가 진할 대에는 녹색이다가 묽어지면 누르스름한 색을 띱니다. 간에서 만들어진 빌리루빈은 샘창자로 나가고 마지막에는 음식물과 섞여 똥으로 배설되는데, 똥의 색이 그야말로 똥색이 되는 것은 빌리루빈의 색깔 때문입니다. 간이나 비장에서 생성되는 빌리루빈은 혈관을 타고 콩팥에서 여과되어 오줌으로도 배출되는데, 오줌이 노란색을 띠는 것도 헤모글로빈이 송장가루인 빌리루빈 때문입니다. 간이나 쓸개에 이상이 생겨 쓸개즙의 분비가 되지 않거나 적혈구가 너무 많이 파괴되면 빌리루빈이 몸에 쌓여 눈의 흰자위가 노랗게 되고 피부가 누르스름해지는 황달黃疸이 생깁니다. 황달이 심하면 빌리루빈의 독성 때문에 몸에 해를 끼치는 것은 물론이고 똥의 색깔이 석회처럼 하얗게 됩니다.

담석증이나 담낭염cholecystitis이 심하며 쓸개를 제거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쓸개 빠진 놈”이 되고 맙니다. 담석, 수술 후 협착, 종양 등의 원인으로 인해 완전 혹은 불완전한 협착(관이나 통로가 좁아지는 것)이 발생하여 혈류나 담관을 통해 장내 세균이 담즙 내에서 증식하면서 담낭(쓸개)에 염증을 일으키는 질환을 급성담낭염이라 합니다. 담석이 지속적으로 담낭벽을 자극할 경우 만성담낭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급성담낭염이 반복되어 만성담낭염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지만, 만성담낭염 환자의 대부분은 급성담낭염의 병력이 없고 비특이적인 통증만 나타나거나 무증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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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의 대한인국민회 활동과 을사오적

 

 

 

이광수는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활동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캘리포니아 주 행정청에서 한인에 대한 것은 국민회에 자문하였고, 또 한인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은 이 회를 통하여서 하였다. 미국에 새로 입국하는 한인은 여권이 없거나 법정 휴대금이 없는 경우에라도 국민회에서 이민국에 보증하면 통하였다. 사업주들이 노동력이 필요할 때에는 국민회를 통하여서 한인 노동력을 구하였고, 국민회는 응모하는 동포의 보증인이 되었으며, 사업주와 동포 간의 이해 충돌이 있을 때에는 국민회가 나서서 동포의 이익을 보호하였다.

 

22세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안창호가 4년에 걸쳐 노력한 끝에 대한인국민회는 동포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관으로 캘리포니아 주 행정청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지도력이 인정받은 것을 말하고, 무엇보다도 그가 민족의 이익을 위해 헌신했음을 알게 해줍니다. 스물두 살의 청년이 이런 일을 계획하고 노력하여 4년 만에 결실을 거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일 따름입니다.

대한인국민회는 단지 재류 동포의 이익만을 대변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한 단체로 성장했습니다.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그 활동을 적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휴전이 되자 곧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안창호 명의의 신임장으로 이승만李承晩 박사를 워싱턴으로 파견하여 독립운동을 개시하였으니, 이것은 상해에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이 김규식金奎植 박사를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한 것과 아울러 독립운동의 중요한 사실이었다.

 

이광수는 1918년 8월 중국 상해에서 창립된 한인 청년독립운동단체인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과 대한인국민회의 독립운동을 중요한 활동을 꼽았습니다. 김규식, 서병호徐丙浩, 여운형呂運亨, 선우혁鮮于爀, 문일평文一平, 신규식申奎植, 신채호申采浩가 발기하여 설립한 신한청년당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기회에 외교활동을 통해 독립을 이루자는 뜻으로 설립한 단체였습니다. 명칭은 여운형이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케말 파샤Kemal Pasha(1881~1938)의 터키청년당을 모방해 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한청년당은 설립한 그해 12월 독립청원서를 미국 제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1856~1924)에게 보냈으며 1919년 1월에는 영어에 능숙한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해 조선의 독립을 촉구했습니다. 윌슨은 이듬해인 1919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1904년 2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벌어진 러일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1905년 5월 일본과 러시아가 맺은 강화조약인 포츠머스조약Treaty of Portsmouth에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는 일본의, 한국과 만주에 대한 특수 권익이란 것을 인정해버렸습니다. 상당히 친일적인 루스벨트는 사전에 일본에 접근하여 서로 필요한 사항을 정리하는 치밀한 외교수완을 보였습니다.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The Katsura-Taft Agreement을 1905년 7월 27일에 체결하여 양국의 우의와 이해관계를 확인했는데, 밀약의 내용은 “미국의 필리핀 점령을 일본이 인정하고, 일본의 한국 점령을 미국이 인정한다. 미국·영국·일본은 실질적으로 동맹관계”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미국의 호의에 매우 만족해했습니다.

같은 해 11월 17일 대한제국의 박제순과 일본 정부의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었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 제국에게 넘어갔습니다. 을사조약의 원래 명칭은 한일협상조약입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그해 5월 각의에서 대한방침對韓方針, 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 등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편성하기 위한 새로운 대한정책을 결정했습니다.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여 사전 묵인을 받은 일본 제국은 8월 12일에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양해를 받았습니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맺은 러시아와의 강화조약에서 어떤 방법과 수단으로든 한국 정부의 동의만 얻으면 한국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일본 제국은 1905년 11월 추밀원장樞密院長 이토伊藤博文를 고종 위문 특파대사特派大使 자격으로 한국에 파견하여 한일협약안을 제출했습니다. 11월 9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는 다음날 고종을 배알하고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오니 대사의 지휘를 따라 조처하소서”라는 내용의 일본 왕 친서를 봉정하며 일차 위협을 가했습니다. 이어서 15일에 고종을 재차 배알하여 한일협약안을 들이밀었는데, 매우 중대한 사안이라서 조정의 심각한 반대에 부닥쳤고, 17일에는 일본공사가 한국 정부의 각부 대신들을 일본공사관에 불러 한일협약의 승인을 꾀했으나 오후 3시가 되도록 결론을 얻지 못하자, 궁중에 들어가 공포 분위기 속에서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게 만들었습니다. 어전회의에서는 일본 측이 제안한 조약을 거부한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이토가 주한일군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와 함께 세 번이나 고종을 배알하고 정부 대신들과 숙의하여 원만한 해결을 볼 것을 재촉한 바람에 고종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다시 열린 어전회의에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자 일본공사가 이토를 불러왔습니다.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온 이토는 다시 회의를 열고,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조약체결에 관한 찬부를 물었습니다. 그 날 회의에 참석한 대신은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규설과 민영기는 조약체결에 적극 반대했고, 이하영과 권중현은 소극적인 반대의견을 내다가 권중현이 나중에 찬의를 표했습니다. 다른 대신들은 이토의 강압에 못 이겨 찬성의사를 밝혔습니다. 격분한 한규설은 고종에게 달려가 회의의 결정을 거부하게 하려다 중도에 쓰러졌습니다.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의 다섯 명이 조약체결에 찬성한 대신들로, 이들을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이라 합니다.

모두 다섯 개조의 항목으로 된 한일협상조약 혹은 을사조약의 주요 내용은 대한제국의 식민화를 위해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統監府와 이사청理事廳을 두어 내정內政을 장악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 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는 보호국이나 사실상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을사조약을 기초로 개항장과 13개의 주요 도시에 이사청이, 11개의 도시에 지청支廳이 설치되어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기초가 마련되었으며, 통감부는 병력동원 권리와 시정 감독권 등을 보유한 최고 권력기관으로 군림했습니다.

언론인 장지연張志淵(1864~1921)은 11월 20일자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을 발표하여 일본의 흉계를 통박하고 그 사실을 널리 알려 국민을 크게 통분시켰고, 민영환, 조병세 등은 의분을 참지 못해 자결하여 국민의 애국심에 불을 붙였으며 이어서 을사오적신에 대한 물리적 공격, 전국적인 의병운동 등이 일어났습니다. 장지연은 그 후 변절하여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구실을 한 <매일신보>에 고정 필진으로 참여해 친일親日 경향의 시와 산문을 발표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 순응하여 협력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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췌장액에 3대 영양소를 소화시키는 강력한 소화효소가 있습니까?

 

 

 

위의 뒤쪽에 위치하며, 소화 효소와 호르몬을 분비하는 장기인 췌장膵臟을 이자pancreas라고도 하며, 오장육부五臟六腑에 들지 않지만 현대 의학에서는 소화액digestive fluid(외분비물)과 호르몬(내분비물)을 함께 분비하는 중요하고 특이한 기관으로 취급합니다. 소화효소를 포함한 액체, 즉 타액, 위액, 췌액, 담즙, 장액 등의 소화액 분비는 주로 소화관내에 음식물이 존재함으로써 생깁니다. 타액의 분비는 신경성으로 조절되고 위 및 십이지장의 소화액 분비에는 신경성과 체액성 양쪽의 조절이 있습니다. 장에서는 음식물이 내강에 있는 것이 기계적 자극이 되어 소화액이 분비됩니다.

췌장은 무게 70~120g, 길이 12~17cm 정도의 납작한 두께 2~3cm 모양으로 회색이나 검은색을 띠고 있습니다. 췌장은 소화 효소와 호르몬을 분비하는 췌장 실질과 분비된 소화 효소가 십이지장으로 배출되는 통로인 췌장관pancreatic duct으로 구성됩니다. 췌장 실질로부터 생성된 소화 효소인 췌장액은 췌장 실질 내 작은 관을 통해 분비되고 여러 작은 관들이 합류하여 췌장 내 한가운데에 위치한 췌장관을 이루게 됩니다. 췌장관은 유두부에서 총담관과 합류하며 십이지장으로 들어갑니다.

위 세포에서는 위액을, 췌장 세포에서는 췌장액을 만들어내는데, 각각의 세포에는 10여만 개의 모든 유전자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위에서 오래 머문 음식물은 유문괄약근이 열리면 강한 산성을 띤 채 샘창자로 내려오고, 강한 산에 약한 샘창자가 조금씩 내려 보내달라고 위에 요구하기 때문에 위는 유문을 닫습니다. 내려온 음식물이 알카리성의 쓸개즙(담즙)과 췌장액에 의해 약알카리성이 되면 위에서는 다시 음식물을 조금 내려 보내는 유문반사가 일어납니다. 내려온 음식물 속의 염산(산성)에 자극을 받은 샘창자에서는 세크레틴secretin과 콜레시스토키닌cholecystokinin 호르몬을 분비하고, 그 물질들은 혈을 타고 간이나 췌장에 가서 쓸개즙과 췌장액의 분비를 촉진시킵니다. 세크레틴은 십이지장 점막에서 분비되는 췌장액이나 쓸개즙의 분비를 촉진시키는 단백질 호르몬으로 십이지장의 내부가 산성이 되었다는 자극에 의해 분비됩니다. 콜레시스토키닌은 십이지장 및 공장의 점막으로부터 분비되는 호르몬을 말합니다. 샘창자에 분비된 췌장액에는 3대 영양소인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을 소화시키는 강력한 소화효소가 모두 들어있습니다. 3대 영양소만이 효소에 의해 가수분해hydrolysis되고 비타민이나 무기염류들은 물에 녹아 그냥 흡수됩니다. 가수분해는 자연계의 화학반응 중에 물분자가 작용하여 일어나는 분해반응입니다. 금속염이 물과 반응하여 산성 또는 알칼리성 물질이 되는 반응이나 사람의 소화기 내에서 음식이 소화되는 과정 등이 대표적인 가수분해입니다.

밥을 먹어 혈당의 농도가 높아지면 간에서는 속히 포도당을 글리코겐glycogen으로 합성, 저장하거나 지방으로 전환하고, 혈당을 각 세포 안으로 유입되어 분해됩니다. 글리코겐은 간이나 근육에 존재하며 세포질 속에서 물에 불용상태인 과립으로 존재합니다. 간에는 2~10%, 근육에는 1~2%의 중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간이나 근육의 글리코겐은 혈액 중의 포도당 값(혈당치)이나 운동량 등에 따라 변합니다. 혈당치가 상승하면 글리코겐의 합성이 촉진되고 저하하면 분해가 촉진됩니다. 이에 의해 혈당치가 일정하게 유지되기 때문에 생리적 의의가 높습니다. 인슐린 자체가 포도당을 직접 분해하는 물질인 것으로 오해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습니다. 혈을 타고 전달되는 인슐린은 각 세포로 가서 세포막의 특수부위에 결합한 뒤, 복잡한 단계를 거쳐 세포 안의 효소를 활성화시킴으로써 포도당이 각 세포에 들어갈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100조 개에 이르는 온 몸의 세포 속에서 당을 분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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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땅땅 2017-03-04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췌장은 한의학에서 오장인 간심비폐신 중에서 비에 해당합니다. 일본 의학자들의 번역의 실수로 잘못 해석된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철학 교수님이 알려주는 공부법>(지와 사랑)

 

 

 

간결하게 말하라 그리고 글을 써라

 

간결하게 말하라
때로는 장황한 질문이나 답변이 이어지면서 토론이 답답하게 진행되는 경우가 있다. 생각을 간결하게 표현하는 것은 사고의 명료성을 보여주는 지표다. 질문을 던질 때 요점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라. 새로운 개념과 용어를 만나면 요점을 유지하기 어려울 수 있다. 안타깝게도 철학 교수들 중에도 이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답변도 비교적 짧은 것이 좋다. 답변을 짧게 해야 질문자와 답변자의 효율적인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철학 토론의 취지는 일련의 짧은 강의를 진행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장을 명료화하고 비판하고 다듬는 것, 그리고 주제를 이해하는 것이다. 실시간 토론의 장점은 이와 같은 상호작용, 상호발전과 피드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장점들을 명심하기 바란다.

 

 

글을 써라
졸업이나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은 기본적으로 글쓰기를 기준으로 평가받게 될 것이다. 학생들은 과제물과 시험 답안지에서 철학적 쟁점과 주요 철학자들에 관한 이해도와 통찰력을 드러내야 하고, 주요 쟁점과 사상가들에 관한 지식과 이해도를 입증하면서 결론을 주장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학적 글쓰기를 통해 철학적 사고를 배운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철학적 능력을 증명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철학적 능력을 다듬는 수단이기도 하다. 철학자들에게 글쓰기는 단지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는 행위가 아니라 생각의 바탕을 이루는 적극적인 활동이다. 글쓰기는 일종의 사고과정이다. 글쓰기는 단지 자신이 터득한 지식을 자랑하는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글쓰기는 어떤 주제에 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다. 흔히 학생들은 어떤 주제에 관해 글을 써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얼마나 이해하지 못했는지 깨닫게 된다.
철학적 글쓰기를 시도하지 않고도 철학을 공부할 수는 있다. 하지만 토론을 경험하지 않은 채 철학을 공부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리 추천할 만한 방법이 아니다. 물론 어떤 주제를 철저하고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는 있다. 논증이 완벽하다고 자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직접 철학 논술을 써보면, 자신의 한계를 절실히 느낄 것이다. 논술을 작성해보면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 그리고 자신의 견해가 반론과 반례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논술 쓰기는 철학 교육의 핵심인 전이 가능한 기술을 가다듬는 과정의 일환이기도 하다. 물론 논술은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성취도, 추론, 착상 등에 관한 피드백을 제공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런 피드백을 통해 학생들은 해당 주제를 둘러싼 더욱더 날카로운 통찰력을 얻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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