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회 총회장이 된 안창호

 

 

 

안창호가 로스앤젤레스의 집에 5년 만에 돌아왔을 때 그가 없는 동안 부인은 삯빨래로 생활비를 벌어 자녀들을 양육한 것을 알았습니다. 안창호는 곧 토목공사의 인부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체력으로는 그런 근육노동을 오래 계속 할 수 없어 미국인 주택의 청소 인부가 되었습니다.

안창호 부부가 저축한 돈이 1000달러가 되었을 때 안창호는 불행한 기별을 들었습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시작된 이갑의 엄지손가락의 신경마비가 전신 불수로 화하여 미국에 오려다가 뉴욕에서 상륙 거절을 당하고 시베리아로 돌아가 병으로 눕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안창호는 병석에 누운 이갑을 위해 울었습니다. 이갑은 민영준에게서 받아낸 거액의 재물을 애국운동에 써버리고 말았습니다. 군대 해산 직전까지 참령으로 육군대신 부관이었던 이갑은 자신의 재산은 동지의 공유재산이라면서 친구가 옷이 없다면 돈을 주고, 여비가 없다면 돈을 주었습니다. 그는 불행한 벗에게 늘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광수는 이갑이 나이로나 사회적 지위로나 안창호의 선배이면서도 늘 안창호를 추존하고 자기는 그보다 일보 뒤에 섰다고 했습니다. 안창호는 부인과 의논하여 1000달러를 이갑의 치료비로 보냈습니다. 이광수는 이갑이 1000달러를 받고 어느 사람에게 “도산은 운하 공사인부가 되어서 벌고 도산 부인은 삯빨래를 하여서 번 돈이래” 하고 눈물을 떨구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재류 동포들은 안창호로 하여금 국민회國民會 총회장을 맞게 했습니다. 국민회는 1909년 2월 1일 미국 본토의 공립협회共立協會와 하와이의 합성협회가 합동하여 창립한 단체입니다. 1908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張仁煥, 전명운田明雲이 한국 정부 외교고문인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하자 재미 교포들의 항일 열기가 고조되었고, 조직적인 독립 운동을 펼치기 위해 난립한 한인단체들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이에 공립협회 대표 여섯 명과 합성협회 대표 일곱 명이 두 단체를 통합하기로 결의했고, 조직은 총회와 지방회로 구성되어 본토에는 북미지방총회를, 하와이에는 하와이지방총회를 두고 각각 <신한민보新韓民報>와 <국민보國民報>라는 기관지를 발간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했습니다. 1909년 2월 10일에 창간한 <신한민보>는 국문으로 매주 수요일에 발간되어 국권회복운동에 관련된 논설과 기사를 싣고 국내 소식과 재외동포에 대한 소식도 광범위하게 실었으며,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정책에 대한 비판도 끊임없이 행했습니다.

국민회는 1910년 2월 또다시 1907년 3월 2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된 독립 운동단체인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와 통합하여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 재조직되었습니다. 1911년에는 조직을 확대하여 샌프란시스코에 중앙총회를 설치하고 그 밑에 북미, 하와이, 시베리아, 만주 등에 지방총회를 두었으며, 각 지방총회 관할 아래 각각 10여 개의 지방회가 있었습니다.

대한인국민회는 1차 세계대전 후 이승만을 워싱턴으로 파견하게 되며, 2차 세계대전 중에는 한족연합회의 발안과 명의와 재력으로 중경 임시정부의 경비를 부담하고, 구미 위원부를 설치하여 이승만을 위원장으로 하여 그 경비를 부담하게 되며, 해방 후에는 15명의 대표를 한국에 파견하여 건국 사업을 돕게 됩니다.

안창호는 국민회 총회장으로 선거되었습니다. 안창호의 “목표는 회원의 품격을 높여 교거僑居하는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고 근검 저축을 장려하여 각 회원이 독립하고 풍족한 생계를 가지게 하며, 단체적으로 거류국 관민의 신뢰를 얻어 동포의 권익을 보호할뿐더러 그렇게 함으로써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인을 간섭하는 구실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안창호는 1년에 5달러의 의무금을 회원에게 징수하여 수입 지출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이전에는 의연금이란 명칭으로 수시로 무제한으로 거두었는데, 안창호는 이것은 회원에게 불쾌감을 주고, 또한 동포의 부력을 쌓는 것을 저해하는 것이라 하여 의연금을 폐지했습니다. 안창호는 1년에 5달러의 의무금만으로 1년의 예산을 세웠습니다. 그는 수입이 없는 지출은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급한 일이라 하여 민중의 열정을 자격刺激하여 일시적으로 거액의 자금을 내게 하는 것은 민심을 떠나게 하고 민력을 피폐케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민족 사업은 장원한 일이므로 민중을 흥분시켜서 일시적 효과를 거두는 것은 민중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안창호는 생각했습니다.

생활 개선에 대하여서는 안창호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 했던 모양으로 거처의 청결을 강조했습니다. 이웃 서양인보다 더 깨끗하게 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예의답게 할 것도 장려했습니다. 절대로 거짓말 하지 말고 서양인과의 교섭과 거래에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고 한 번 언약한 것이면 이해를 불계하고 신용을 지킬 것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역설했습니다. 그는 “한국인의 상점에서는 안심하고 물건을 살 수 있다” "한국인의 노동자는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다“ ”한국인의 언약이라면 믿을 수 있다“ 에 세 가지 신용만 얻으면 모두가 돈도 벌 수 있고 남에게 대접도 받을 수 있을 뿐더러 우리 민족 전체의 명예를 재류 국민에게 인상印象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고 동포에게 충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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