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의 흥사단가 그리고 신민회의 불화

 

 

 

안창호는 거국가去國歌의 가사처럼 태평양과 대서양을 몇 번이나 건넜고, 시베리아, 만주로 다녔습니다. 그리고 노래의 가사처럼 그의 몸은 부평같이 어느 곳에 가 있더라도 나라를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것을 위해 일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 경찰의 귀를 피해가며 거국가를 부르면서 울었다고 합니다.

안창호가 작사한 노래가 수십 편이 있는데, 거국가 외에도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는 애국가愛國歌 그리고 흥사단가興士團歌가 가장 유명합니다. 흥사단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상 나라 빛내랴고

충의남녀 일어나서

무실역행 깃발 밑에

늠름하게 모여드네

부모국아 걱정 마라

무실역행 정신으로

굳게 뭉친 흥사단이

네 영광을 빛내리라.

 

안창호가 망명한 뒤 1910년 8월 29일에 대한제국은 일본에 병합되어 4000여 년 국맥이 일시에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한국을 병합한 것은 일본의 역사에 가장 큰 죄악이었습니다. 안창호는 망국의 책임을 국민 각자가 질 것이라는 말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조국을 망하게 한 것은 이완용만이 아니다. 나도 그 책임자다. 내가 곧 그 책임자다.

 

안창호는 망국의 책임을 일본에게 돌리고, 이완용에게 돌리고, 양반계급에게 돌리고, 조상에게 돌리고, 유림에게 돌리고, 민족운동자에게 돌리고 그 책임을 아니 질 자는 오직 나 하나뿐인 것처럼 장담한다면서 우리 민족 각 사람이 힘 있는 국민이었다면 일본이 어찌 덤비며 이완용이 어찌 매국조약에 도장을 찍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완용을 책하는 죄로 우리 자신을 죄罪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저마다 내가 망국의 책임자인 동시에 또한 나라를 다시 찾을 책임자라고 자각할 때가 우리나라에 광복의 새 생맥이 돌 때요.” 이처럼 안창호는 무슨 일이 잘못된 데 대하여 남을 원망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그가 원망하고 책망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 있으니 그것은 곧 저라고 보았습니다. 산둥성山東省 청도에서 망국의 슬픈 소식을 들은 안창호는 통곡했으나 실망하지 않고 “광복은 내가 하기에 있다. 내가 하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각자의 경로를 통해 국내를 탈출한 신민회 동지들은 청도에 모여 독립 운동 전개 방향을 심도 있게 논의했습니다. 안창호는 길림지방이나 러시아, 만주국경 지역에 토지를 사서 우선 농지를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신문, 잡지를 경영해 우선 선전활동에 치중하자는 논의도 있었습니다. 청도회담에서 논의된 최종안은 이종호가 3천 달러를 내기로 하고 길림성 밀산현에 땅을 구입해 개척한 후 사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청도회담이 끝난 후 안창호가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을 때 재러 한인사회에는 강제 병합조약 체결 소식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안창호는 연해주 각지를 돌며 한인의 권익보호와 민족통합을 주선하고, 1911년 2월경 북만주 밀산의 개척지를 답사했으며 안중근 가족이 거주하는 목릉을 돌아보았습니다. 안창호는 그 해 9월 2일 페테르부르크에서 이갑과 작별하고 치타, 이르크츠크, 페테르부르크를 거쳐 베를린에 잠깐 머문 후 런던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갔습니다. 나라를 잃고 망명하는 그는 국경을 넘을 때 여행권 사증이 있을 적마다 국적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한국 신민이라는 옛날 여행권은 가끔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더군다나 일본과는 동맹국이었던 영국에서는 ‘일본 신민’이라고 선언하기를 요구했으나 정치 망명가라는 것으로 무사히 통과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안창호는 미국에서 발행한 ‘무여행권without passport’이라는 여행권으로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국적 없는 백성이란 뜻입니다.

그는 1912년 7월에 둘째 아들 필선必鮮을 얻었으며 그의 열성으로 대한인국민회도 활기를 띠고 발전해나갔습니다. 대한인국민회는 재미 한인들을 일본인으로 취급하려는 일본정부에 대항해 캘리포니아 주정부를 상대로 한인들 문제에 대한 자문에 응했으며, 미국에 새로 들어오는 한인들을 위해 출입국 관계를 보증하는 준정부적인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중앙총회 아래 하와이, 북미, 만주, 시베리아 등지에 지방총회를 두고, 각 지방총회 아래에 160여 개의 지방회 조직을 거느렸습니다. 멕시코와 쿠바, 필리핀에까지 지방회 조직을 둔 대한인국민회조직은 명실상부한 세계 한인의 네트워크를 구축했습니다.

신민회新民會는 1907년 안창호의 발기로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비밀리에 조직한 단체였습니다. 중심인물은 회장 윤치호, 부회장 안창호, 장지연, 신채호, 박은식, 이동휘, 이갑, 이종호, 이승훈, 안태국, 이동녕, 이회영 등이었습니다. 신민회의 활동은 1909년을 전후하여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합하려고 애국인사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강화하면서 벽에 부딪치기 시작했습니다. 한일합병이 선언된 후, 신민회의 운동방향을 새로이 모색하려는 회의가 나라 안팎에서 열렸습니다. 양기탁, 이동녕, 안태국, 김구 등 나라 안에 있던 신민회원은 서울의 양기탁 집에서, 나라 밖의 망명자들인 안창호, 신채호, 이갑, 유동열, 이종호, 김지간, 조성환, 이강, 박영로, 김희선 등은 중국 청도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두 회의에서 안창호의 준비론이 소수로 밀리고 독립전쟁론이 결정되었고, 이에 따라 신민회는 ‘독립전쟁에 대비하는 만주 이민계획과 무관양성’을 위해 청년들을 모아 만주로 이주시키고 이를 지원할 자금조달 책임을 지역별로 분담하여 비밀리에 활동했습니다.

이광수는 회의 결과가 안창호가 바라던 바와 같지 못했다면서 “의론이 합치 아니 되는 점은 급진과 점진에 관하여서니 이것은 차후로도 줄곧 양립한 대로 기미 3.1운동에 이르렀다”고 적었습니다.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상황을 전했습니다.

 

급진이라 함은 서, 북간도와 러시아령에 있는 동포의 재력과 인력을 규합하여 당장에 일본에 대한 무력적 독립 운동을 일으키자는 것으로 이동휘가 이 주장의 대표자요. 점진론이란 것은 실력 없는 거사를 하면 달걀로 돌을 때리는 것이라 성공할 희망이 없을뿐더러 첫째, 재외동포의 경제력과 인명을 소모하고, 둘째, 국내 동포에 대한 적의 경계와 압박이 더욱 엄중하여 문화와 경제적 향상이 저지될 것이니, 우선 서, 북간도, 러시아령, 미주 등에 재류하는 동포의 산업을 진흥시키고 교육을 보급시켜서 좋은 기회가 돌아오면 큰 힘을 낼 수 있도록 준비공작을 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물을 것도 없이 도산의 주장이었다.

 

이동휘는 “나라가 망한 이때에 산업은 다 무엇이고 교육은 다 무엇이냐. 둘이 모이면 둘이 나가 죽고 셋이 모이면 셋이 나가 죽어서 싸울 것이라” 하며 자기 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광수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안창호는 회담을 길게 끌어서 동지들이 망국의 격분에서 생긴 정신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려고 혹은 관광, 혹은 주연, 이 모양으로 일정을 연장하였으나,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고 모두 청도를 떠나서 각자의 길을 걸으려 하였다.”

이광수는 만일 이종호가 안창호의 뜻을 좇아 그의 사재를 기울여서 안창호의 경륜대로의 시설을 하기에 동의했다면 일의 방향이 약간 변할 듯도 했으나 이종호도 안창호의 실력양성론보다 즉전즉결론에 기울어지고 말았다고 증언했습니다. 양측 주장의 결렬을 조화하려고 애쓴 사람은 성격상, 경력상 이갑이었습니다. 이갑은 서울에 있을 때부터도 언제나 조화의 임무와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도 효과를 거두지 못해 청도에서의 회합은 분열의 결과로 끝을 맺고 안창호와 이갑은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를 향해 떠나고, 다른 사람들도 다 각기 목적하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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