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암liver cancer이 무엇입니까?

 

 

 

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간세포에서 기원하는 악성 종양인 간암liver cancer은 넓은 의미로 간에 생기는 모든 종류의 악성 종양이나 다른 기관들의 암이 간에 전이되어 발생하는 전이성 간암까지도 포함하지만, 간세포암종이 간암 중 가장 흔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간세포에서 발생하는 간세포 암종만을 의미합니다. 간세포 암종의 정확한 원인은 알려진바 없고 만성 감염이나 간독성을 가능성으로 봅니다. 간암 환자의 80-90%는 만성 B형 간염보유자 또는 만성 C형 간염보유자입니다. 그 밖에도 지속적인 과량의 음주, 간경변 등이 원인이 됩니다. 이런 바이러스 감염이나 알코올에 의해 간의 파괴와 재생이 지속될 경우 간암의 발생 위험이 크게 높아집니다.

간이 있는 오른쪽 윗배에 덩어리가 만져질 수 있으며, 간암이 빠르게 커질 때는 같은 부위에 통증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주요 증상으로 거친 피모, 곤두선 털, 구토, 무기력, 침울, 졸림, 생기 없음, 복부팽만, 건강상태 불량, 증체율 불량, 식욕부진, 호흡곤란 등입니다.

가장 효과적인 치료방법은 간암의 수술적 절제이지만, 절제가 불가능할 경우가 더 많으며 이런 경우 간암에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하는 혈관을 막는 경동맥 화학색전술TACE(transarterial chemoembolization), 간암에 알코올을 주입하여 간암세포를 죽이는 경피적 에탄올 주입술PEIT(percutaneous ethanol injection therapy), 고주파를 이용하여 간암을 태우는 고주파 열치료RFA(radiofrequency ablation) 등의 치료를 할 수 있습니다. 간 이식으로 완치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간암이 간 밖으로 전이된 경우나 진행된 경우에는 항암제 치료를 고려할 수 있습니다. 환자는 소량의 식사를 하되 칼로리를 증가시킵니다. 탄수화물보다는 단백질과 지방으로 에너지를 얻는 식사를 합니다. 수용성 비타민을 정상보다 2배 먹고 비타민E를 섭취합니다. 환축이 보호를 받을 수 있다면 간 소엽의 60~70%를 절개합니다. 화학요법제는 일반적으로 효과가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간암 발생률이 높은 지역은 아프리카, 대만, 중국, 한국, 동남아시아, 일본 등이 있습니다. 간암이 낮은 지역은 아메리카 지역과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사우디아라비아, 오만, 아랍에미리트 등 중동 지역 등입니다. 우리나라는 간암 발생률이 중장년기(40~60세) 10만 명을 조사한 결과 여자는 15.6명 남자는 74.8명으로 남자가 약 5배나 높습니다. 암 사망자의 수가 두 번째로 높은 것이 간암이다. 1년에 10만 명당 사망률이 24.1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간암은 네 번째로 많이 발생하는 암이고 두 번째로 사망률이 높은 암입니다. 특히 40대 사망률 1위 질환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흥사단은 조림造林이다

 

 

 

안창호가 100년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설립한 흥사단興士團은 앞서 6년 전 유길준이 설립하여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1911년에 해체된 것을 부활시킨 의미가 있습니다. 흥사단의 부활은 1911년에 발생한 105인 사건에서 비롯됩니다. 이 사건으로 신민회가 해체되고 서북 지역의 항일 인사들이 대거 투옥되었습니다. 사건이 일단락된 뒤 관련자들은 크게 두 방향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안창호와 이승훈 등은 준비론에 입각하여 실력양성을 시작했고, 이시영, 이동휘, 김좌진 등은 만주로 이동하여 무장 항쟁을 준비했습니다. 안창호가 실력양성론을 실현시킬 목적으로 창단한 단체가 바로 흥사단입니다. 1913년 부활한 흥사단의 주요 멤버는 안창호, 윤치오, 이광수, 장이욱, 주요한, 주요섭, 김동원, 조병옥, 안병욱 등입니다.

흥사단은 미국내 한인 교민들의 사회활동, 권익보호, 언론활동, 교민사회 단결 등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흥사단은 미국 캘리포니아와 샌프란시스코, 하와이, 필라델피아 등지로 지부가 확산되었고, 멕시코, 브라질 등 한국인 교민들이 정착한 곳으로 지부가 확산되었습니다. 1919년에는 흥사단 원동지부가 결성되었고, 1922년에는 이광수 등에 의해 흥사단 원동지부 조선지회가 조직되었으며, 흥사단 조선지회의 측면지원단체로 김동원에 의해 동우구락부, 이광수에 의해 수양동맹회가 조직되었습니다.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는 통합하여 수양동우회로 개편, 흥사단 조선지회의 활동을 보조, 지원했습니다. 흥사단 조선지부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을 계기로 해산되었으나, 해방 후 부활하게 됩니다. 해방 이후 1948년 흥사단 재조직의 주요 인물들은 장이욱, 안병욱, 김동원, 주요한, 주요섭, 조병옥, 장택상 등입니다.

흥사단을 한 마디로 말하면 안창호의 말대로 조림造林입니다. 국가를 건설하고 운용하기에 필요한 재목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흥사단에 어느 유력자가 있어 그가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수양의 필요를 깨달은 동지들이 모여서 서로 수양하고 서로 연마하는 곳입니다. 흥사단에는 주인도 없고 중심인물도 없습니다. 단우 저마다 주인이며 중심인물인 것입니다. 유덕有德한 사람이 있다면 그를 모범으로 세울 수는 있지만 그에게 권력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흥사단의 목적은 ‘우리 민족 전도대업의 기초를 준비하며 정치운동을 초월하고 기본적인 민족부흥운동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품성, 지혜, 도덕을 닦는다는 수양을 목적으로 조직되었으며, 그 수양은 민족과 국가를 외면한 개인 차원의 수양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민족의 독립과 국가 발전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가는 심신훈련입니다. 따라서 흥사단에서 설정한 수양修養은 단순히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 민족의 발전을 전망하는 대의大意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안창호는 파벌의 병폐를 고치기 위해 흥사단 창립위원들을 8도 대표로 구성하길 원했는데, 8도를 대표한 인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경기도 홍언, 충청도 조병옥, 경상도 송종익, 전라도 정원도鄭源道, 평안도 강영소, 함경도 김종림金宗林, 황해도 김항작, 강원도 염만석廉萬石 등 미국유학 중인 청년학생들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1904년 7월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온 홍언洪焉(1880~1951)은 1907년까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가 대한자강회 회보의 편집을 맡았는데, 1907년 3월 31일 발기한 대한자강회 하와이지회의 주도적 인물은 홍언의 형 홍경표였습니다. 그 후 홍언은 <합성신보> 편집에도 참여했으며, 1909년 2월에는 <신한국보>를 창간하고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때 그는 하와이 현지의 교포단체에도 적극 참여했으며, 1905년 5월에는 대한인국민회 호놀룰루 지방회의 학무원에 선임되었습니다. 그는 1911년 8월 <대동위인 안즁근뎐>을 저술하여 <신한국보>에 발표했는데, 안중근 전기는 16면에 걸쳐 생애와 의거, 재판 등을 내용으로 하와이에서 적은 자료를 가지고 엮은 짧은 전기지만, 그가 역사에 관심이 많았음을 말해줍니다. 그는 1911년 11월부터 샌프란시스코에 소재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기관지 <신한민보>의 주필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동해수부’라는 필명을 사용했습니다. <신한민보>를 15호까지 발간한 후 1912년 6월에 퇴사했고, <신한민보> 역시 재정난으로 그 해 12월 정간에 들어갔습니다. 홍언은 대한인국민회 활동과 교회 활동에 열심이었고, 안창호가 추진하던 흥사단의 창립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1915년 초 <신한민보>로 복귀하여, 편집인으로서 1919년까지 재임했습니다.

1918년 미국 와이오밍 대학을 졸업하고, 1925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조병옥趙炳玉(1894~1960)은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에 참여하여 독립 운동을 했습니다. 박사학위를 받은 그 해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신간회新幹會 등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광주학생운동, 신간회사건, 수양동우회사건 등 항일운동에 연루되어 5년에 걸치는 옥중생활을 했습니다.

1906년 4월에 미국으로 건너가 소학교를 졸업한 송종익宋鍾翊(1887~1956)은 한인들의 항일민족 운동 단체 공립협회에 가입했습니다. 1908년 3월에 일제 통감부의 외교고문 스티븐스D.W. Stevens가 샌프란시스코의 각 신문에 일제의 한국의 ‘보호국’화를 왜곡 선전한 후 전명운과 장인환이 그를 처단한 사건이 있었을 때 송종익은 두 사람의 법정 투쟁에 대비하여 조직된 재판후원회의 재무로 선임되어 활약했습니다. 안창호는 1912년 리버사이드로부터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해온 후 맨 먼저 ‘흥사단 약법’의 초안을 송종익에게 보이고 상의했으며, 그때부터 송종익은 흥사단의 첫 동지가 되었고, 흥사단 활동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안창호의 가족까지도 보살피는 등 헌신적으로 봉사했습니다. 송종익은 고향이 대구 사람으로 서울로 안창호를 찾아가 미국으로 건너갈 것을 물어본 것이 인연이 되어 안창호의 가장 신임 받고 친분 있는 동지가 되었습니다.

황해도를 대표한 김항작金恒作은 1922년에 이광수와 함께 자작회自作會의 설립을 돕게 되는데, 그 해에 성립된 일본의 가토加藤 내각이 재정긴축, 소비절약의 정강을 발표하자 국내 유지들은 이를 역이용하여 경제독립, 자립경제 등 일련의 국산품애용 계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연희전문 학생 염태진廉台鎭, 박태화朴泰和 등 50명은 김항작과 이광수의 지도 아래 자작회를 조직하고 국산품애용운동을 통해 민족정신을 순화할 목적으로 서대문에 전시장을 마련한 뒤 국산품을 진열하며 이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각도를 대표하는 여덟 명의 창립위원들은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 강영소姜永韶의 집에서 창립 결성을 했습니다. 흥사단은 1920년까지 8년 동안 창단위원회에서 운영했으며, 1921년부터 이사부, 의사부, 심사부의 3부역원제가 실시되었습니다. 송종익은 1921년부터 1925년까지 이사부장을 맡았고 1926년부터 1936년까지는 이사부 재무원으로 안창호의 부재 시에는 실질적으로 흥사단을 이끌어갔습니다.

흥사단은 미주지역에서 창단되었으나 중국에 흥사단 원동위원부遠東委員部와 국내에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가 결성되어 세력을 확장해갔습니다. 안창호는 1919년에 영국 조계 모이명료에 집 한 채를 세를 내어 흥사단 원동위원부의 단소로 삼았습니다. 그는 이 집을 깨끗이 꾸몄습니다. 미국서 단우가 된 지 오래된 박선제 목사가 사무를 보았고, 사무실, 식당, 담화실, 집회실, 오락실, 침실을 정결하게 정돈했습니다. 정결 정돈은 안창호의 생활습관입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방을 아무렇게나 하고 청소를 하지 않으면서 허울 좋게 불구소절不拘小節(사소한 예의범절에 거리끼지 아니함)이란 말로 덕목으로 스스로 변호했는데, 안창호는 우선 몸가짐과 거처로부터 개조 일신하지 않고서는 문명한 독립 국민이 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넉넉지 못한 자기의 여비 중에서 커튼, 화분 등을 사고 또 편안한 의자를 사들여서 단소를 아름답게 꾸몄습니다. 문짝 한끝, 화분 하나도 몸소 여러 상점을 돌아서 골라잡았고, 그것을 걸 곳에 걸고 놓을 곳에 놓는 것도 깊이 생각한 후 결정했습니다. 새로 입단한 단우들도 안창호를 배워서 화분, 차구茶具 등을 가져온 이가 있었습니다.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어물쩍어물쩍 하는 것을 그는 거짓과 아울러 조국을 망하게 한 원수로 보았습니다.

1920년 가을 어느 날 밤, 상해 모이명료의 흥사단 제단에 수십 명이 모씨의 입단 문답을 보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 중에 이미 미국에서 입단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문답위원은 안창호였습니다. 이광수는 그날의 장면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하는 흥사단 입단인 만큼 흥사단 역사에는 중요한 시기일뿐더러 이날 문답을 받는 지원자는 상해에서도 중요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어서 매우 흥미가 깊었다. 문답위원과 문답 받는 자가 조그마한 테이블을 새에 두고 마주 앉았다. 위원은 단의 격식에 의해 어깨에 누른빛과 붉은빛 두 쪽을 합하여서 된 단대團帶를 메었다. 누른빛은 무실務實이니 참됨을, 붉은빛은 역행力行이니 힘을 상징하는 색으로서 충의忠義의 백白과 용감勇敢의 청靑과 아울러서 4색이었다. 가르면 4색이요, 더욱 중요한 것을 들면 황, 홍 2색이었다. 무실과 역행-참과 힘이다.

위원은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나라를 구할 이론과 방법을 토론하게 되었으니 묻는 자나 대답하는 자나 다 터럭 끝만한 거짓도 없는 참으로 하여야 할 것이요, 이제 우리는 저마다 가진 신앙을 따라서 기도하시오.”

이것은 종파를 초월한 단결임을 보임이요 동시에 양심에도 없는 거짓 예禮를 행하기를 꺼림이었다. 예수교인이면 주기도문, 불교인이면 심경心經을, 무엇이나 제 믿음에 따라서 제가 참된 심경으로 묻고 대답할 힘을 달라고 빌 것이었다.

기도가 끝나매 위원인 도산은 문답을 시작하였다.

“그대는 흥사단에 입단하기를 원하시오?”

“예, 나는 흥사단에 입단하기를 원합니다.”

“왜?”

“우리의 독립을 회복하고 민족 영원의 창성을 구하려면 흥사단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고 믿습니다.”

“왜?”

“우리는 힘이 없어서 나라가 망하였으니 나라를 흥하게 하려면 힘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힘이란 무엇인데?"

“한 사람 한 사람의 건전한 인격과 그 건전한 인격들로 된 신성한 단결입니다.”

“나라의 힘이라면 부력富力과 병력兵力일 탠대, 어찌하여 그대는 부력과 병력은 말하지 아니하고 건전한 인격과 신성한 단결을 힘이라고 하시오?”

“건전한 인격과 신성한 단결이 없이는 부력도 병력도 생길 수가 없습니다.”

“왜? 농업과 상공업이 발달하면 부력은 저절로 있을 것이요, 대포와 군함만 있으면 병력은 저절로 있을 것이 아니오?”

“국민이 건전한 인격과 신성한 단결이 없고는 농업이나 상업이나 공업도 발전할 수 없고, 또 대포와 군함이 있어도 그것을 쓸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

“그러면 지식과 기능과 인격과는 d더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오?”

“지식과 기능은 인격의 3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인격의 3요소는 무엇 무엇입니까?”

“덕德과 체體와 지智입니다.”

“덕이란 무엇이오?”

“도덕道德입니다.”

“도덕이란 무엇이오?”

“도道란 사람이 마땅히 좇아갈 길이요, 덕德이란 그 길을 걸어감으로, 즉 실천함으로 생기는 정의情意의 경향, 궤도, 다시 말하면 옳은 길을 즐겨하는 버릇과 힘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덕의 중심이 되는 것, 근본이 되고 기초가 되는 것이 무엇이라고 믿으시오?”

“참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참이란 무엇이오?”

“거짓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짓이란 무엇이오?”

“거짓말과 속이는 행실입니다.”

...

안창호의 답을 끌어내는 질문은 소크라테스식입니다. 문답을 통하여 문답 받는 본인으로 하여금 자기의 사상을 정리하게 해서 그 잘못을 스스로 없애고 바른 견해를 스스로 발견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광수에 의하면 안창호는 그때까지 소크라테스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광수는 안창호의 다른 지식 대부분 독창獨創인 것과 같이 문답 방법도 독창이었다고 말합니다.

안창호는 문답 중에 10분의 휴식을 선언했는데, 이는 휴식을 취하는 동안 문답을 받는 사람이나 방청하는 사람 모두 잘 생각해볼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문답 중에는 흥사단 단원으로서의 그리고 주인으로써 책임을 통감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광수는 이렇게 전합니다.

“흥사단에 입단하기를 원하시니, 흥사단의 주은은 누구요?”

“나요.”

“흥사단이 잘되지 아니할 때에 그 책임자가 누구요?”

“나요.”

“분명히 그렇소?”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나 할 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고도 흥사단이 잘 안 된다면 몰라도.”

“그대에는 다른 사람의 잘못이라고 책임을 돌리겠소?”

“제 힘을 다 쓴 이상에야 어찌해요?”

“있는 힘을 다하여도 흥사단이 망할 수 있겠소?”

“나 혼자 어지해요? 다른 단우들이 다 떨어져나간다면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흥망의 주인이 다른 단우들이지 자신은 아니란 말이구려?”

(대단히 거북한 모양으로)“그러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자네가 분명히 흥사단의 주인일 것 같으면 할 도리가 있지 아니하겠소?”

(그제야)“예, 내가 있는 동안 흥사단은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오.”

...

“자네가 흥사단의 중심인물이 되겠소? 그런 자신이 있겠소?”

“내가 흥사단의 중심인물이 되고 안 되는 것은 나의 인격 여하와 동지들의 내게 대한 신임 여하에 달렸지마는, 나 혼자만 남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흥사단은 지켜갈 것이니 내가 흥사단의 주인인 것은 변할 이가 없습니다.”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한다)“자네 혼자서 우리나라를 부흥시키지 아니하고 흥사단에 들어와서 하려고 하시오? 남의 만들어놓은 단체에 자네만한 명사名士가 이 모양으로 입단 문답을 하고 들어온다는 것이 체면상 수치가 아니오?”

“부끄러운 말씀이지마는 미상불 그런 생각도 있었소.”

“그런데 왜 입단을 하려고 하시오?”

“이 일은 혼자는 못할 일이오, 여럿이 뭉쳐서야 할 일이므로.”

“혼자서는 안 될까요?”

“안 됩니다.”

...

장황한 문답이 이어지다가 다음에는 조직, 의무, 재정 등에 관한 문답을 했습니다. 이광수는 입단 문답에 관해 안창호가 매양 이런 말을 했다고 적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슨 회를 한다 하면 그 취지와 규칙도 잘 알아보지 아니하고서, 혹은 아무가 하는 것이니 들어야 한다 하여 들고, 혹은 남들이 다 드니 아니 들 수 없다 해서 든다. 그러고는 누가 그더러 “아무 단체의 취지가 무엇인가? 무슨 사업을 위해서 이루어진 것인가?” 하고 물으면 그는 “나도 잘은 몰라” 하고 태연히 대답한다. 이리하여서 우리나라에는 취지 모르는 회원으로 된 단체가 많다. 취지 모르는 회원이 회원의 의무를 알 리도 없고 행할 까닭은 더구나 없다. 이것이 거짓이다. 그러므로 흥사단에 입단하는 사람은 흥사단의 약법을 잘 알기 위하여 외우고, 그 해석이 일치하기 위하여 한 조문 한 글자를 따라서 문답하는 것이다. 이리하여야 내 생각만도 아니요, 네 생각만도 아니요, 우리 생각이라 하는 것이 생기니, 이 모양으로 여론이 생기고 민족의 의사가 생기는 것이다. 흥사단의 입단 문답은 이러한 필요에서 온 것이거니와, 이 문답을 통하여서 우리 민족 철학이 토의되는 것이었다. ... 더구나 도산의 문답술은 대단히 발달된 것이어서 받는 자의 심중을 온통 털어내지 아니하고는 말지 아니하거니와, 그러면서도 결코 개인적인 심사에는 조금도 저촉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개인적인 심사에는 조금도 저촉하는 일이 없었다. 가령 신앙, 연애, 가정 사정 같은 것에 대하여서는 받는 자의 양심의 비밀은 엄중이라고 할 만하게 존중하였다. 도산은 평상시에도 남의 개인적인 사사로운 일에 관하여서는 결코 알려 하지 아니하였고, 혹시 무심코 그런 것이 귀에 들어왔더라도 안 들은 것으로 여겼다. 도산은 동지에 대하여서 비밀을 지키는 수양을 하라고 때때로 권하거니와, 이 말의 뜻은 할 필요 없는 말, 해서는 안 될 말, 내게 상관없는 말을 하지 않는 공부를 하라는 뜻이었다.

안창호는 17세나 18세의 소년과 문답할 때에도 자기가 높은 자리에 있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며, 남자나 여자나 어른이나 아이나 다 평등의 지위에서 물었고, 평등의 지위에서 대답하는 말을 존중했습니다. 그는 평시에도 남의 말을 꺾거나 누르는 일이 없었습니다. 비록 척 보기에 어리석은 말이라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심경을 존중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을 그냥 가지고 돌아가게 하진 않았습니다. 가르친다 하는 의식이 없이 그 어리석음을 스스로 깨닫도록 유도했습니다. 이광수는 여기에 안창호의 사람에 대한 끝없는 애정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광수는 안창호가 흥사단 단우를 고르는 표준은 두 가지였다며 첫째, 거짓이 없는 사람, 둘째, 조화성調和性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말한 조화성이란 단체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성격의 사람ㄴ을 의미합니다. 자기 고집이 강하고 말이나 행동이 다른 사람과 서로 맞지 않고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즉 규각圭角이 심한 사람은 당체생황에서 늘 말썽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거짓이 있는 사람, 규각을 세우는 사람이라도 한 가지 기술과 한 가지 능력이 있다면 받아서 수양을 시키면 되지 않습니까?” 하는 주장에 대해서 안창호는 “금주동맹禁酒同盟은 술을 아니 먹는 사람들이 모임으로 성공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광수는 안창호가 흥사단 단우를 고를 때 사회의 명성, 학식, 수완 같은 것을 둘째로 여겼다고 말합니다. 진실한 사람 이것이 첫 조건이었습니다. 사회의 명성, 학식, 수완 등을 지닌 사람들 가운데는 임기응변臨機應變과 권모술수權謀術數를 진실보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경계했습니다. 안창호는 민족을 위해서는 영웅英雄 호걸豪傑보다도 진실한 사람을 구했는데, 철두철미 거짓을 벗고 오직 참으로만 나가는 사람이야말로 나라를 구원하고 백성을 건지는 민족적 영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흥사단의 조직은 세 사람의 감독이 머리에 있고, 그 밑에 의사부議事部, 이사부理事部, 검사부檢査部의 3부가 있어 삼권분립三權分立의 제도를 사용했습니다. 감독은 도덕적 권위일 뿐이고, 행정의 수뇌는 아닙니다. 비토권도 규정함이 없으며, 다만 이사부나 의사부나 검사부가 약법과 아울러 감독의 의사를 존중하리라는 도덕적 권위의 원천이 될 뿐입니다. 감독은 단 내의 가장 모범적인 인물 중에서 의사부의 선거로 추천합니다. 감독을 3인으로 한 것은 한 사람의 재단裁斷보다 세 사람의 재단이 실수가 없고, 다섯 사람보다 세 사람의 통일이 쉽다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서 흥사단의 단우들은 안악사건, 105인사건, 3·1운동, 동우회사건 등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 독립 운동에 직접 간접으로 참여했으며, 1926년에는 종합월간지 <동광東光>을 창간하여 1933년까지 40호를 속간하기도 했습니다.

<동광>은 1926년 5월 20일 주요한朱耀翰을 편집 발행인으로 하여 창간되었습니다. 창간호는 4‧6배판 48쪽. 1927년 8월 1일 통권 16호를 발행하고 재정난으로 중단했다가, 1931년 이광수에 의해 속간되었습니다. 1933년 1월 30일 통권 40호까지 발행했으며, 그 중 3호는 원고 검열로 말미암아 간행되지 못했습니다. 사회주의 경향의 잡지들에 맞서서 안창호, 이광수를 주요 집필진으로 하여 민족주의 이념을 고취하면서 특히 안창호를 비롯한 수양동우회 회원들의 글이 다수를 차지했습니다. 수양동우회의 주장과 일치하는 논조를 지켜나간 점으로 보아 이 잡지는 수양동우회의 준기관지로서의 성격을 지녔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갑상선 기능 항진증hyperthyroidism이 무엇입니까?

 

 

 

사람 몸에서 호르몬을 분비하는 내분비 기관 중 가장 큰 갑상샘thyroid gland은 목의 한가운데 앞으로 튀어나온 물렁뼈 바로 아래쪽에서 기도 주위를 나비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습니다. 한쪽 날개의 크기는 넓이 1~2cm, 두께 2~3cm, 높이 5cm 정도 되고, 무게는 모두 합해서 15~20g 정도입니다. 근육으로 둘러싸여 있어 겉으로 볼 수 없고 거의 만져지지 않습니다. 갑상샘의 뒤쪽에는 부갑상샘이 좌우 두 개씩 모두 네 개가 붙어 있으며, 크기와 형태가 다양한 여러 개의 소엽들로 이뤄져 있고 각각의 소엽은 20~40개의 여포follicule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갑상샘은 티록신 합성, 기초대사율 조절, 단백질 합성 촉진, 중추신경계 발달에 관여하는 요오드iodine를 함유하고 있어 조직의 여러 가지 대사들을 항진시키는 갑상샘 호르몬thyroid hormone과 갑상선에서 생성되는 호르몬으로 생체 내의 칼슘 이온농도의 항상성을 조절하는 데 관여하는 칼시토닌calcitonin을 만들고 분비합니다. 갑상샘 호르몬은 인체의 대사 과정을 촉진하여 모든 기관의 기능을 적절히 유지시키는 일을 하는데, 예를 들어 열을 발생시켜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시키거나 태아와 신생아의 뇌와 뼈의 성장 발달에 도움을 주는 역할 등을 합니다. 태아기 혹은 성장기에 갑상샘 호르몬이 모자라면 키가 작고 지능이 낮아집니다. 갑상샘 호르몬은 몸 안의 여러 대사들을 섬세하게 조절하여 만들어진 에너지가 제대로 쓰이도록 합니다. 심장의 박동을 증가시키고 스트레스에도 적절히 대응하게 하며, 적혈구 생성도 늘려 충분한 산소 공급이 이루어지도록 합니다. 칼시토닌은 뼈와 신장에 작용하여 혈중 칼슘 수치를 낮추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갑상선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이 어떤 원인에 의해서 과다하게 분비되어 갑상선 중독증을 일으키는 상태를 갑상선 기능 항진증hyperthyroidism이라고 합니다. 이런 증세의 가장 주요 원인은 그레이브스씨 병Graves' disease이지만, 그 밖에도 뇌하수체 선종이 있는 경우 이 종양에서 갑상선 자극 호르몬이 과다 분비되어 생길 수 있습니다. 갑상선 호르몬제를 과량 복용할 경우에도 이런 증상이 나타납니다. 그레이브스씨 병은 초기에 흔히 목이 붓고, 갑상선을 자극하는 자가 항체에 의해 갑상선이 비정상적으로 자극돼 갑상선호르몬이 과도하게 분비되는 병입니다. 갑상선 기능 항진증의 증세는 식욕이 왕성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체중이 감소할 수 있고, 더위를 참지 못하고 맥박이 빨라지며(빈맥), 두근거림, 손 떨림이 나타나거나 대변 횟수가 증가할 수 있습니다. 피로감, 불안감 및 초초함이 나타날 수 있고, 가슴이 아프다고 느끼거나 숨이 차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근력 약화로 인한 근육 마비가 올 수도 있습니다. 눈이 튀어나오거나 안구 건조증 및 각막염, 복시(사물이 겹쳐 보임) 등의 증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를 그레이브스 안병증Graves' ophthalmopathy이라 합니다. 그레이브스 안병증의 경우 증상이 경미한 경우에는 특별한 치료가 필요 없으며, 증상 완화를 위해 대증요법이 보조적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면역 억제요법이나 수술치료가 시행되기도 합니다.

진단방법은 혈액검사를 통해 혈액 내 갑상선 호르몬 농도를 측정하여 진단할 수 있는데, 갑상선 기능 항진증 환자의 경우 갑상선 호르몬의 혈액 내 농도가 정상치보다 높게 나타납니다.

치료방법은 갑상선 호르몬의 생산을 억제하는 하는 것으로 항갑상선제를 사용한 약물치료를 시행하지만, 복용을 중단할 경우 재발률이 높은 것이 단점입니다. 항갑상선제는 대부분 부작용이 없는 안전한 약물이지만 드물게 무과립구증, 혈관염 및 간기능 장애를 동반할 수 있습니다. 약물치료 외에 갑상선을 절제하는 수술 요법이나 동위원소(방사성요오드 치료)를 이용하여 갑상선을 파괴하는 방사성 동위원소 치료가 사용되는데, 방사성 동위원소 치료의 경우 향후 갑상선 기능 저하증이 발생할 수 있으며 임신이나 수유 시에는 절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갑상샘염thyroiditis은 갑상선의 급성 세균성 감염으로부터 만성 자가면역성 갑상선염까지 다양한 형태의 염증 질환을 총칭하는 것으로,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과 병의 원인에 따라 급성 갑상선염, 아급성 갑상선염, 만성 림프구성 갑상선염, 무통성 갑상선염 등으로 나뉩니다. 원인은 기존에 갑상선 질환을 앓던 환자에게 세균이나 미생물이 침입하여 발생하는 경우로 이를 급성 갑상선염이라 합니다. 급성 갑상선염의 경우, 감염 부위의 통증 및 열감, 피부색의 변화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급성 갑상선염의 경우 항생제와 수술 등의 외과적 치료가 주를 이루며, 나머지 갑상선염은 약물 등으로 치료하는 내과적인 치료가 주를 이룹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원래 흥사단은 유길준이 설립한 계몽단체

 

 

 

독립 운동의 물적 토대와 인적 토대를 구축해나가지 않으면 우리 민족의 장래 희망도 없다고 본 안창호는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興士團을 설립했습니다. 흥사단은 그의 필생의 사업이 됩니다. 그는 8도 대표를 선정해 민족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중견인물을 배출하기 위한 동맹수련단체로 출범시켰습니다. 그는 혁명가만이 아니라 장차 독립될 국가의 전문분야에서 전문인으로서 조국 건설에 이바지할 인재를 키우는 일도 독립 운동이라는 신념으로 흥사단 단원들에게 광복된 조국에서 봉사할 수 있는 전문인이 되라고 말했습니다.

원래 흥사단은 안창호보다 스물두 살 많은 유길준兪吉濬(1856~1914)이 1907년에 국민 모두를 선비로 만들겠다는 국민개사國民皆士의 뜻을 품고 설립한 계몽단체였습니다.

유길준에게 따라붙는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비 유학생이라는 것입니다. 유길준과 고종황제의 관계는 악연인데, 고종황제로 인해 학업이 순조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민영익의 후원으로 미국에서 대학진학 예비학교인 더머 아카데미Governor Dummer Academy(현재 가버너 더머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있었는데, 1884년 갑신정변의 여파로 고종황제가 개화파에 완전히 등을 돌리고 수구파였던 민씨 척족이 정권을 잡으면서 유길준의 유학비용이 끊어졌습니다.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던 유길준은 귀국길에 올라 유럽을 경유하여 견문을 넓히고 동남아시아, 일본을 거쳐 1885년 12월 인천에 상륙했습니다.

귀국한 유길준은 김옥균, 박영효 등 갑신정변의 주모자들과의 친분으로 인해 바로 체포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포도대장 한규설의 집에 감금되었다가 이후 가회동 취운정으로 옮겨 1892년까지 7년 동안 연금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 기간에 유길준은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했습니다. 이 책은 1889년에 완성되었으나 6년 후인 1895년 그 해 후쿠자와 유키치가 설립한 동경의 교순사交詢社에서 출간했습니다. 내용은 서양 각국의 지리, 역사, 정치, 교육, 법률, 행정, 경제, 사회, 군사, 풍속, 과학기술, 학문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있습니다. <서유견문>은 최초의 국한문혼용서로서, 이 책의 출간으로 당시의 신문, 잡지가 비로소 국한문혼용체를 많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책은 갑오개혁甲午改革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계몽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국문학이나 신소설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연금에서 풀려난 뒤 2년 후인 1894년 유길준은 청일전쟁 와중에 세워진 김홍집을 수상으로 한 갑오내각에 참여하여 <서유견문>에서 주장한 바를 갑오경장에 이론적 근거로 제공했습니다. 이때 유길준은 민씨 척족세력과 대립하여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과 함께 대원군의 편을 들었습니다. 이는 고종황제와의 악연이 지속된 이유가 됩니다. 당시 고종과 민씨 척족세력은 일본의 침략의도를 막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 후에, 삼국간섭으로 랴우둥 반도에 대한 권리도 잃고, 러시아의 개입으로 조선에서의 영향력도 축소되어가자 국면전환을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이런 와중에 참담하게도 일본 낭인들에 의한 명성황후시해사건, 즉 을미사변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유길준은 을미사변 직후, 일시적으로 수립된 을미 내각에서 내부대신이 되었습니다.

을미 내각에서 정권을 잡은 유길준은 자신이 뜻한 바대로 개혁을 밀고 나가기 위해 단발령을 내려 전 국민적으로 반감을 샀습니다. 그는 단발령 시행 이후 고종황제 왕세자의 단발식에 훗날 순종황제가 되는 왕세자의 머리카락을 직접 자르기도 했으며, 단발령에 반대하는 최익현과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을미 내각의 친일적 성향과 점점 더 심하게 간섭해오는 일본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고종황제는 1897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떠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했습니다. 아관파천 직후 고종황제는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등을 을미사변의 적으로 규정하고 포살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일로 김홍집 등은 살해당하고 유길준은 간신히 일본으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1900년 유길준은 조선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젊은이들과 함께 의친왕을 왕으로 옹립하는 역모를 획책하기도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이 일은 국제 분쟁으로 비화되어 유길준은 일본 정부에 의해 일본 섬에 4년 동안 유배되었습니다.

유길준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전과는 제법 다른 모습을 보였는데, 그는 기울어가는 나라에 대한 회환으로 기독교에 귀의했으며, 1907년 고종황제가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폐위당할 위기에 처하자 이를 막기 위해 일본에서 백방으로 뛰어다녔습니다. 그는 일본 총리대신에게 정미 7조약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일본 신문에도 특별 기고를 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습니다. 결국, 고종황제는 퇴위하고 국권의 많은 부분이 일본 제국에 양도되고 말았지만, 유길준의 활동을 전해들은 순종황제가 그를 불러들였습니다.

귀국한 유길준은 흥사단을 조직하는 등 교육사업을 벌였으며, 한성부민회를 설치하여 지방자치제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계산학교, 노동야학회 등을 설립하여 국민 계몽에 주력하는 한편, 국민경제회, 호남철도회사, 한성직물주식회사 등을 조직하여 민족 산업의 발전에도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1910년 일본 제국이 우리나라의 국권을 피탈하자 유길준은 나라를 잃은 자괴감에 칩거했으며, 일본에서 주는 남작지위를 끝내 받지 않고 1914년에 타계했습니다. 그의 유언은 평생 아무런 공도 이룬 것이 없으니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왜 회외근supinator muscle에 통증이 생길까요?

 

 

 

전완신측前腕身側의 심층에 있고 상완골 하단의 외측부와 척골尺骨이 상단에서 생겨 요골橈骨을 뒤쪽에 감싸듯이 붙어 있는 회외근supinator muscle(손뒤침근)은 요골신경의 지배를 받습니다. 회외근의 통증은 주관절 외측, 전완상부와 외상과에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고, 체했을 때 누르게 되는 엄지랑 중지 사이에 있는 합곡혈 부위로 통증이 방산됩니다. 이 증세의 전형은 테니스 운동 시 자세불량으로 발생되는 테니스엘보tennis elbow와 작업이나 운동 등을 지나치게 하여 발생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팔 관절과 손목에 무리한 힘이 주어져 팔꿈치 관절 주위에 통증이 생기는 것입니다. 테니스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자주 일어난다고 하여 테니스엘보라 붙여진 명칭인데 의학용어로는 상완골외상과염上腕骨外傷顆炎이라 합니다. 통증은 팔꿈치를 비틀거나 불편한 자세에서 강한 충격을 받을 때 주로 발생하며, 특히 백핸드로 볼의 중심을 치지 못해 팔이 저리는 상태가 될 때 팔꿈치에 강한 부담이 됩니다. 테니스 외에 골프나 배드민턴 선수, 목수, 컴퓨터 자판을 많이 사용하는 사무원 등에게서도 같은 증상이 발생합니다. 골프의 경우 이와 유사한 증세를 골프엘보라 합니다. 모두 한 번에 큰 충격을 받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작은 충격을 반복적으로 받아 그 스트레스가 축적됨으로써 발생합니다. 원인은 팔꿈치에서 손바닥에 이르는 뼈를 싸고 있는 힘줄이 부분적으로 파열되는 데 있습니다.

치료방법은 운동이나 작업을 무리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테니스 자세를 바르게 교정합니다. 대개 백핸드와 서브 때에 주로 발생하므로 적합한 운동기구를 사용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적당한 그립과 가볍고 유연한 라켓을 사용해야 하고 너무 그립이 작으면 테니스엘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운동하기에 앞서 견관절, 주관절 및 손목관절을 풀고 운동 후에도 신전과 이완요법을 적용해야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