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의 대한인국민회 활동과 을사오적

 

 

 

이광수는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활동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캘리포니아 주 행정청에서 한인에 대한 것은 국민회에 자문하였고, 또 한인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은 이 회를 통하여서 하였다. 미국에 새로 입국하는 한인은 여권이 없거나 법정 휴대금이 없는 경우에라도 국민회에서 이민국에 보증하면 통하였다. 사업주들이 노동력이 필요할 때에는 국민회를 통하여서 한인 노동력을 구하였고, 국민회는 응모하는 동포의 보증인이 되었으며, 사업주와 동포 간의 이해 충돌이 있을 때에는 국민회가 나서서 동포의 이익을 보호하였다.

 

22세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안창호가 4년에 걸쳐 노력한 끝에 대한인국민회는 동포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관으로 캘리포니아 주 행정청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지도력이 인정받은 것을 말하고, 무엇보다도 그가 민족의 이익을 위해 헌신했음을 알게 해줍니다. 스물두 살의 청년이 이런 일을 계획하고 노력하여 4년 만에 결실을 거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일 따름입니다.

대한인국민회는 단지 재류 동포의 이익만을 대변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한 단체로 성장했습니다.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그 활동을 적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휴전이 되자 곧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안창호 명의의 신임장으로 이승만李承晩 박사를 워싱턴으로 파견하여 독립운동을 개시하였으니, 이것은 상해에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이 김규식金奎植 박사를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한 것과 아울러 독립운동의 중요한 사실이었다.

 

이광수는 1918년 8월 중국 상해에서 창립된 한인 청년독립운동단체인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과 대한인국민회의 독립운동을 중요한 활동을 꼽았습니다. 김규식, 서병호徐丙浩, 여운형呂運亨, 선우혁鮮于爀, 문일평文一平, 신규식申奎植, 신채호申采浩가 발기하여 설립한 신한청년당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기회에 외교활동을 통해 독립을 이루자는 뜻으로 설립한 단체였습니다. 명칭은 여운형이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케말 파샤Kemal Pasha(1881~1938)의 터키청년당을 모방해 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한청년당은 설립한 그해 12월 독립청원서를 미국 제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1856~1924)에게 보냈으며 1919년 1월에는 영어에 능숙한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해 조선의 독립을 촉구했습니다. 윌슨은 이듬해인 1919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1904년 2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벌어진 러일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1905년 5월 일본과 러시아가 맺은 강화조약인 포츠머스조약Treaty of Portsmouth에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는 일본의, 한국과 만주에 대한 특수 권익이란 것을 인정해버렸습니다. 상당히 친일적인 루스벨트는 사전에 일본에 접근하여 서로 필요한 사항을 정리하는 치밀한 외교수완을 보였습니다.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The Katsura-Taft Agreement을 1905년 7월 27일에 체결하여 양국의 우의와 이해관계를 확인했는데, 밀약의 내용은 “미국의 필리핀 점령을 일본이 인정하고, 일본의 한국 점령을 미국이 인정한다. 미국·영국·일본은 실질적으로 동맹관계”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미국의 호의에 매우 만족해했습니다.

같은 해 11월 17일 대한제국의 박제순과 일본 정부의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었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 제국에게 넘어갔습니다. 을사조약의 원래 명칭은 한일협상조약입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그해 5월 각의에서 대한방침對韓方針, 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 등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편성하기 위한 새로운 대한정책을 결정했습니다.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여 사전 묵인을 받은 일본 제국은 8월 12일에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양해를 받았습니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맺은 러시아와의 강화조약에서 어떤 방법과 수단으로든 한국 정부의 동의만 얻으면 한국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일본 제국은 1905년 11월 추밀원장樞密院長 이토伊藤博文를 고종 위문 특파대사特派大使 자격으로 한국에 파견하여 한일협약안을 제출했습니다. 11월 9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는 다음날 고종을 배알하고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오니 대사의 지휘를 따라 조처하소서”라는 내용의 일본 왕 친서를 봉정하며 일차 위협을 가했습니다. 이어서 15일에 고종을 재차 배알하여 한일협약안을 들이밀었는데, 매우 중대한 사안이라서 조정의 심각한 반대에 부닥쳤고, 17일에는 일본공사가 한국 정부의 각부 대신들을 일본공사관에 불러 한일협약의 승인을 꾀했으나 오후 3시가 되도록 결론을 얻지 못하자, 궁중에 들어가 공포 분위기 속에서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게 만들었습니다. 어전회의에서는 일본 측이 제안한 조약을 거부한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이토가 주한일군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와 함께 세 번이나 고종을 배알하고 정부 대신들과 숙의하여 원만한 해결을 볼 것을 재촉한 바람에 고종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다시 열린 어전회의에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자 일본공사가 이토를 불러왔습니다.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온 이토는 다시 회의를 열고,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조약체결에 관한 찬부를 물었습니다. 그 날 회의에 참석한 대신은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규설과 민영기는 조약체결에 적극 반대했고, 이하영과 권중현은 소극적인 반대의견을 내다가 권중현이 나중에 찬의를 표했습니다. 다른 대신들은 이토의 강압에 못 이겨 찬성의사를 밝혔습니다. 격분한 한규설은 고종에게 달려가 회의의 결정을 거부하게 하려다 중도에 쓰러졌습니다.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의 다섯 명이 조약체결에 찬성한 대신들로, 이들을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이라 합니다.

모두 다섯 개조의 항목으로 된 한일협상조약 혹은 을사조약의 주요 내용은 대한제국의 식민화를 위해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統監府와 이사청理事廳을 두어 내정內政을 장악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 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는 보호국이나 사실상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을사조약을 기초로 개항장과 13개의 주요 도시에 이사청이, 11개의 도시에 지청支廳이 설치되어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기초가 마련되었으며, 통감부는 병력동원 권리와 시정 감독권 등을 보유한 최고 권력기관으로 군림했습니다.

언론인 장지연張志淵(1864~1921)은 11월 20일자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을 발표하여 일본의 흉계를 통박하고 그 사실을 널리 알려 국민을 크게 통분시켰고, 민영환, 조병세 등은 의분을 참지 못해 자결하여 국민의 애국심에 불을 붙였으며 이어서 을사오적신에 대한 물리적 공격, 전국적인 의병운동 등이 일어났습니다. 장지연은 그 후 변절하여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구실을 한 <매일신보>에 고정 필진으로 참여해 친일親日 경향의 시와 산문을 발표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 순응하여 협력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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