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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의 세계사 - 왜 우리는 작은 천 조각에 목숨을 바치는가
팀 마샬 지음, 김승욱 옮김 / 푸른숲 / 2022년 1월
평점 :
<지리의 힘>의 저자 팀 마셜이 <깃발의 세계사>로 다시 돌아왔다. 이 두
책의 첫 느낌은 전혀 다르지만 실제론 적절한 연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리와 깃발은 한 민족을 지탱하는 기둥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가속화되는 세계화와 난민 문제는 다원화를 통해 정체성을 해체하고 있다. 다원화로 인한 해체는 정체성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이루어지고, 민족도 해체된다.
근대 국가의 중심 정체성인 민족이 해체됨으로써 사람들은 궁극적인 정체성의 축소를 느끼게 되고, 포퓰리즘과 민족주의의 발흥은 이런 이유로 다시금
이루어진다. 강력한 민족주의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현실 속에서("Make America Great Again!"), 깃발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그렇기에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국기란 국가의 상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나라는 국기를 그 어떤 보물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
땅에 닿아서도 안되고, 낡은 국기는 장례식과 같은 예식을 갖춰 불태운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자란 한국인으로서, 국기의 신성함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국기의 신성함이란 근대 국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상징으로서, 영토에 감정을 더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압록강은
그냥 강이지만 국기가 걸리면 목숨을 걸고 건너야 하는 강이 된다. 38선은 허구의 경계이지만 국기가 걸림으로써 결코 건널 수 없는 땅이 된다.
영토에 깃발이 결합되면,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이를 통해 민족이 형성된다.
다원화로 인해 자기 나라가 외국화 되는 것에 대한 공포를 '실향 공포'라고 부르는데, 인구가 섞이면
자신들의 ‘자연스런’ 고향은 사라지는 것이다. 상징과 깃발의 힘은 줄어들고 있다. 유럽에서 난민 수용이 가장 많은 스웨덴의 국기는 기본적으로 십자군의
영향을 받았다. 그 십자군과 맞서 싸운 살라딘의 후예들이 십자군의 국기 아래 모여들고 있다(물론 이는 십자군 전쟁 때도 종종 일어났던 일이지만).
과연 스웨덴 국기는 다원화를 이겨낼 수 있을까. 스코틀랜드가 독립하게 된다면, 영국 국기는 어떻게 변해야 할까. 식민지 통치자가 대충 만든 국가들은
하나의 국기 아래 결집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새로운 국기를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또다른 새로운 완전한 정체성을 의미할까? 완전한 세계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국기에는 어떤 의미가 남을까.
한국은 국기에 대한 경례가 현대에도 이루어지는 몇 안되는 국가이다. 이렇게 강력한 민족주의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거대한 중국과 일본, 러시아의 존재, 38선의 존재, 그리고 난민을 철저히 배척하여 다원화를 늦추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인의
정체성은 부분적으로 북한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북한의 존재 덕분에 한민족은 해체되지 않고 있다. 다시금 '멸공'이 인기를 얻는 이유는 아닐까.
외국인 혐오가 전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국가인 한국은 다원화를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국 역시 흔들리고 있다. 문화적 세계화의
폭격 아래, 우리는 더이상 한국인만의 특별한 문화적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한국인이지만, 미국인이나 유럽인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한국의
국기는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올림픽과 월드컵은 주기적으로 국기 아래 국민을 뭉치게 만들어 다원화에 대항하는 수단이 되곤 한다.
그러니 한국으로부터 외국으로 귀화한 선수들은 민족주의에 정말 커다란 타격을 준다. 그들이 여전히 한민족이라고 주장하게 되면, 국기의 허구성이 강조되고,
그들이 더이상 한국인이 아니라고 하게되면, 민족의 허구성이 강조된다. 다원화는 막을 수 없는 변화이다. 상징은 변화한다. 이 책의 소제목
"왜 우리는 작은 천 조각에 목숨을 바치는가"는 구시대적이다. '성스러움', 즉 목숨을 바칠만한 그 어떤 것은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 국가, 혁명은 몰락했다. 깃발은 목숨을 잃어가고 있다.
민족과 국기가 영원히 사라지는 날이 올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정체성의 핵심이 사라지게 되면
더이상 사람들은 그 불안함을 견딜 수 없다. 우파 포퓰리즘과 혐오의 백래쉬는 이러한 맥락에서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띈다.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러 혐오와 더불어 민족의 재결합을 주장한다. 가깝게는 태극기부대부터, 아주 오래전으로의 회귀를 뜻할 때도 있다. 중동에서는 중세로의
회귀를 뜻하는 깃발이 나타나기도 한다. 현대의 모든 혐오는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그 중심에는 민족과 그 상징인 깃발이 나타난다. 우리는
국가에 더이상 목숨을 바치지는 않지만, 국가가 주는 안정적이고 완전한 정체성으로의 복귀를 희망한다. 국기의 역사는 그래서 중요하다. <깃발의
세계사>는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 이 시점에서 아주 중요한 책이 된다.
<빅뱅이론>에서 쉘든이 깃발의 역사를 촬영하곤 한다. 그만큼 깃발의 역사는 너드하고 오타쿠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에게나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서 서술한 것처럼 현대에 가장 중요한 것이 민족의 해체이며, 깃발 아래의 재결집이다.
우리는 이제 깃발의 역사를 다시 공부해야 한다. 덤으로 영토와 지리 공부를 <지리의 힘>을 통해 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