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수행에 중요한 받아들임

 

 


 

 

명상을 수행하는 방법에서 우리가 꼭 하나만 기억해야 한다면 그것은 ‘받아들임’이다. 명상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받아들이는 수행이다. 어떤 날에 마음이 산만하면 그렇게 내버려두어도 좋다. 이는 우리의 탓이 아니라 인연의 결과다. 흔히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사실 이런 원인과 조건형성일 뿐이다. 또 어떤 날에 평소보다 마음이 평화로우면 그냥 그렇게 내버려두면 된다. 그러나 명상이 아주 능숙해졌다 할지라도 특별하다고 여길 필요는 없다.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날그날 달라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받아들임을 오해하기 쉽다. 받아들임은 근본적으로 현재의 순간에 일어나는 일을 무엇이든 기꺼이 체험하려는 의도, 즉 거부하지 않고 있는 것을 향해 나의 마음을 열려는 의도다. 언제나 즐거운 일만 있거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일이 돌아간다는 뜻은 분명 아니다. 대부분 오히려 그 반대다. 받아들임이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므로 세상은 원래 삐딱하다는 망상에 우리가 빠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받아들임은 가능하면 수동적이어야 한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을 바꾸려 해서도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당면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동시에 그 상황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인정한다는 의미다.
받아들임이란 있는 그대로에 굴복함을 의미한다. 만물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둔다는 의미다. 이는 어떻게든 그렇게 되기 마련인 까닭이다. 명상을 하면서 마음이 산만할 때에는 그 산만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최대한 집중해서 살펴보라. 억지로 마음을 잡으려고 하면 분리된 자아인 양 본성을 거스르게 된다. 받아들임은 일어나는 일에 우리 자신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명상할 때 이런 마음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받아들임’이란 글을 써서 가까운 곳에 붙여 놓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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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교수님이 알려주는 공부법>(지와 사랑)

 

 

 

 

글쓰기 전에 개요를 작성하라

 

 

알다시피 미리 글의 개요를 작성하면 더욱더 논리적인 글을 쓸 수 있다. 논술도 마찬가지다. 설령 글을 쓰는 도중에 바꾸더라도 논술의 전체적인 개요를 미리 설계해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각 단락의 주제를 중심으로 개략적인 윤곽을 마련하라. 이때 개요를 직접 종이에 적어놓고 논술을 쓰기 시작해야 효과적으로 작성할 수 있고, 나중에 많은 분량을 삭제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논술의 개요를 작성하는 과정 자체가 논술을 설계하는 과정이다. 개요라는 것이 머릿속에 있는 것을 단순히 종이에 옮겨 적는 것이 아니다. 작성자가 스스로 개요를 작성하기 시작해야 개요가 생기는 것이다.

 

글쓰기는 빨리 시작할수록 좋다
글쓰기를 통해 주장을 전개하는 과정은 단순히 생각을 옮겨 적는 과정이 아니라 어떤 것을 깊이 고민하는 과정이다. 철학 글쓰기는 어떤 주제를 오랫동안 연구한 뒤 거기서 발견한 점을 글로 표현하는 것과는 다르다. 철학 글쓰기 행위는 자신의 사고를 자극하는 과정, 때로는 쟁점을 명확하게 이해하거나 개념을 확인하기 위해 책과 노트를 다시 참고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되도록 글쓰기 과제를 미루지 말기 바란다. 글쓰기의 초고를 작성하는 과정 자체가 해당 쟁점을 검토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조사가 더 필요하다며 글쓰기를 미루지 말기 바란다. 다소 막연한 느낌이 들어도 일단 글쓰기를 시작하라. 갑자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지 모른다.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여 원고를 수정하라. 수정과정은 대부분의 경우 최종 결과물의 질을 높인다. 가능하다면 초고를 작성한 뒤 며칠 정도 그냥 내버려두어라.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 다른 사람의 글처럼 느껴질 것이고, 어느 부분을 고쳐야 할지 금방 눈에 들어올 것이다.

 

채점자를 의식하라
리포트나 시험 답안지의 채점자가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교수들이 과제를 내주는 건 그들이 철학에 관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학생들에게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물론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배우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것은 과제를 내주는 기본 목적이 아니다. 논술시험은 학생들이 해당 주제를 얼마나 이해하는지를 보여주고 수업에서 배운 내용을 종합해 논증하는 능력을 입증하는 기회다. 학생들이 제출한 논술답안지나 과제를 노련한 채점자가 검토한다. 하지만 채점자가 해당 주제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채점자가 여러분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버리면, 답안지에 써넣을 내용이 없어진다. 어차피 채점자가 알고 있는 것이니까 대충 언급하려고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설득력 있게 주장을 제시하라.

 

 


주의해야 할 단어들
타당한valid/true : 철학에서 ‘타당한’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어떤 논증의 구조를 묘사할 때 쓰인다. ‘타당한 논증valid argument’은 진리보존적truth preserving 구조를 갖는다. 구체적인 예로 전제들이 참true이면 결론도 참일 것이다. 그런데 여러 전제 중에 하나 이상이 거짓이면, 결론이 참일 수도 있고 참이 아닐 수도 있다. ‘참’이라는 단어는 전제, 주장, 사실, 진술 등과 관련해 쓰인다. 그리고 ‘참인 논증true argument’이라는 표현은 어색하다. 논증에 대해서는 ‘타당한’을 써야 한다. 엄격히 말해 ‘타당한’은 문장이나 진술에 대해 쓰지 말고, 논증에 대해서만 써야 한다.


반박하다/부정하다/부인하다refute/repudiate/deny : 어떤 진술을 반박refute한다는 것은 그것이 거짓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을 제압하는 주장을 전개하는 것이다. 어떤 진술을 부정repudiate한다는 것은 단지 그것을 부인deny하는 것이다.


모순/대립 contradiction/contrary : 하나의 진술이 다른 진술과 모순contradiction을 이룰 경우에는 둘 다 참이지는 않지만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참이다. 하나는 다른 하나를 부정하는 진술이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런던은 영국의 수도가 아니다”라는 진술은 “런던은 영국의 수도이다”라는 진술과 모순된다. 하지만 두 가지 진술이 서로 대립contrary을 이룰 경우에는 둘 다 참이지는 않지만 둘 다 거짓일 수는 있다. 예를 들어 “고양이는 최고의 애완동물이다”는 “개는 최고의 애완동물이다”와 반대된다. 이 경우 두 진술은 둘 다 참인 것은 아니지만, 둘 다 거짓일 수는 있다. 이를테면 금붕어가 최고의 애완동물일 수 있으니까.


사심 없는/무관심한disinterested/uninterested : 사심 없는 연구는 공평하다. ‘무관심한’이라는 표현은 ‘관심이 없다’라거나 ‘흥미가 없다’라는 뜻이다.


함의하다/추론하다imply/infer : 전제는 결론을 함의한다. 그러나 전제는 아무것도 추론하지 못한다. 오직 사람만이 추론할 수 있다. 사람은 하나에서 또 다른 하나를 추론한다.


논점을 회피하다/질문을 요청하다begs the question/invites the question :
‘논점을 회피하다’라는 표현은 지금 다루고 있는 논점을 당연한 사실로 여기는 경우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논증 때문에 논점을 회피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모든 생각에는 그 생각의 주인이 있다는 식의 주장이 바로 지금 논쟁 중인 논점인데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일상회화에서는 ‘논점을 회피하다’라는 표현을 ‘질문을 요청하다invites the question’라는 뜻으로 쓰기도 하지만, 철학에서는 ‘논점을 회피하다’라는 뜻으로만 쓰인다. 예를 들면/즉e.g./i.e.: ‘e.g.’는 사례를 소개할 때 쓰는 표현으로 ‘예를 들면for example’이라는 뜻이다. ‘i.e.’는 ‘즉’이라는 뜻이다. ‘i.e.’ 다음에 나오는 내용은 해당 문장의 전반부에 서술된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어야 한다. ‘예를 들면(e.g.) 나는 표절, 즉(i.e.) 다른 누군가의 작품을 자신의 것인 양 행세하려고 속이는 짓을 저지르는 어떤 사람이 어리석고 적발당할 것’이라는 식으로 말할 수 있다.

 


 

너무 거창한 단어를 쓰지 마라. ‘매우very’를 의미하는 말로 ‘무한히infinitely’라는 표현을 쓰지 마라. 나중에 정말로 무한한 것에 관해 말할 때 마땅한 표현을 찾지 못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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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이승만, 김규식의 활약

 

 

 

1911년 일본 제국이 조작한 105인 사건百五人事件을 계기로 신민회 조직이 드러나고 국내에 남아 있던 세력이 탄압을 받으면서 조직이 무너졌습니다. 1911년 일본총독부가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의 암살미수사건을 조작하여 105인의 독립 운동가들을 감옥에 가둔 사건으로 신민회가 해체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데라우치 총독암살미수사건’, ‘선천사건宣川事件’ 등으로도 불리며, ‘105인 사건’이라는 명칭은 제1심 재판에서 105명이 유죄 판결을 받은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의 초대 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무단통치武斷統治를 행하는 한편, 민족의식이 높았던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계획했습니다. 그는 1910년 12월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 선천, 신의주 등지를 시찰했는데, 이때 조선인들이 그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추진했으나 실패로 끝났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안중근의 사촌인 안명근이 1910년 12월에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독립 운동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사건을 계기로 황해도 북서부의 안악安岳 지방을 중심으로 160여명의 민족운동가들을 검거하여 그 가운데 김구, 김홍량, 한순직, 배경진 등 18명을 내란 미수와 모살 미수 등의 혐의로 기소한 이른바 안악사건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1911년 1월에는 독립군기지 창건을 추진했다는 이유로 양기탁, 임치정, 주진수 등 신민회의 간부로 활동하던 16명을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들을 총독 암살 미수사건으로 몰아서 관서關西 지방 전체로 탄압을 확대해 그해 9월에는 유동열, 윤치호, 이승훈, 이동휘 등 6백여 명의 민족운동가들을 체포 구금했습니다.

6백여 명 가운데 상당수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습니다. 105명에 대해서는 징역 5~10년의 유죄 판결을 햇습니다. 그러나 2심 재판에서 99명에게 무죄가 선고되었고,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임치정, 옥관빈 등 여섯 명에 대해서만 징역 5~6년이 선고되었습니다. 그러나 징역 선고를 받은 여섯 명도 1915년 2월 12일 일왕 다이쇼大正의 즉위식에 특별 사면되어 석방되었습니다.

1919년 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소재한 국민회 중앙 총회는 이승만에게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할 것을 청하여 대한인국민회 중앙 총회장 안창호의 신임장을 가지고 우선 워싱턴으로 갔습니다. 이때에 국민회 내부에는 이승만에 대한 불만이 있었는데, 이승만이 하와이 국민회를 중앙 총회로부터 분리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안창호는 이승만이 적임자임을 역설하여 내부의 불만을 가라앉혔습니다.

이승만은 워싱턴에 갔으나 유럽에 가는 여행권을 얻지 못했습니다. 마침 상해에 있던 신한청년단新韓靑年黨에서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했기 때문에 그가 민족 대표로 활약했고 이승만은 구미 위원부장으로 워싱턴에서 외교와 선전의 일을 했습니다. 신한청년단은 1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앞두고 한국의 독립을 준비하기 위해 1918년 독립 운동가들이 상해에 모여 조직한 단체로 해외 독립 운동단체들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입니다. 합병 직후 신규식, 김규식, 신채호, 조용은 등 지사들이 상해에 망명해 있었습니다. 그때 신규식은 동지회라는 것을 조직하고 있어 상해 한국인계 주인격이었습니다. 그 후 한송계, 선우혁, 장덕수, 김철 등이 상해에 모여서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자 김철을 국내로 보내 천도교에서 3만 원을 얻어다가 김규식을 파리로 파견하는 동시에 여운형을 러시아령으로, 장덕수, 선우혁을 국내로 보내고, 또 서간도, 북간도, 북경, 미주, 하와이 등지에도 글을 보내 이 기회에 내외 일제히 독립 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동경 유학생들이 1919년 2월 8일에 동경 청년회관에 모여 독립을 선언한 것이 상해에 전해지자 신한청년단에서도 프랑스 조계에 사무소를 내고 선전과 연락사무를 시작했습니다. 3월 1일 독립선언의 제1보가 상해에 도달한 것이 그로부터 1주일 후였으므로, 파리 평화회의와 미주, 하와이의 국민회 등 재외 동포 각 단체와 주요한 지도자들에게 3.1운동의 제1보를 낸 것이 3월 10일이었습니다. 신한청년단은 이사장 서병호 아래 여운형, 이광수, 한진교, 한원창, 김순애, 안정근, 조동호 등 여러 명의 이사들이 있었고, 하부 조직으로 재무부·교제부·토론부·체육부·출판부·서무부 등 여섯 개 부서를 두었습니다. 회원은 150여 명이었습니다. 신한청년단은 기관지 <신한청년보新韓靑年報>를 발행하여 해외 동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했습니다.

3·1 운동 소식을 접한 서재필은 만세운동에 호응하기 위해 4월 초에 공지하여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했습니다. 안창호도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 동안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내무부장에 선출됐다는 통보를 받은 것은 회의 참석 중이었습니다. 안창호는 제1차 한인연합회의가 끝난 뒤, 바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고자 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했습니다. 이 대회에서 안창호도 연사로 참여했습니다. 안창호는 5월 25일 미국을 떠나 그날 상해에 도착했습니다.

안창호는 상해에 와서 신병으로 홍십자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윤현진, 신익희 등 차장 측들은 연일 안창호를 방문하여 내무총장으로 취임하여 국무총리를 대리할 것을 간청했으나 안창호는 듣지 않았습니다. 차장 측 소장파는 안창호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20여 일이 지났습니다. 안창호는 그래도 처음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자신은 만주에 들어가 동포들 속에서 교육과 산업 운동에 몸을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이광수는 “도산이 신민회나 청년학우회에나 다른 사람을 중심인물로 추대하고 자기는 무명한 그늘의 사람이 되기로 일관하여온 것도 자기의 존재로 말미암아 통일의 저해될 것을 두려워한 때문이었다”고 적었습니다.

어느 중국인 관상사觀相師가 안창호의 사진을 보고 비평하여, 그 눈이 정적情的이어서 능히 적을 증오하고 살육할 수 있는 영웅이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의 이마가 넓은 것은 그의 이지력理智力을 보이고, 코가 높고 곧고 힘 있는 것은 의지력意志力을 보이며, 그의 맑으나 부드러운 눈은 인자仁慈를 보인다고 했습니다. 안창호의 손도 매우 부드러웠습니다. 관상사의 말대로 그는 살생을 기탄없이 행하여야 하는 혁명가나 정치가가 될 수 없습니다. 관상사의 말과 같이 그는 애정이 농후한 사람이었습니다. 여성 중에도 그를 사모한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광수의 말에 의하면 스승으로 큰 어른으로 사모하던 것이 열렬한 연애로 화했던 여성도 있었다고 합니다. 안창호가 난징에 있을 때 어느 여자가 밤에 그의 침실로 들어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안창호는 천연히 어성으로 “아무개” 하고 그 여자의 이름을 옆방에까지 들릴 만큼 큰소리로 불러서, “무엇을 찾소? 책상 위에 초와 성냥이 있으니 불을 켜고 보오” 하고 태연하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의 말에 그 여자는 정열에서 깨러나 안창호의 명대로 초에 불을 당기고 잠깐 섰다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 여자는 훗날 “그 음성을 들으니 아버지 같은 마음이 생겨서 부끄럽고 죄송하였다”고 했습니다. 안창호는 남의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늘 조심했습니다. 얼마 후 그는 그 여자에게 “그 정열을 조국에 바쳐라” 하고 말했고, 그 여자는 “나는 조국을 애인으로 하고 조국을 남편으로 하겠습니다” 하고 안창호의 앞에서 맹세한 후 난징을 떠나 유럽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이광수는 “도산의 평생에 심중心中에 이성異性에 대한 열정이 일어난 일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으나, 그것이 행위로 나타난 일은 없다”고 하면서 안창호는 생활의 다른 방면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남녀 관계에 대해서도 청교도적이었다고 적었습니다. 안창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이성을 보는 것은 기쁜 일이다. 만일 그 얼굴이 보고 싶거든 정면으로 당당하게 바라보라. 곁눈으로 엿보지 말아라. 그리고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라.

 

안창호는 애정을 존중했습니다. 연애도 존중했습니다. 상해에서 어느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분개해서 그 편지를 들고 안창호에게 와서 편지를 보낸 남자를 탄핵했습니다. “무엇이 분한가?” 하고 안창호는 엄숙하게 그 여자를 바라보면 물었습니다. “독립 운동 중에, 또 동지간에 이런 편지를 하는 건 저를 모욕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그 여자가 말하자 안창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혼 남자가 미혼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건 조금도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대는 그의 사랑에 대하여 감사할지언정 분개할 이유는 없다. 하물며 그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남이 알 것을 꺼리며 한 비밀의 편지를 제삼자에게 보이는 것은 실례다. 만일 그대가 그에게 시집가기를 원치 아니하거든 사랑해주시는 뜻은 고마우나 당신의 뜻에 응할 수 없습니다 하고 유감하게 여기는 뜻을 표시하는 것이 옳고 이후에 어디서 그를 만나더라도 친절하게 환영하고 존경하는 뜻을 표하는 것이 옳으니라.

 

이렇게 충고하고 안창호는 그 남자의 편지를 읽기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비친 안창호는 일면 철석과 같은 의지의 사람이면서 부드러운 인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분노하는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희노애락喜怒哀樂에 움직이지 아니하는 수양의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안창호가 살생을 기탄없이 행하여야 하는 혁명가나 정치가가 될 수 없는 까닭은 그가 생명에 대해 깊은 연민과 애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방 안에 둔 화분의 화초에 대해 늘 사랑하여 어루만졌으며, 그 화초들이 편하도록 세심하게 돌보았습니다. 그는 친우와 동지의 불행을 볼 때에 매양 자기를 잃어버렸다고 이광수는 말합니다. 안태국이 장질부사로 입원했을 때 안창호는 그의 병상 옆에 돗자리를 깔고 그가 운명할 때까지 간호했습니다. 오예물汚穢物(지저분하고 더러운 물건) 처리도 그가 손수 했습니다. 이광수는 “동오 안태국의 영구靈柩는 도산의 숙소로 옮겨와서 경야經夜(초상 때 근친 지기가 관 곁에서 밤을 새우는 일)하고 성대한 장의를 하였다. 도산이 야국 지사로의 동오, 신뢰할 우인으로의 동오, 지성과 온정의 사람으로의 동오를 말할 때에 영결식장의 수백 동지는 모누 느껴 울었다. 동지요, 벗인 동오에 대한 도산의 지극한 우정이 더욱 우리를 울렸던 것이었다”고 적었습니다.

상해에서 윤현진의 병중에도 안창호는 자질子姪(아들, 조카, 조카 딸)에 못지않는 애정으로 그를 간호했으며, 그의 생활비뿐 아니라 소지품까지도 잡히거나 팔아서 윤현진의 치료에 유감이 없기를 힘썼다고 합니다.

안창호는 여운형이 러시아에 여행 중 그 처자의 살아가는 방도가 곤란하다는 말을 듣고 생활비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때에는 여운형과도, 그 가족과도 면식이 없을 때였습니다.

안창호가 성을 내는 것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이는 또한 그가 혁명가나 정치가가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는 남을 공격하는 말을 한 적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적어도 동포끼리는 무저항주의를 쓰자. 때리면 맞고 욕하면 먹자. 동포끼리만은 악을 악으로 대하지 말자. 오직 사랑하자”고 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면 살고, 서로 싸우면 죽는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또한 그는 “이유의 여하를 물론하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안창호는 그의 출마를 수십 일 동안 간청하는 소장 동지들에 대하여 두 가지 조건을 제출했습니다. 하나는 각지에 있는 거두들을 상해로 모으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모임을 기다려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대리를 안창호가 사면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소장파가 안창호의 의견에 찬성하고 모든 것을 안창호의 지도대로 할 것을 굳게 언약하자 비로소 안창호는 임시정부에 내무부장으로 취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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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각근scalene muscles에 통증이 생길까요?

 

사각근scalene muscles을 추측근군椎側筋群이라고도 하는데, 경추(목등뼈 혹은 목뼈) 횡돌기(제1경추)에서 나와 제1늑골에 붙은 근육입니다. 제1경추를 환추環椎라고도 하는데, 둥근 모양으로서 두개골을 받치는 관절면이 있으며, 추체와 극돌기가 없습니다. 사각근은 목덜미와 그 근접한 피부 및 근육을 지배하는 제1∼4경신경의 전지前枝로 구성되는 신경총으로 부교감신경계에 속하는 경신경총頸神經叢의 가지로 지배되고 늑골rib을 끌어 올리거나 경을 굽히거나 합니다.

목 디스크가 아닌데 팔이 저리면서 목을 돌리기가 불편할 때 사각근을 의심해야 합니다. 근육이 단단해져 주위의 신경과 혈관을 누르면 신경압박과 혈관압박 증후군이 생깁니다. 통증이 밤에 더 심해지는 이유는 누운 자세에서 가슴이 목쪽으로 올라가서 사각근이 단축되기 때문입니다. 사각근의 통증은 어깨에서 팔꿈치까지의 부분까지와 손에서 나타납니다. 통증은 견갑골 사이, 견갑내측연, 상배부, 상흉부, 손의 요골측으로 확대되어 나타나기도 합니다. 흉부에 통증이 나타나는 경우는 흉곽출구증후군과 구별해야 하는데 이 경우는 제4-5번째 손가락에서 마비가 나타납니다.

사각근의 수축, 긴장으로 인해 쇄골하동맥과 완신경총이 압박되므로 어깨가 처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런 증상은 여성에게서 많이 나타납니다. 어깨, 팔, 손에서 통증을 느끼게 됩니다. 손가락의 냉감, 청색증, 발한 이상 등을 수반하는 수도 있습니다.

치료방법은 온습포Hot pack를 그곳에 대거나 물리치료 및 마사지를 합니다. 능동적, 수동적으로 근육을 신전시키고 근육을 유연하게 해야 합니다. 도움을 주려고 할 때에는 환자를 비스듬히 앉은 상태에서 고개를 앞으로 숙이게 하는 것으로 교정합니다. 반듯이 눕히고 환자의 머리쪽에서 두 손으로 사각근을 쥐었다 놓다 하며 근육을 풀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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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감응陰陽感應은 기氣의 감응이다

 

 

 

기氣는 중국의 철학 용어로 모든 존재 현상은 기의 취산聚散, 즉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데 따라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이므로 생명 및 생명의 근원입니다. 원래는 호흡을 하는 숨息, 공기가 움직이는 바람風을 뜻하는 가벼운 의미에서 시작했으나 도가道家의 노자老子와 장자莊子가 우주의 생성변화를 기의 현상이라고 한 데서부터 여러 가지 어려운 뜻을 지닌 철학용어가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사고의 진전이 기독교와 매우 닮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바람과 호흡은 신의 기운으로 가벼운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성령이라는 어려운 뜻을 지닌 신학용어가 되었습니다. 고대인이 바람을 예사로운 자연의 현상으로 보지 않고 생명 및 생명의 근원이 되는 호흡으로 해석함으로써 육신은 먼지로 흩어져도 생명의 근원은 영생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한대漢代에는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기의 이론이 복잡하게 전개되면서 자연의 운행, 천문지리, 그리고 양생의학 및 길흉화복과 관련되는 일상생활에까지 기를 적용하여 모든 것을 설명했고, 송대宋代에 와서는 유가儒家에서 이理(다스릴 이)의 존재를 생각하게 됨으로써 이와 대치되는 개념으로 기를 다루었습니다. 모든 존재의 원인 혹은 이치로서 형이상形而上의 보편자를 이理라 했으며, 기氣는 형이하形而下의 구체적인 개체의 존재현상으로 생각하여 이기理氣 철학의 중요개념으로 다루었습니다. 송대의 이기론은 관념적 존재인 본체本體의 이理와 유물적 존재인 현상現像의 기氣에 의하여 세계를 풀이하려고 한 것으로 북송北宋 중기의 유학자 정호程顥(1032~85)는 이즉기理卽氣를 설했으나, 정이程頤(1033~1107)에 이르러서는 이기理氣 이원론적二元論的으로 되어 주자朱子에게 큰 영향을 끼쳐 송나라 새 유학의 기초가 되었고, 정주학程朱學의 중핵을 이루었습니다.

정호는 다양한 자연현상을 질서지우는 우주의 근본원리를 이理라 부르고, 사람은 모름지기 이를 직관적으로 파악하여 순응하여야 한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성즉이설性則理說을 주창했습니다. 형 정호와 함께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고 우주생성 원리와 인간의 도덕원리는 같다고 주장한 주돈이周敦頤(1017~73)에게 배웠고, 형과 아울러 이정자二程子라 불리며 정주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정이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철학을 수립하여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정이의 사상은 “지미至微(隱)한 것은 이理(本體)요 지저至著(顯)한 것은 상象(氣·用)이라 하여 일단 양자를 구별하고, 체體와 용用은 근원이 같으며 현顯과 미微에 사이가 없다”고 상관관계를 설명한 점에 특색이 있습니다. 그의 철학은 주자에게 계승되어,『태극도설太極圖說』과『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에 나타나 있습니다.

음양감응陰陽感應은 천지의 감응, 남녀의 감응으로부터 형성되어 생명의 기원이 되었는데, 음양감응이란 곧 기氣의 감응이란 뜻입니다. 무속신앙의 우주관에 따르면 만물萬物의 생성生成하는 원기元氣인 정기精氣가 우주 도처에 있다고 하는데 이는 인간이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 및 꿈에 대한 깊은 사색에서 도출된 생각입니다. 인간의 내적 체험이 밖으로 드러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기는 은殷나라에서 사용한 거북껍질과 짐승 뼈에 새겨진 문자라는 뜻의 구갑수골문자龜甲獸骨文字(약칭하여 갑골문甲骨文, 은허문자, 은허복사라 부르기도 함)에서부터 나타났는데, 원래는 운기雲氣, 수증기, 연기, 바람과 같은 기체 상태의 존재물을 가리켰습니다. 1899년에 발견된 갑골문은 은나라(혹은 상나라)의 복점용卜占用 구갑龜甲이나 짐승 뼈에 새겨진 문자로, 계문契文 혹은 복사卜辭라고도 합니다. 갑골문 중에는 운雲, 풍風 등도 기록되어 있는데, 무당이 무술의식을 통해 바람을 부르거나, 멎게 하거나 비를 내리게 하거나, 그치게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바람에 영靈이 있다면 기氣에도 영이 있습니다.

『장자莊子』「제물론齊物論」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무릇 대지가 기를 내뿜음에 이를 일러 바람이라 한다. 이것은 일어나지 않다가도 일단 일어나면 모든 구멍이 다 성난 듯이 울부짖는다.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나라 태사太史인 좌구명左丘明이 공자孔子의『춘추春秋』를 풀이한 책으로 알려진『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소공원년昭公元年」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天有六氣 ... 六氣曰陰陽風雨晦明하늘에 육기가 있으니 ... 육기는 음양풍우회명이다.

 

천지간天地間의 여섯 가지 기운氣運을 음陰·양陽·풍風·우雨·회晦·명明이라 하며, 이것들이 조화되지 않으면 홍수와 가뭄이 있어 오곡이 여물지 못하며 재해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기氣는 질 좋은 곡식을 가리키지만, 의미를 넓히면 사물의 정화 즉, 정기精氣를 가리킵니다. 춘추시대의 제齊나라 재상宰相 관중이 부민, 치국, 경신, 포교를 서술하고 패도정치를 역설한『관자管子』「내업內業」에는 “정은 기의 정미로운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기氣자는 동사로도 사용되었습니다. 후한대에 허신許愼이 편찬한 자전字典『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기는 손님에게 대접하는 꼴과 쌀이다. 미米를 따르고 발음은 기다.

 

이것이 기의 본래 글자이며 곡물을 증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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