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이승만, 김규식의 활약

 

 

 

1911년 일본 제국이 조작한 105인 사건百五人事件을 계기로 신민회 조직이 드러나고 국내에 남아 있던 세력이 탄압을 받으면서 조직이 무너졌습니다. 1911년 일본총독부가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의 암살미수사건을 조작하여 105인의 독립 운동가들을 감옥에 가둔 사건으로 신민회가 해체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데라우치 총독암살미수사건’, ‘선천사건宣川事件’ 등으로도 불리며, ‘105인 사건’이라는 명칭은 제1심 재판에서 105명이 유죄 판결을 받은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의 초대 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무단통치武斷統治를 행하는 한편, 민족의식이 높았던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계획했습니다. 그는 1910년 12월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 선천, 신의주 등지를 시찰했는데, 이때 조선인들이 그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추진했으나 실패로 끝났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안중근의 사촌인 안명근이 1910년 12월에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독립 운동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사건을 계기로 황해도 북서부의 안악安岳 지방을 중심으로 160여명의 민족운동가들을 검거하여 그 가운데 김구, 김홍량, 한순직, 배경진 등 18명을 내란 미수와 모살 미수 등의 혐의로 기소한 이른바 안악사건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1911년 1월에는 독립군기지 창건을 추진했다는 이유로 양기탁, 임치정, 주진수 등 신민회의 간부로 활동하던 16명을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들을 총독 암살 미수사건으로 몰아서 관서關西 지방 전체로 탄압을 확대해 그해 9월에는 유동열, 윤치호, 이승훈, 이동휘 등 6백여 명의 민족운동가들을 체포 구금했습니다.

6백여 명 가운데 상당수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습니다. 105명에 대해서는 징역 5~10년의 유죄 판결을 햇습니다. 그러나 2심 재판에서 99명에게 무죄가 선고되었고,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임치정, 옥관빈 등 여섯 명에 대해서만 징역 5~6년이 선고되었습니다. 그러나 징역 선고를 받은 여섯 명도 1915년 2월 12일 일왕 다이쇼大正의 즉위식에 특별 사면되어 석방되었습니다.

1919년 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소재한 국민회 중앙 총회는 이승만에게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할 것을 청하여 대한인국민회 중앙 총회장 안창호의 신임장을 가지고 우선 워싱턴으로 갔습니다. 이때에 국민회 내부에는 이승만에 대한 불만이 있었는데, 이승만이 하와이 국민회를 중앙 총회로부터 분리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안창호는 이승만이 적임자임을 역설하여 내부의 불만을 가라앉혔습니다.

이승만은 워싱턴에 갔으나 유럽에 가는 여행권을 얻지 못했습니다. 마침 상해에 있던 신한청년단新韓靑年黨에서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했기 때문에 그가 민족 대표로 활약했고 이승만은 구미 위원부장으로 워싱턴에서 외교와 선전의 일을 했습니다. 신한청년단은 1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앞두고 한국의 독립을 준비하기 위해 1918년 독립 운동가들이 상해에 모여 조직한 단체로 해외 독립 운동단체들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입니다. 합병 직후 신규식, 김규식, 신채호, 조용은 등 지사들이 상해에 망명해 있었습니다. 그때 신규식은 동지회라는 것을 조직하고 있어 상해 한국인계 주인격이었습니다. 그 후 한송계, 선우혁, 장덕수, 김철 등이 상해에 모여서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자 김철을 국내로 보내 천도교에서 3만 원을 얻어다가 김규식을 파리로 파견하는 동시에 여운형을 러시아령으로, 장덕수, 선우혁을 국내로 보내고, 또 서간도, 북간도, 북경, 미주, 하와이 등지에도 글을 보내 이 기회에 내외 일제히 독립 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동경 유학생들이 1919년 2월 8일에 동경 청년회관에 모여 독립을 선언한 것이 상해에 전해지자 신한청년단에서도 프랑스 조계에 사무소를 내고 선전과 연락사무를 시작했습니다. 3월 1일 독립선언의 제1보가 상해에 도달한 것이 그로부터 1주일 후였으므로, 파리 평화회의와 미주, 하와이의 국민회 등 재외 동포 각 단체와 주요한 지도자들에게 3.1운동의 제1보를 낸 것이 3월 10일이었습니다. 신한청년단은 이사장 서병호 아래 여운형, 이광수, 한진교, 한원창, 김순애, 안정근, 조동호 등 여러 명의 이사들이 있었고, 하부 조직으로 재무부·교제부·토론부·체육부·출판부·서무부 등 여섯 개 부서를 두었습니다. 회원은 150여 명이었습니다. 신한청년단은 기관지 <신한청년보新韓靑年報>를 발행하여 해외 동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했습니다.

3·1 운동 소식을 접한 서재필은 만세운동에 호응하기 위해 4월 초에 공지하여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했습니다. 안창호도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 동안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내무부장에 선출됐다는 통보를 받은 것은 회의 참석 중이었습니다. 안창호는 제1차 한인연합회의가 끝난 뒤, 바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고자 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했습니다. 이 대회에서 안창호도 연사로 참여했습니다. 안창호는 5월 25일 미국을 떠나 그날 상해에 도착했습니다.

안창호는 상해에 와서 신병으로 홍십자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윤현진, 신익희 등 차장 측들은 연일 안창호를 방문하여 내무총장으로 취임하여 국무총리를 대리할 것을 간청했으나 안창호는 듣지 않았습니다. 차장 측 소장파는 안창호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20여 일이 지났습니다. 안창호는 그래도 처음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자신은 만주에 들어가 동포들 속에서 교육과 산업 운동에 몸을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이광수는 “도산이 신민회나 청년학우회에나 다른 사람을 중심인물로 추대하고 자기는 무명한 그늘의 사람이 되기로 일관하여온 것도 자기의 존재로 말미암아 통일의 저해될 것을 두려워한 때문이었다”고 적었습니다.

어느 중국인 관상사觀相師가 안창호의 사진을 보고 비평하여, 그 눈이 정적情的이어서 능히 적을 증오하고 살육할 수 있는 영웅이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의 이마가 넓은 것은 그의 이지력理智力을 보이고, 코가 높고 곧고 힘 있는 것은 의지력意志力을 보이며, 그의 맑으나 부드러운 눈은 인자仁慈를 보인다고 했습니다. 안창호의 손도 매우 부드러웠습니다. 관상사의 말대로 그는 살생을 기탄없이 행하여야 하는 혁명가나 정치가가 될 수 없습니다. 관상사의 말과 같이 그는 애정이 농후한 사람이었습니다. 여성 중에도 그를 사모한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광수의 말에 의하면 스승으로 큰 어른으로 사모하던 것이 열렬한 연애로 화했던 여성도 있었다고 합니다. 안창호가 난징에 있을 때 어느 여자가 밤에 그의 침실로 들어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안창호는 천연히 어성으로 “아무개” 하고 그 여자의 이름을 옆방에까지 들릴 만큼 큰소리로 불러서, “무엇을 찾소? 책상 위에 초와 성냥이 있으니 불을 켜고 보오” 하고 태연하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의 말에 그 여자는 정열에서 깨러나 안창호의 명대로 초에 불을 당기고 잠깐 섰다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 여자는 훗날 “그 음성을 들으니 아버지 같은 마음이 생겨서 부끄럽고 죄송하였다”고 했습니다. 안창호는 남의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늘 조심했습니다. 얼마 후 그는 그 여자에게 “그 정열을 조국에 바쳐라” 하고 말했고, 그 여자는 “나는 조국을 애인으로 하고 조국을 남편으로 하겠습니다” 하고 안창호의 앞에서 맹세한 후 난징을 떠나 유럽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이광수는 “도산의 평생에 심중心中에 이성異性에 대한 열정이 일어난 일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으나, 그것이 행위로 나타난 일은 없다”고 하면서 안창호는 생활의 다른 방면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남녀 관계에 대해서도 청교도적이었다고 적었습니다. 안창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이성을 보는 것은 기쁜 일이다. 만일 그 얼굴이 보고 싶거든 정면으로 당당하게 바라보라. 곁눈으로 엿보지 말아라. 그리고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라.

 

안창호는 애정을 존중했습니다. 연애도 존중했습니다. 상해에서 어느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분개해서 그 편지를 들고 안창호에게 와서 편지를 보낸 남자를 탄핵했습니다. “무엇이 분한가?” 하고 안창호는 엄숙하게 그 여자를 바라보면 물었습니다. “독립 운동 중에, 또 동지간에 이런 편지를 하는 건 저를 모욕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그 여자가 말하자 안창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혼 남자가 미혼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건 조금도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대는 그의 사랑에 대하여 감사할지언정 분개할 이유는 없다. 하물며 그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남이 알 것을 꺼리며 한 비밀의 편지를 제삼자에게 보이는 것은 실례다. 만일 그대가 그에게 시집가기를 원치 아니하거든 사랑해주시는 뜻은 고마우나 당신의 뜻에 응할 수 없습니다 하고 유감하게 여기는 뜻을 표시하는 것이 옳고 이후에 어디서 그를 만나더라도 친절하게 환영하고 존경하는 뜻을 표하는 것이 옳으니라.

 

이렇게 충고하고 안창호는 그 남자의 편지를 읽기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비친 안창호는 일면 철석과 같은 의지의 사람이면서 부드러운 인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분노하는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희노애락喜怒哀樂에 움직이지 아니하는 수양의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안창호가 살생을 기탄없이 행하여야 하는 혁명가나 정치가가 될 수 없는 까닭은 그가 생명에 대해 깊은 연민과 애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방 안에 둔 화분의 화초에 대해 늘 사랑하여 어루만졌으며, 그 화초들이 편하도록 세심하게 돌보았습니다. 그는 친우와 동지의 불행을 볼 때에 매양 자기를 잃어버렸다고 이광수는 말합니다. 안태국이 장질부사로 입원했을 때 안창호는 그의 병상 옆에 돗자리를 깔고 그가 운명할 때까지 간호했습니다. 오예물汚穢物(지저분하고 더러운 물건) 처리도 그가 손수 했습니다. 이광수는 “동오 안태국의 영구靈柩는 도산의 숙소로 옮겨와서 경야經夜(초상 때 근친 지기가 관 곁에서 밤을 새우는 일)하고 성대한 장의를 하였다. 도산이 야국 지사로의 동오, 신뢰할 우인으로의 동오, 지성과 온정의 사람으로의 동오를 말할 때에 영결식장의 수백 동지는 모누 느껴 울었다. 동지요, 벗인 동오에 대한 도산의 지극한 우정이 더욱 우리를 울렸던 것이었다”고 적었습니다.

상해에서 윤현진의 병중에도 안창호는 자질子姪(아들, 조카, 조카 딸)에 못지않는 애정으로 그를 간호했으며, 그의 생활비뿐 아니라 소지품까지도 잡히거나 팔아서 윤현진의 치료에 유감이 없기를 힘썼다고 합니다.

안창호는 여운형이 러시아에 여행 중 그 처자의 살아가는 방도가 곤란하다는 말을 듣고 생활비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때에는 여운형과도, 그 가족과도 면식이 없을 때였습니다.

안창호가 성을 내는 것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이는 또한 그가 혁명가나 정치가가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는 남을 공격하는 말을 한 적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적어도 동포끼리는 무저항주의를 쓰자. 때리면 맞고 욕하면 먹자. 동포끼리만은 악을 악으로 대하지 말자. 오직 사랑하자”고 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면 살고, 서로 싸우면 죽는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또한 그는 “이유의 여하를 물론하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안창호는 그의 출마를 수십 일 동안 간청하는 소장 동지들에 대하여 두 가지 조건을 제출했습니다. 하나는 각지에 있는 거두들을 상해로 모으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모임을 기다려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대리를 안창호가 사면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소장파가 안창호의 의견에 찬성하고 모든 것을 안창호의 지도대로 할 것을 굳게 언약하자 비로소 안창호는 임시정부에 내무부장으로 취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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