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우리나라에 큰 인물이 났다”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된 후 안창호는 대한사람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1907년 스물아홉 살의 나이로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그는 환국길에 동경에서 유학생들 가운데 저명한 인물들을 만났습니다. 그때 동경에는 1905년 서북지방 출신 유학생들이 결성한 사회운동단체인 태극학회太極學會가 있었습니다. 1895년 결성된 대조선유학생친목회大朝鮮留學生親睦會와 그 뒤를 이은 1898년의 제국청년회帝國靑年會가 해산된 이후 일본에서 처음 조직된 재일在日 유학생단체였습니다. 처음에는 후배 유학생들의 편익을 도모하고 선후배간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점차 출판을 통한 계몽운동이 활성화되었고, 이는 다시 국내의 계몽운동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1906년 8월 조직이 정비되어 학회지인 <태극학보太極學報>를 창간하고 어학강습소도 태극학교太極學校로 명명했습니다. 태극학회는 1909년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에 통합되면서 발전적으로 해소되었습니다.
이광수는 안창호가 태극학회의 간부를 방문하고 “그가 주최한 학생회에서 일장의 강연회를 행하였으니, 이것은 청중에게 우리나라에 큰 인물이 났다 하는 감격을 크게 주었다”고 적었습니다. 이광수는 안창호가 “동경에서 첫 명성을 높인 것이 한 원인이 되어서 서울에 들어오는 길로 전 사회의 주목을 끌었다”고 적었습니다.
안창호는 서울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언론계의 지도자 유근, 장지연張志淵, 박은식 등과 관계官界의 선각자 유길준 등과 청년 장교요 지사들인 이갑, 이동휘, 노백린 등과 이동녕, 이시영, 전덕기, 최광옥, 이승훈, 유동열, 유동주, 김구 등과 의를 맺었습니다.
탁지부 주사로 임명되어 김홍집金弘集의 온건 개화파 내각에 참여했던 석농石儂 유근柳瑾(1861~1921)은 총리대신 김홍집을 비롯한 어윤중 등 갑오내각 대신들이 척살되자 자리에서 물러나 언론과 교육, 그리고 계몽운동 단체에 참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조국 근대화와 자주화에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박은식朴殷植(1859~1925)은 1882년에 상경해 7월의 임오군란壬午軍亂을 목격하고 시무책을 지어 국왕에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하여 태천泰川의 큰 학자 박문일朴文一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1888년부터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일어날 때까지 6년간 능참봉을 한 것이 그의 관직생활의 전부였습니다. 1898년 9월 남궁억南宮檍, 유근, 나수연羅壽淵 등이 <황성신문 皇城新聞>을 창간한 후에는 장지연과 함께 주필이 되었습니다. 1904년 7월 양기탁梁起鐸과 베델Bethell, E.T.(裵說) 등에 의해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자, 양기탁의 추천으로 이 신문의 주필을 지냈습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제목의 논설을 써서 일제를 비판했고, 이에 일제는 <황성신문>을 정간시켰습니다. 1906년에 복간되었으나 장지연이 복귀하지 못하자, <황성신문>을 지키기 위해 1910년 8월까지 이 신문의 주필로서 활동하면서 <대한매일신보>에는 주로 객원으로서 논설만 기고했습니다. 1907년 4월 안창호를 포함하여 양기탁, 전덕기全德基, 이동녕李東寧, 이동휘李東輝, 이회영李會榮, 이갑李甲, 유동열柳東說 등을 비롯한 다수의 애국계몽 운동가들에 의해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해 원로회원으로서 교육과 출판 부문에서 활동했습니다.
한말의 개화운동가이며 최초의 국비유학생으로 미국에서 공부한 유길준兪吉濬(1856~1914)은 귀국길에 일본에 잠시 머물며 김옥균을 만났는데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개화당으로 몰려 체포되어 구금되었습니다. 구금기간에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하기 시작하여 1889년에 탈고했습니다. 그는 <서유견문>을 통해 서양의 근대문명을 조선에 소개하고 조선의 실정에 맞는 자주적 실상개화實狀開化를 주장했으며, 정부의 역할을 중시한 개혁론을 전개하여 갑오개혁의 이론적 배경을 제시했습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외무참의外務參議 등을 역임하며 개혁을 주도했고, 1895년 김홍집 내각의 내무협판內務協辦을 역임하면서 태양력 사용, 종두법 실시, 우체사 설치, 소학교 설치 등을 추진했습니다. 또한 1896년 <독립신문> 창간을 적극 후원하고 그해 내부대신에 올랐으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내각이 해산되자 겨우 목숨을 건져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1907년 순종황제의 특사로 귀국했습니다. 국권피탈 후 일본정부에서 남작男爵의 작위를 주었으나 거절했으며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교육과 계몽사업에 헌신했습니다. 모든 국민을 선비로 만든다는 국민개사國民皆士를 실천목표로 정하여 흥사단興士團을 발족하여 활동했고, 국민경제회國民經濟會를 설립했으며, 계산학교桂山學校를 설립했습니다.
독립 운동계의 풍운아로 불린 이갑李甲(1877~1917)은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간부로 활동했으며, 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그 해 10월에 사비로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조成城 학교에서 입학하여 1901년 12월 4일에 졸업한 후 일본 근위사단 보병 제1연대에 배속되어 후보생으로 군무를 익혔습니다. 그리고 그 해 12월 1일에 일본 육군사관학교 15기생으로 입학했는데 그의 나이는 26세였습니다. 이갑은 을사늑약 이후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민영휘에게 복수할 때가 왔음을 절감하고 육혈포六穴砲를 품고 단신으로 민영휘의 집으로 뛰어 들어가 옛날 그가 빼앗아간 40경 토지와 그간 10여 년 간 추수하여 먹은 돈을 전부 내놓을 것을 압박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민영휘가 상해로 도망가 이를 피해보고자 했으나 이갑은 상해까지 쫒아가서 그에게 압박을 가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농토를 도로 찾고 3만원의 돈까지 변상 받아 내었습니다. 이갑은 안창호가 주도하여 결성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다른 군인 출신 애국지사들과 함께 참여했습니다.
빈농 출신으로 사관양성소를 졸업한 후 육군참위에 임관된 이동휘李東輝(1873~1935)는 광무황제에 의해 삼남검사관三南檢査官으로 임명된 후 지방 진위대의 부패장교와 지방 관리들을 엄격하게 처벌함으로써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 후 국방요충지인 강화도 진위대장으로 부임해서도 군인들은 물론 도 인민들까지도 부형父兄과 같이 애모할 정도로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에는 대중을 자각시켜 구국운동에 나서게 하기 위해 교육 문화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기독교야말로 쓰러져 가는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종교라는 신념에서 기독교 전도활동에 힘썼습니다. 그는 서북학회西北學會와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의 지도자로서 구국운동을 전개했으며, 1909년 이후에는 캐나다 장로교선교회의 전도사로서 함경도 일대에서 기독교 전도활동도 했습니다.
평생을 무인武人으로서 항일무장 전투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헌신한 노백린盧伯麟(1875~1926)은 동경에 있는 경응의숙慶應義塾 보통과와 특별과를 마치고 1898년 11월 성성학교成城學校를 졸업한 뒤 다시 일본 육군사관학교 11기생으로 입학하여 신식 군사학을 배웠습니다. 1900년 10월 귀국하여 당시 원수부元帥府 회계국 총장인 민영환閔泳煥의 주선으로 어담魚潭, 윤치성尹致晟, 김형섭金亨燮 등과 함께 육군참위에 임관되고 한국무관학교 보병과 교관이 되어 군대양성에 진력했습니다. 1904년에는 러일전쟁이 일어남에 관전단觀戰團이 되어 중국의 다이렌大連 뤼순旅順 등지를 돌아보았으며 그 후 부위 정위 참령 부령 정령으로 승진했습니다. 그는 육군무관학교장을 비롯해 헌병대장, 육군 연성학교장을 역임했습니다. 1907년 8월 1일 한국군대 해산으로 육군연성학교가 폐교되고 그는 군부 교육국장으로 전임되어 정령正領의 계급으로 군복을 벗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는 그와 전덕기, 양기탁, 이동녕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여 군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에 앞장섰습니다.
양반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한 이동녕李東寧(1869~1940)은 부친을 도와 원산에서 광성학교를 세워 교육 계몽운동을 펼쳤고, 1896년 7월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이 조직한 독립협회에도 가담했으며, 하1898년에는 만민공동회운동에 참여하여 개화 개혁운동을 전개하다 옥고를 치렀습니다. 190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상재, 전덕기 목사 등과 함께 YMCA운동을 전개했으며,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의 인도로 기독교 감리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를 결성에 참여했습니다.
일찍부터 관직생활을 시작하고, 한말 정국 속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은 이시영李始榮(1869~1953)은 22세 되던 1891년에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교리, 승정원부승지, 궁내부수석참의 등을 차례로 역임했습니다. 37세이던 1906년에 평안남도 관찰사에 등용된 것으로 보면 그에 대한 고종황제의 신망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07년에는 중추원 칙임의관勅任議官이 되었고, 1908년에는 한성재판소장, 법부 민사국장, 고등법원판사 등 법부의 주요 직책을 역임했습니다. 1907년 형 이회영을 비롯하여 안창호, 전덕기, 이동녕 등이 신민회를 비밀리에 조직할 때 그는 관직생활을 하면서도 이에 참가했습니다.
상동교회尙洞敎會의 목사 전덕기全德基(1875~1914)는 1892년 스크랜톤Scranton, M.F. 선교사의 감화를 받아 1896년 세례를 받고 상동교회에 입교했습니다. 그는 1896년 서재필에 의하여 조직된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독립 운동에 나섰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국감리교청년회연합회(당시의 엡웰 청년회)를 소집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전개했습니다. 1906년 이준李儁, 박정동朴晶東과 함께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창설했으며, 이듬해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를 중심으로 여러 동료들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고, 그 중앙위원中央委員이 되었습니다.
최광옥崔光玉(1879?~1910)은 1904년 숭실학교를 제1회로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사범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곳에서 일본의 한인유학생들이 결성한 태극학회太極學會의 회장을 지내며 애국계몽운동을 했습니다. 1906년 귀국하여 평양의 숭실학교와 서울의 경신학교儆新學校, 의주義州의 양실학교養實學校 등에서 교편을 잡으며 교육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07년 안창호를 비롯하여 여러 동지들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고 평안지부를 맡았습니다.
일본에 건너가 세이쇼학교成城學校를 거쳐, 190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유동열柳東說(1877~?)은 졸업과 동시에 일본 근위사단에서 실무를 쌓았고,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대한제국 파견 무관 자격으로 일본군에 종군하여 선천부근에서 러시아군과 싸웠습니다. 그 뒤 참령參領으로 승진하여 시위대 기병대장과 참모국 제2과장을 역임했으나,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면서 지하운동에 가담했습니다. 이때부터 안창호를 중심으로 신민회 조직에 참여하여 배일구국운동을 펼치고, 서북학회西北學會를 통한 계몽활동을 전개했습니다. 1909년 안중근安重根의 이토伊藤博文 살해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일본헌병대에 잡혔으나, 혐의가 없어 석방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