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섬을 바라보며

 

 

 

밤섬을 바라볼 때마다 중학교 시절 친구가 헤엄쳐 건너가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수영이 서툴러 하마터면 물귀신 될 뻔했을 때 그 친구가 살렸습니다.

양화대교가 없던 시절의 이야깁니다.

한강에 다리라고는 하나밖에 없었을 때 이야깁니다.

밤알처럼 생겼다고 해서 밤섬栗島이라 부르던 연유도 몰랐던 때 이야깁니다.

그곳에 맑은 모래가 있었다는 건 기억나지만, 율도명사栗島明沙라 하여 마포팔경에서도 으뜸이었다는 건 퍽 후에 알았습니다.

연산군이 즉위한 후 한성부판윤을 거쳐 공조판서, 대제학을 겸임한 성현成俔(1439~1504)이 타계하던 해에 지은 필기잡록류筆記雜錄類에 속하는 <용재총화慵齋叢話>는 고려로부터 조선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형성, 변화된 민간 풍속이나 문물 제도·문화·역사·지리·학문·종교·문학·음악·서화 등 문화 전반에 걸쳐 다룬 책입니다.

<용재총화>는 한양 명승지와 그 밖에 성 밖의 명승지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밤섬栗島에 관해 조선초기부터 뽕나무를 심어 잠업이 성행한 지역이었고, 서울장안에 뽕잎 값이 비쌌을 때 이 섬에서 뽕을 공급했다고 했습니다.

밤섬에 관한 풍습이 명종실록 명종 11년(1556년) 4월 조條에 기록되어 있는데 섬 주민의 생활방식이 문란한 것으로 비쳐져있습니다.

이는 외부와 교통이 제한되어 남의 이목을 덜 의식했기 때문에 문란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현재 밤섬은 두 토막으로 윗밤섬과 아랫밤섬으로 불립니다.

두 토막이 난 것은 1968년 2월 여의도를 개발하면서 한강의 흐름을 좋게 하고 여의도제방을 쌓는 데 필요한 잡석 채취를 위해 밤섬을 폭파·해체했기 때문입니다.

밤섬의 대부분이 그때 사라졌습니다.

그 후 한강 퇴적물이 쌓이면서 나무와 풀이 우거지기 시작했고 새들이 모이면서 도심 속의 철새도래지가 되었습니다.

율도명사栗島明沙로 마포팔경에 속하고, 뽕나무로 잠업이 성행하고, 섬 주민의 생활방식이 문란한 것으로 소문났던 밤섬은 개발이란 미명 하에 몸체 대부분을 잃고 두 토막이 났습니다.

강을 개발한다는 강의 원래 모습을 영원히 사라지게 하는 일입니다.

다행히도 밤섬에 사람들을 거주하지 못하게 했으므로 밤섬은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하여 철새도래지로 새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자연自然을 보호한다는 것은 사람이 손을 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않을 때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자연自然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아름다운 것만큼 아름답게 꾸밀 수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화가가 그린 그림이라도 자연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습니다.

밤섬을 바라보며 중학교 시절 친구가 헤엄쳐 건너가던 모습을 머리에 떠올려봅니다.

맑은 모래가 펄쳐진 모습을 그려봅니다.

뽕나무가 무성한 모습을 그려봅니다.

섬 주민들이 밥 짓고 빨래하던 모습을 그려봅니다.

밤섬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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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회 총회장이 된 안창호

 

 

 

안창호가 로스앤젤레스의 집에 5년 만에 돌아왔을 때 그가 없는 동안 부인은 삯빨래로 생활비를 벌어 자녀들을 양육한 것을 알았습니다. 안창호는 곧 토목공사의 인부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체력으로는 그런 근육노동을 오래 계속 할 수 없어 미국인 주택의 청소 인부가 되었습니다.

안창호 부부가 저축한 돈이 1000달러가 되었을 때 안창호는 불행한 기별을 들었습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시작된 이갑의 엄지손가락의 신경마비가 전신 불수로 화하여 미국에 오려다가 뉴욕에서 상륙 거절을 당하고 시베리아로 돌아가 병으로 눕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안창호는 병석에 누운 이갑을 위해 울었습니다. 이갑은 민영준에게서 받아낸 거액의 재물을 애국운동에 써버리고 말았습니다. 군대 해산 직전까지 참령으로 육군대신 부관이었던 이갑은 자신의 재산은 동지의 공유재산이라면서 친구가 옷이 없다면 돈을 주고, 여비가 없다면 돈을 주었습니다. 그는 불행한 벗에게 늘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광수는 이갑이 나이로나 사회적 지위로나 안창호의 선배이면서도 늘 안창호를 추존하고 자기는 그보다 일보 뒤에 섰다고 했습니다. 안창호는 부인과 의논하여 1000달러를 이갑의 치료비로 보냈습니다. 이광수는 이갑이 1000달러를 받고 어느 사람에게 “도산은 운하 공사인부가 되어서 벌고 도산 부인은 삯빨래를 하여서 번 돈이래” 하고 눈물을 떨구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재류 동포들은 안창호로 하여금 국민회國民會 총회장을 맞게 했습니다. 국민회는 1909년 2월 1일 미국 본토의 공립협회共立協會와 하와이의 합성협회가 합동하여 창립한 단체입니다. 1908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張仁煥, 전명운田明雲이 한국 정부 외교고문인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하자 재미 교포들의 항일 열기가 고조되었고, 조직적인 독립 운동을 펼치기 위해 난립한 한인단체들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이에 공립협회 대표 여섯 명과 합성협회 대표 일곱 명이 두 단체를 통합하기로 결의했고, 조직은 총회와 지방회로 구성되어 본토에는 북미지방총회를, 하와이에는 하와이지방총회를 두고 각각 <신한민보新韓民報>와 <국민보國民報>라는 기관지를 발간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했습니다. 1909년 2월 10일에 창간한 <신한민보>는 국문으로 매주 수요일에 발간되어 국권회복운동에 관련된 논설과 기사를 싣고 국내 소식과 재외동포에 대한 소식도 광범위하게 실었으며,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정책에 대한 비판도 끊임없이 행했습니다.

국민회는 1910년 2월 또다시 1907년 3월 2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된 독립 운동단체인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와 통합하여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 재조직되었습니다. 1911년에는 조직을 확대하여 샌프란시스코에 중앙총회를 설치하고 그 밑에 북미, 하와이, 시베리아, 만주 등에 지방총회를 두었으며, 각 지방총회 관할 아래 각각 10여 개의 지방회가 있었습니다.

대한인국민회는 1차 세계대전 후 이승만을 워싱턴으로 파견하게 되며, 2차 세계대전 중에는 한족연합회의 발안과 명의와 재력으로 중경 임시정부의 경비를 부담하고, 구미 위원부를 설치하여 이승만을 위원장으로 하여 그 경비를 부담하게 되며, 해방 후에는 15명의 대표를 한국에 파견하여 건국 사업을 돕게 됩니다.

안창호는 국민회 총회장으로 선거되었습니다. 안창호의 “목표는 회원의 품격을 높여 교거僑居하는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고 근검 저축을 장려하여 각 회원이 독립하고 풍족한 생계를 가지게 하며, 단체적으로 거류국 관민의 신뢰를 얻어 동포의 권익을 보호할뿐더러 그렇게 함으로써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인을 간섭하는 구실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안창호는 1년에 5달러의 의무금을 회원에게 징수하여 수입 지출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이전에는 의연금이란 명칭으로 수시로 무제한으로 거두었는데, 안창호는 이것은 회원에게 불쾌감을 주고, 또한 동포의 부력을 쌓는 것을 저해하는 것이라 하여 의연금을 폐지했습니다. 안창호는 1년에 5달러의 의무금만으로 1년의 예산을 세웠습니다. 그는 수입이 없는 지출은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급한 일이라 하여 민중의 열정을 자격刺激하여 일시적으로 거액의 자금을 내게 하는 것은 민심을 떠나게 하고 민력을 피폐케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민족 사업은 장원한 일이므로 민중을 흥분시켜서 일시적 효과를 거두는 것은 민중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안창호는 생각했습니다.

생활 개선에 대하여서는 안창호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 했던 모양으로 거처의 청결을 강조했습니다. 이웃 서양인보다 더 깨끗하게 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예의답게 할 것도 장려했습니다. 절대로 거짓말 하지 말고 서양인과의 교섭과 거래에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고 한 번 언약한 것이면 이해를 불계하고 신용을 지킬 것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역설했습니다. 그는 “한국인의 상점에서는 안심하고 물건을 살 수 있다” "한국인의 노동자는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다“ ”한국인의 언약이라면 믿을 수 있다“ 에 세 가지 신용만 얻으면 모두가 돈도 벌 수 있고 남에게 대접도 받을 수 있을 뿐더러 우리 민족 전체의 명예를 재류 국민에게 인상印象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고 동포에게 충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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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복근에 통증이 생길까요?

 

요추vertebrae lumbales(허리등뼈)의 회전은 일차적으로 옆구리의 복사근에 의해 전개되고 척추기립근deep paraspinal muscles에 의해 보조를 받습니다. 배가 굳으면 심장으로 피가 가지 못합니다. 다리까지 붓고 살이 찝니다. 피를 심장으로 흐르게 하려면 복부와 종아리의 심부근육인 가자미근soleus muscle(넙치근 혹은 비근)을 이완시켜야 합니다.

복근운동 하는 도중에 본근에 통증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근육의 갑작스러운 긴장으로 생기는 통증입니다. 복근운동을 하다가 허리에 통증을 느낀다면 복근의 근력이 없어 허리힘을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근육이 충분히 이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운동을 하면 근육뿐이니라 시신경에도 악영향을 미치거나 허리디스크가 걸릴 수도 있으므로 통증을 느끼면 당장 운동을 중단해야 합니다.

복근운동을 매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복근만 더 아프게 되고 근육을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복근운동은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복근운동 후에는 허리운동을 병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복근운동 후에는 유산소(런닝 20분)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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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의 흥사단가 그리고 신민회의 불화

 

 

 

안창호는 거국가去國歌의 가사처럼 태평양과 대서양을 몇 번이나 건넜고, 시베리아, 만주로 다녔습니다. 그리고 노래의 가사처럼 그의 몸은 부평같이 어느 곳에 가 있더라도 나라를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것을 위해 일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 경찰의 귀를 피해가며 거국가를 부르면서 울었다고 합니다.

안창호가 작사한 노래가 수십 편이 있는데, 거국가 외에도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는 애국가愛國歌 그리고 흥사단가興士團歌가 가장 유명합니다. 흥사단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상 나라 빛내랴고

충의남녀 일어나서

무실역행 깃발 밑에

늠름하게 모여드네

부모국아 걱정 마라

무실역행 정신으로

굳게 뭉친 흥사단이

네 영광을 빛내리라.

 

안창호가 망명한 뒤 1910년 8월 29일에 대한제국은 일본에 병합되어 4000여 년 국맥이 일시에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한국을 병합한 것은 일본의 역사에 가장 큰 죄악이었습니다. 안창호는 망국의 책임을 국민 각자가 질 것이라는 말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조국을 망하게 한 것은 이완용만이 아니다. 나도 그 책임자다. 내가 곧 그 책임자다.

 

안창호는 망국의 책임을 일본에게 돌리고, 이완용에게 돌리고, 양반계급에게 돌리고, 조상에게 돌리고, 유림에게 돌리고, 민족운동자에게 돌리고 그 책임을 아니 질 자는 오직 나 하나뿐인 것처럼 장담한다면서 우리 민족 각 사람이 힘 있는 국민이었다면 일본이 어찌 덤비며 이완용이 어찌 매국조약에 도장을 찍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완용을 책하는 죄로 우리 자신을 죄罪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저마다 내가 망국의 책임자인 동시에 또한 나라를 다시 찾을 책임자라고 자각할 때가 우리나라에 광복의 새 생맥이 돌 때요.” 이처럼 안창호는 무슨 일이 잘못된 데 대하여 남을 원망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그가 원망하고 책망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 있으니 그것은 곧 저라고 보았습니다. 산둥성山東省 청도에서 망국의 슬픈 소식을 들은 안창호는 통곡했으나 실망하지 않고 “광복은 내가 하기에 있다. 내가 하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각자의 경로를 통해 국내를 탈출한 신민회 동지들은 청도에 모여 독립 운동 전개 방향을 심도 있게 논의했습니다. 안창호는 길림지방이나 러시아, 만주국경 지역에 토지를 사서 우선 농지를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신문, 잡지를 경영해 우선 선전활동에 치중하자는 논의도 있었습니다. 청도회담에서 논의된 최종안은 이종호가 3천 달러를 내기로 하고 길림성 밀산현에 땅을 구입해 개척한 후 사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청도회담이 끝난 후 안창호가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을 때 재러 한인사회에는 강제 병합조약 체결 소식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안창호는 연해주 각지를 돌며 한인의 권익보호와 민족통합을 주선하고, 1911년 2월경 북만주 밀산의 개척지를 답사했으며 안중근 가족이 거주하는 목릉을 돌아보았습니다. 안창호는 그 해 9월 2일 페테르부르크에서 이갑과 작별하고 치타, 이르크츠크, 페테르부르크를 거쳐 베를린에 잠깐 머문 후 런던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갔습니다. 나라를 잃고 망명하는 그는 국경을 넘을 때 여행권 사증이 있을 적마다 국적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한국 신민이라는 옛날 여행권은 가끔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더군다나 일본과는 동맹국이었던 영국에서는 ‘일본 신민’이라고 선언하기를 요구했으나 정치 망명가라는 것으로 무사히 통과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안창호는 미국에서 발행한 ‘무여행권without passport’이라는 여행권으로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국적 없는 백성이란 뜻입니다.

그는 1912년 7월에 둘째 아들 필선必鮮을 얻었으며 그의 열성으로 대한인국민회도 활기를 띠고 발전해나갔습니다. 대한인국민회는 재미 한인들을 일본인으로 취급하려는 일본정부에 대항해 캘리포니아 주정부를 상대로 한인들 문제에 대한 자문에 응했으며, 미국에 새로 들어오는 한인들을 위해 출입국 관계를 보증하는 준정부적인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중앙총회 아래 하와이, 북미, 만주, 시베리아 등지에 지방총회를 두고, 각 지방총회 아래에 160여 개의 지방회 조직을 거느렸습니다. 멕시코와 쿠바, 필리핀에까지 지방회 조직을 둔 대한인국민회조직은 명실상부한 세계 한인의 네트워크를 구축했습니다.

신민회新民會는 1907년 안창호의 발기로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비밀리에 조직한 단체였습니다. 중심인물은 회장 윤치호, 부회장 안창호, 장지연, 신채호, 박은식, 이동휘, 이갑, 이종호, 이승훈, 안태국, 이동녕, 이회영 등이었습니다. 신민회의 활동은 1909년을 전후하여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합하려고 애국인사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강화하면서 벽에 부딪치기 시작했습니다. 한일합병이 선언된 후, 신민회의 운동방향을 새로이 모색하려는 회의가 나라 안팎에서 열렸습니다. 양기탁, 이동녕, 안태국, 김구 등 나라 안에 있던 신민회원은 서울의 양기탁 집에서, 나라 밖의 망명자들인 안창호, 신채호, 이갑, 유동열, 이종호, 김지간, 조성환, 이강, 박영로, 김희선 등은 중국 청도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두 회의에서 안창호의 준비론이 소수로 밀리고 독립전쟁론이 결정되었고, 이에 따라 신민회는 ‘독립전쟁에 대비하는 만주 이민계획과 무관양성’을 위해 청년들을 모아 만주로 이주시키고 이를 지원할 자금조달 책임을 지역별로 분담하여 비밀리에 활동했습니다.

이광수는 회의 결과가 안창호가 바라던 바와 같지 못했다면서 “의론이 합치 아니 되는 점은 급진과 점진에 관하여서니 이것은 차후로도 줄곧 양립한 대로 기미 3.1운동에 이르렀다”고 적었습니다.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상황을 전했습니다.

 

급진이라 함은 서, 북간도와 러시아령에 있는 동포의 재력과 인력을 규합하여 당장에 일본에 대한 무력적 독립 운동을 일으키자는 것으로 이동휘가 이 주장의 대표자요. 점진론이란 것은 실력 없는 거사를 하면 달걀로 돌을 때리는 것이라 성공할 희망이 없을뿐더러 첫째, 재외동포의 경제력과 인명을 소모하고, 둘째, 국내 동포에 대한 적의 경계와 압박이 더욱 엄중하여 문화와 경제적 향상이 저지될 것이니, 우선 서, 북간도, 러시아령, 미주 등에 재류하는 동포의 산업을 진흥시키고 교육을 보급시켜서 좋은 기회가 돌아오면 큰 힘을 낼 수 있도록 준비공작을 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물을 것도 없이 도산의 주장이었다.

 

이동휘는 “나라가 망한 이때에 산업은 다 무엇이고 교육은 다 무엇이냐. 둘이 모이면 둘이 나가 죽고 셋이 모이면 셋이 나가 죽어서 싸울 것이라” 하며 자기 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광수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안창호는 회담을 길게 끌어서 동지들이 망국의 격분에서 생긴 정신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려고 혹은 관광, 혹은 주연, 이 모양으로 일정을 연장하였으나,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고 모두 청도를 떠나서 각자의 길을 걸으려 하였다.”

이광수는 만일 이종호가 안창호의 뜻을 좇아 그의 사재를 기울여서 안창호의 경륜대로의 시설을 하기에 동의했다면 일의 방향이 약간 변할 듯도 했으나 이종호도 안창호의 실력양성론보다 즉전즉결론에 기울어지고 말았다고 증언했습니다. 양측 주장의 결렬을 조화하려고 애쓴 사람은 성격상, 경력상 이갑이었습니다. 이갑은 서울에 있을 때부터도 언제나 조화의 임무와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도 효과를 거두지 못해 청도에서의 회합은 분열의 결과로 끝을 맺고 안창호와 이갑은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를 향해 떠나고, 다른 사람들도 다 각기 목적하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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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양자생물학quantum biology은 양자물리학의 발달로 생긴 새로운 학문입니다. 양자생물학은 양자론의 기초를 이루는 물리학이론의 체계인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에 기초하여 생물학적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학문입니다. 양자역학은 고전역학과 달리 확률론적probabilistic 입장을 취하는데, 확률론적 입장이란 현재 상태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있더라도 미래에 일어나는 사실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말합니다. 이는 독일의 이론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1901~76)의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에 따른 것인데, 하이젠베르크는 두 개의 양을 동시에 무한히 정밀하게 측정하는 건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이유가 두 개의 양의 측정 정도精度의 한계가 서로 일정한 관계에서 제약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면 한 개의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각각 관측량으로서, 상태를 나타내는 함수에 대한 연산으로 나타나는데, 그 연산 사이의 일정한 객관적 관계가 관측값의 관계로서는 불확정성 관계가 되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양자생물학에는 주로 생물학적으로 중요한 분자의 전자상태를 양자역학에 의거하여 계산, 해석, 표현하고 이것에 의한 분자의 특성이나 생명현상에서의 거동을 설명하는 연구가 많습니다. 1980년대 이후 반경험적 분자궤도법semiempirical molecular orbital method의 발달 및 보급을 통해 정도가 높은 전자상태의 계산값을 많이 얻게 되었으며 생물학에의 기여가 기대되고 있습니다.

러시아계의 미국인 생물학자 글렌 라인Glen Rein은 데이비드 봄David Bohm의 양자이론을 생물학에 접목시켰습니다. 글렌 라인의 양자생물학의 주요 개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생물은 몸과 마음이 합쳐진 이중구조로 되어있다. 이때 마음은 확실히 존재하는 실체로서 반드시 뇌에 위치하는 것은 아니라 몸과 비슷한 크기의 공간을 차지하며 몸의 공간과 겹치면서 존재한다.

둘째, 생물의 몸은 장기, 조직, 세포, 분자 등과 같이 눈에 보이는 부분explicate order이 있는가 하면, 원자 이하의 전자, 양성자 및 중성자, 에너지, 파동 그리고 초양자장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은 부분implicate order이 있다.

 

라인의 양자생물학의 핵심은 생물은 눈에 보이는 육체, 눈에 보이지 않는 육체 및 마음이라는 세 가지 구성성분으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눈에 보이지 않는 육체에 대하여 라인은 별도로 정보-에너지장information-energy field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라인은 실제 암세포 치료에서 마음이 가진 에너지를 증명하고자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는 암세포에 “다시 자연 상태로 돌아가라”는 암시를 지속적으로 부여한 뒤 그 결과를 관찰했는데, 약 40% 이상이 치료 효과가 나타났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마음이 정보가 실린 파동에너지로 물질의 입자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이 마음이 인체의 모든 장기와 연결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슬프면 눈물이 나오고 기쁘면 웃음이 나오고 화가 나면 얼굴이 빨개지거나 혈압이 올라가는 증상이 나타나나는 경우가 모두 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독일 신경정신의학자 하인리히 슐츠Heinrich Schultz는 이러한 현상을 토대로 자율훈련법autogenic training을 고안했다. 이는 자기 암시를 통해 전신의 긴장을 풀고 심신 상태를 조절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방법입니다. 마음은 인체의 뇌신경계, 면역계, 호르몬계를 변화시킵니다.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아무 효능이 없는 약을 먹고도 환자의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인해 실제로 증상이 호전되는 현상이 종종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마음은 유전자 코드의 배열과 유전자의 활동성을 변화시킵니다. 스탠퍼드 대학 세포 생물학자 브루스 립튼은 암환자들을 치료하면서 마음속에 두려움보다 좋아진다는 확신이 생겼을 때 유전자 질서가 재배열되는 현상을 구체적으로 증명했습니다.

양자생물학은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문입니다. 마음이 몸을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문입니다. 글렌 라인은 마음을 다루는 의학을 심성의학mind medicine이라 칭했습니다. 건강에 문제가 생긴 사람들이 가진 어두운 마음의 대부분은 분노, 두려움 등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분노 뒤에는 “내가 옳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두려움 뒤에는 죄의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두려움과 분노를 지우기 위해 미국의 교육 심리학자인 해리 팔머Harry palmer는 '화해와 축복의 산책' 혹은 '화해의 언덕 오르기'라는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이는 아주 쉽고 단순하지만 매우 기적적인 치유 과정입니다. 즉, 산책하면서 목표지점으로 갈 때에는 내가 가진 생각과 행동을 속삭이면서 자기 모습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산책을 하고 돌아올 때에는 다른 사람을 축복해줍니다. 이어 세상의 모든 대상을 감사하게 바라보는 일을 반복하다보면 마음의 대전환이 일어나게 됩니다.

명상법도 중요한 하나의 방법입니다. 명상법은 어떠한 이미지나 생각, 기도나 명상할 때에 외는 주문인 만트라Mantra를 지어내는 과정입니다. 이는 카메라 조리개를 한 대상에게 집중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협심증이 심한 환자에게 숨을 내쉬면서 ‘평화’라는 말을 반복하게 했더니 심장 박동이 현저히 좋아졌습니다. 미국 포트워스 암연구센터의 방사선 종양학자 칼 사이먼튼Carl Simonton은 상상법을 개발했습니다. 그는 오레곤 대학 레지던트 시절 방사선 암치료 수업 중 획기적인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암환자인 연구 대상들을 A그룹과 B그룹으로 나누어, A그룹에는 일반 방사선 치료를 실시하고, B그룹에는 방사선 치료를 하면서 “암이 아이스크림 녹듯 사라진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일정 기간이 지난 뒤 B그룹 환자들은 A그룹에 비해 증세가 호전되었습니다. 신념 요법은 믿음이 핵심입니다. 중증 질환으로 투병을 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나는 중한 병이 있다. 그래서 나는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중한 병이 자신에게 있다는 믿음은 곧 몸에 반영됩니다. 때문에 환자 스스로 “아프지만, 다 나았다”는 마음가짐을 의도적으로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밖에도 생물체의 자기 제어, 즉 뇌파를 이용하여 생체의 신경, 생리 상태 등을 어떤 형태의 자극 정보로 바꾸어 정신 상태를 안정시키는 기법인 바이오피드백biofeedback, 웃음치료, 부정적인 상태를 긍정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언어와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신경언어프로그램NLP(Mertro-Linguistic Programmimg) 등 다양한 마음치료법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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