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사단은 조림造林이다
안창호가 100년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설립한 흥사단興士團은 앞서 6년 전 유길준이 설립하여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1911년에 해체된 것을 부활시킨 의미가 있습니다. 흥사단의 부활은 1911년에 발생한 105인 사건에서 비롯됩니다. 이 사건으로 신민회가 해체되고 서북 지역의 항일 인사들이 대거 투옥되었습니다. 사건이 일단락된 뒤 관련자들은 크게 두 방향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안창호와 이승훈 등은 준비론에 입각하여 실력양성을 시작했고, 이시영, 이동휘, 김좌진 등은 만주로 이동하여 무장 항쟁을 준비했습니다. 안창호가 실력양성론을 실현시킬 목적으로 창단한 단체가 바로 흥사단입니다. 1913년 부활한 흥사단의 주요 멤버는 안창호, 윤치오, 이광수, 장이욱, 주요한, 주요섭, 김동원, 조병옥, 안병욱 등입니다.
흥사단은 미국내 한인 교민들의 사회활동, 권익보호, 언론활동, 교민사회 단결 등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흥사단은 미국 캘리포니아와 샌프란시스코, 하와이, 필라델피아 등지로 지부가 확산되었고, 멕시코, 브라질 등 한국인 교민들이 정착한 곳으로 지부가 확산되었습니다. 1919년에는 흥사단 원동지부가 결성되었고, 1922년에는 이광수 등에 의해 흥사단 원동지부 조선지회가 조직되었으며, 흥사단 조선지회의 측면지원단체로 김동원에 의해 동우구락부, 이광수에 의해 수양동맹회가 조직되었습니다.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는 통합하여 수양동우회로 개편, 흥사단 조선지회의 활동을 보조, 지원했습니다. 흥사단 조선지부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을 계기로 해산되었으나, 해방 후 부활하게 됩니다. 해방 이후 1948년 흥사단 재조직의 주요 인물들은 장이욱, 안병욱, 김동원, 주요한, 주요섭, 조병옥, 장택상 등입니다.
흥사단을 한 마디로 말하면 안창호의 말대로 조림造林입니다. 국가를 건설하고 운용하기에 필요한 재목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흥사단에 어느 유력자가 있어 그가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수양의 필요를 깨달은 동지들이 모여서 서로 수양하고 서로 연마하는 곳입니다. 흥사단에는 주인도 없고 중심인물도 없습니다. 단우 저마다 주인이며 중심인물인 것입니다. 유덕有德한 사람이 있다면 그를 모범으로 세울 수는 있지만 그에게 권력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흥사단의 목적은 ‘우리 민족 전도대업의 기초를 준비하며 정치운동을 초월하고 기본적인 민족부흥운동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품성, 지혜, 도덕을 닦는다는 수양을 목적으로 조직되었으며, 그 수양은 민족과 국가를 외면한 개인 차원의 수양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민족의 독립과 국가 발전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가는 심신훈련입니다. 따라서 흥사단에서 설정한 수양修養은 단순히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 민족의 발전을 전망하는 대의大意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안창호는 파벌의 병폐를 고치기 위해 흥사단 창립위원들을 8도 대표로 구성하길 원했는데, 8도를 대표한 인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경기도 홍언, 충청도 조병옥, 경상도 송종익, 전라도 정원도鄭源道, 평안도 강영소, 함경도 김종림金宗林, 황해도 김항작, 강원도 염만석廉萬石 등 미국유학 중인 청년학생들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1904년 7월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온 홍언洪焉(1880~1951)은 1907년까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가 대한자강회 회보의 편집을 맡았는데, 1907년 3월 31일 발기한 대한자강회 하와이지회의 주도적 인물은 홍언의 형 홍경표였습니다. 그 후 홍언은 <합성신보> 편집에도 참여했으며, 1909년 2월에는 <신한국보>를 창간하고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때 그는 하와이 현지의 교포단체에도 적극 참여했으며, 1905년 5월에는 대한인국민회 호놀룰루 지방회의 학무원에 선임되었습니다. 그는 1911년 8월 <대동위인 안즁근뎐>을 저술하여 <신한국보>에 발표했는데, 안중근 전기는 16면에 걸쳐 생애와 의거, 재판 등을 내용으로 하와이에서 적은 자료를 가지고 엮은 짧은 전기지만, 그가 역사에 관심이 많았음을 말해줍니다. 그는 1911년 11월부터 샌프란시스코에 소재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기관지 <신한민보>의 주필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동해수부’라는 필명을 사용했습니다. <신한민보>를 15호까지 발간한 후 1912년 6월에 퇴사했고, <신한민보> 역시 재정난으로 그 해 12월 정간에 들어갔습니다. 홍언은 대한인국민회 활동과 교회 활동에 열심이었고, 안창호가 추진하던 흥사단의 창립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1915년 초 <신한민보>로 복귀하여, 편집인으로서 1919년까지 재임했습니다.
1918년 미국 와이오밍 대학을 졸업하고, 1925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조병옥趙炳玉(1894~1960)은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에 참여하여 독립 운동을 했습니다. 박사학위를 받은 그 해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신간회新幹會 등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광주학생운동, 신간회사건, 수양동우회사건 등 항일운동에 연루되어 5년에 걸치는 옥중생활을 했습니다.
1906년 4월에 미국으로 건너가 소학교를 졸업한 송종익宋鍾翊(1887~1956)은 한인들의 항일민족 운동 단체 공립협회에 가입했습니다. 1908년 3월에 일제 통감부의 외교고문 스티븐스D.W. Stevens가 샌프란시스코의 각 신문에 일제의 한국의 ‘보호국’화를 왜곡 선전한 후 전명운과 장인환이 그를 처단한 사건이 있었을 때 송종익은 두 사람의 법정 투쟁에 대비하여 조직된 재판후원회의 재무로 선임되어 활약했습니다. 안창호는 1912년 리버사이드로부터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해온 후 맨 먼저 ‘흥사단 약법’의 초안을 송종익에게 보이고 상의했으며, 그때부터 송종익은 흥사단의 첫 동지가 되었고, 흥사단 활동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안창호의 가족까지도 보살피는 등 헌신적으로 봉사했습니다. 송종익은 고향이 대구 사람으로 서울로 안창호를 찾아가 미국으로 건너갈 것을 물어본 것이 인연이 되어 안창호의 가장 신임 받고 친분 있는 동지가 되었습니다.
황해도를 대표한 김항작金恒作은 1922년에 이광수와 함께 자작회自作會의 설립을 돕게 되는데, 그 해에 성립된 일본의 가토加藤 내각이 재정긴축, 소비절약의 정강을 발표하자 국내 유지들은 이를 역이용하여 경제독립, 자립경제 등 일련의 국산품애용 계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연희전문 학생 염태진廉台鎭, 박태화朴泰和 등 50명은 김항작과 이광수의 지도 아래 자작회를 조직하고 국산품애용운동을 통해 민족정신을 순화할 목적으로 서대문에 전시장을 마련한 뒤 국산품을 진열하며 이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각도를 대표하는 여덟 명의 창립위원들은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 강영소姜永韶의 집에서 창립 결성을 했습니다. 흥사단은 1920년까지 8년 동안 창단위원회에서 운영했으며, 1921년부터 이사부, 의사부, 심사부의 3부역원제가 실시되었습니다. 송종익은 1921년부터 1925년까지 이사부장을 맡았고 1926년부터 1936년까지는 이사부 재무원으로 안창호의 부재 시에는 실질적으로 흥사단을 이끌어갔습니다.
흥사단은 미주지역에서 창단되었으나 중국에 흥사단 원동위원부遠東委員部와 국내에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가 결성되어 세력을 확장해갔습니다. 안창호는 1919년에 영국 조계 모이명료에 집 한 채를 세를 내어 흥사단 원동위원부의 단소로 삼았습니다. 그는 이 집을 깨끗이 꾸몄습니다. 미국서 단우가 된 지 오래된 박선제 목사가 사무를 보았고, 사무실, 식당, 담화실, 집회실, 오락실, 침실을 정결하게 정돈했습니다. 정결 정돈은 안창호의 생활습관입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방을 아무렇게나 하고 청소를 하지 않으면서 허울 좋게 불구소절不拘小節(사소한 예의범절에 거리끼지 아니함)이란 말로 덕목으로 스스로 변호했는데, 안창호는 우선 몸가짐과 거처로부터 개조 일신하지 않고서는 문명한 독립 국민이 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넉넉지 못한 자기의 여비 중에서 커튼, 화분 등을 사고 또 편안한 의자를 사들여서 단소를 아름답게 꾸몄습니다. 문짝 한끝, 화분 하나도 몸소 여러 상점을 돌아서 골라잡았고, 그것을 걸 곳에 걸고 놓을 곳에 놓는 것도 깊이 생각한 후 결정했습니다. 새로 입단한 단우들도 안창호를 배워서 화분, 차구茶具 등을 가져온 이가 있었습니다.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어물쩍어물쩍 하는 것을 그는 거짓과 아울러 조국을 망하게 한 원수로 보았습니다.
1920년 가을 어느 날 밤, 상해 모이명료의 흥사단 제단에 수십 명이 모씨의 입단 문답을 보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 중에 이미 미국에서 입단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문답위원은 안창호였습니다. 이광수는 그날의 장면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하는 흥사단 입단인 만큼 흥사단 역사에는 중요한 시기일뿐더러 이날 문답을 받는 지원자는 상해에서도 중요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어서 매우 흥미가 깊었다. 문답위원과 문답 받는 자가 조그마한 테이블을 새에 두고 마주 앉았다. 위원은 단의 격식에 의해 어깨에 누른빛과 붉은빛 두 쪽을 합하여서 된 단대團帶를 메었다. 누른빛은 무실務實이니 참됨을, 붉은빛은 역행力行이니 힘을 상징하는 색으로서 충의忠義의 백白과 용감勇敢의 청靑과 아울러서 4색이었다. 가르면 4색이요, 더욱 중요한 것을 들면 황, 홍 2색이었다. 무실과 역행-참과 힘이다.
위원은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나라를 구할 이론과 방법을 토론하게 되었으니 묻는 자나 대답하는 자나 다 터럭 끝만한 거짓도 없는 참으로 하여야 할 것이요, 이제 우리는 저마다 가진 신앙을 따라서 기도하시오.”
이것은 종파를 초월한 단결임을 보임이요 동시에 양심에도 없는 거짓 예禮를 행하기를 꺼림이었다. 예수교인이면 주기도문, 불교인이면 심경心經을, 무엇이나 제 믿음에 따라서 제가 참된 심경으로 묻고 대답할 힘을 달라고 빌 것이었다.
기도가 끝나매 위원인 도산은 문답을 시작하였다.
“그대는 흥사단에 입단하기를 원하시오?”
“예, 나는 흥사단에 입단하기를 원합니다.”
“왜?”
“우리의 독립을 회복하고 민족 영원의 창성을 구하려면 흥사단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고 믿습니다.”
“왜?”
“우리는 힘이 없어서 나라가 망하였으니 나라를 흥하게 하려면 힘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힘이란 무엇인데?"
“한 사람 한 사람의 건전한 인격과 그 건전한 인격들로 된 신성한 단결입니다.”
“나라의 힘이라면 부력富力과 병력兵力일 탠대, 어찌하여 그대는 부력과 병력은 말하지 아니하고 건전한 인격과 신성한 단결을 힘이라고 하시오?”
“건전한 인격과 신성한 단결이 없이는 부력도 병력도 생길 수가 없습니다.”
“왜? 농업과 상공업이 발달하면 부력은 저절로 있을 것이요, 대포와 군함만 있으면 병력은 저절로 있을 것이 아니오?”
“국민이 건전한 인격과 신성한 단결이 없고는 농업이나 상업이나 공업도 발전할 수 없고, 또 대포와 군함이 있어도 그것을 쓸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
“그러면 지식과 기능과 인격과는 d더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오?”
“지식과 기능은 인격의 3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인격의 3요소는 무엇 무엇입니까?”
“덕德과 체體와 지智입니다.”
“덕이란 무엇이오?”
“도덕道德입니다.”
“도덕이란 무엇이오?”
“도道란 사람이 마땅히 좇아갈 길이요, 덕德이란 그 길을 걸어감으로, 즉 실천함으로 생기는 정의情意의 경향, 궤도, 다시 말하면 옳은 길을 즐겨하는 버릇과 힘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덕의 중심이 되는 것, 근본이 되고 기초가 되는 것이 무엇이라고 믿으시오?”
“참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참이란 무엇이오?”
“거짓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짓이란 무엇이오?”
“거짓말과 속이는 행실입니다.”
...
안창호의 답을 끌어내는 질문은 소크라테스식입니다. 문답을 통하여 문답 받는 본인으로 하여금 자기의 사상을 정리하게 해서 그 잘못을 스스로 없애고 바른 견해를 스스로 발견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광수에 의하면 안창호는 그때까지 소크라테스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광수는 안창호의 다른 지식 대부분 독창獨創인 것과 같이 문답 방법도 독창이었다고 말합니다.
안창호는 문답 중에 10분의 휴식을 선언했는데, 이는 휴식을 취하는 동안 문답을 받는 사람이나 방청하는 사람 모두 잘 생각해볼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문답 중에는 흥사단 단원으로서의 그리고 주인으로써 책임을 통감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광수는 이렇게 전합니다.
“흥사단에 입단하기를 원하시니, 흥사단의 주은은 누구요?”
“나요.”
“흥사단이 잘되지 아니할 때에 그 책임자가 누구요?”
“나요.”
“분명히 그렇소?”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나 할 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고도 흥사단이 잘 안 된다면 몰라도.”
“그대에는 다른 사람의 잘못이라고 책임을 돌리겠소?”
“제 힘을 다 쓴 이상에야 어찌해요?”
“있는 힘을 다하여도 흥사단이 망할 수 있겠소?”
“나 혼자 어지해요? 다른 단우들이 다 떨어져나간다면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흥망의 주인이 다른 단우들이지 자신은 아니란 말이구려?”
(대단히 거북한 모양으로)“그러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자네가 분명히 흥사단의 주인일 것 같으면 할 도리가 있지 아니하겠소?”
(그제야)“예, 내가 있는 동안 흥사단은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오.”
...
“자네가 흥사단의 중심인물이 되겠소? 그런 자신이 있겠소?”
“내가 흥사단의 중심인물이 되고 안 되는 것은 나의 인격 여하와 동지들의 내게 대한 신임 여하에 달렸지마는, 나 혼자만 남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흥사단은 지켜갈 것이니 내가 흥사단의 주인인 것은 변할 이가 없습니다.”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한다)“자네 혼자서 우리나라를 부흥시키지 아니하고 흥사단에 들어와서 하려고 하시오? 남의 만들어놓은 단체에 자네만한 명사名士가 이 모양으로 입단 문답을 하고 들어온다는 것이 체면상 수치가 아니오?”
“부끄러운 말씀이지마는 미상불 그런 생각도 있었소.”
“그런데 왜 입단을 하려고 하시오?”
“이 일은 혼자는 못할 일이오, 여럿이 뭉쳐서야 할 일이므로.”
“혼자서는 안 될까요?”
“안 됩니다.”
...
장황한 문답이 이어지다가 다음에는 조직, 의무, 재정 등에 관한 문답을 했습니다. 이광수는 입단 문답에 관해 안창호가 매양 이런 말을 했다고 적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슨 회를 한다 하면 그 취지와 규칙도 잘 알아보지 아니하고서, 혹은 아무가 하는 것이니 들어야 한다 하여 들고, 혹은 남들이 다 드니 아니 들 수 없다 해서 든다. 그러고는 누가 그더러 “아무 단체의 취지가 무엇인가? 무슨 사업을 위해서 이루어진 것인가?” 하고 물으면 그는 “나도 잘은 몰라” 하고 태연히 대답한다. 이리하여서 우리나라에는 취지 모르는 회원으로 된 단체가 많다. 취지 모르는 회원이 회원의 의무를 알 리도 없고 행할 까닭은 더구나 없다. 이것이 거짓이다. 그러므로 흥사단에 입단하는 사람은 흥사단의 약법을 잘 알기 위하여 외우고, 그 해석이 일치하기 위하여 한 조문 한 글자를 따라서 문답하는 것이다. 이리하여야 내 생각만도 아니요, 네 생각만도 아니요, 우리 생각이라 하는 것이 생기니, 이 모양으로 여론이 생기고 민족의 의사가 생기는 것이다. 흥사단의 입단 문답은 이러한 필요에서 온 것이거니와, 이 문답을 통하여서 우리 민족 철학이 토의되는 것이었다. ... 더구나 도산의 문답술은 대단히 발달된 것이어서 받는 자의 심중을 온통 털어내지 아니하고는 말지 아니하거니와, 그러면서도 결코 개인적인 심사에는 조금도 저촉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개인적인 심사에는 조금도 저촉하는 일이 없었다. 가령 신앙, 연애, 가정 사정 같은 것에 대하여서는 받는 자의 양심의 비밀은 엄중이라고 할 만하게 존중하였다. 도산은 평상시에도 남의 개인적인 사사로운 일에 관하여서는 결코 알려 하지 아니하였고, 혹시 무심코 그런 것이 귀에 들어왔더라도 안 들은 것으로 여겼다. 도산은 동지에 대하여서 비밀을 지키는 수양을 하라고 때때로 권하거니와, 이 말의 뜻은 할 필요 없는 말, 해서는 안 될 말, 내게 상관없는 말을 하지 않는 공부를 하라는 뜻이었다.
안창호는 17세나 18세의 소년과 문답할 때에도 자기가 높은 자리에 있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며, 남자나 여자나 어른이나 아이나 다 평등의 지위에서 물었고, 평등의 지위에서 대답하는 말을 존중했습니다. 그는 평시에도 남의 말을 꺾거나 누르는 일이 없었습니다. 비록 척 보기에 어리석은 말이라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심경을 존중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을 그냥 가지고 돌아가게 하진 않았습니다. 가르친다 하는 의식이 없이 그 어리석음을 스스로 깨닫도록 유도했습니다. 이광수는 여기에 안창호의 사람에 대한 끝없는 애정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광수는 안창호가 흥사단 단우를 고르는 표준은 두 가지였다며 첫째, 거짓이 없는 사람, 둘째, 조화성調和性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말한 조화성이란 단체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성격의 사람ㄴ을 의미합니다. 자기 고집이 강하고 말이나 행동이 다른 사람과 서로 맞지 않고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즉 규각圭角이 심한 사람은 당체생황에서 늘 말썽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거짓이 있는 사람, 규각을 세우는 사람이라도 한 가지 기술과 한 가지 능력이 있다면 받아서 수양을 시키면 되지 않습니까?” 하는 주장에 대해서 안창호는 “금주동맹禁酒同盟은 술을 아니 먹는 사람들이 모임으로 성공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광수는 안창호가 흥사단 단우를 고를 때 사회의 명성, 학식, 수완 같은 것을 둘째로 여겼다고 말합니다. 진실한 사람 이것이 첫 조건이었습니다. 사회의 명성, 학식, 수완 등을 지닌 사람들 가운데는 임기응변臨機應變과 권모술수權謀術數를 진실보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경계했습니다. 안창호는 민족을 위해서는 영웅英雄 호걸豪傑보다도 진실한 사람을 구했는데, 철두철미 거짓을 벗고 오직 참으로만 나가는 사람이야말로 나라를 구원하고 백성을 건지는 민족적 영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흥사단의 조직은 세 사람의 감독이 머리에 있고, 그 밑에 의사부議事部, 이사부理事部, 검사부檢査部의 3부가 있어 삼권분립三權分立의 제도를 사용했습니다. 감독은 도덕적 권위일 뿐이고, 행정의 수뇌는 아닙니다. 비토권도 규정함이 없으며, 다만 이사부나 의사부나 검사부가 약법과 아울러 감독의 의사를 존중하리라는 도덕적 권위의 원천이 될 뿐입니다. 감독은 단 내의 가장 모범적인 인물 중에서 의사부의 선거로 추천합니다. 감독을 3인으로 한 것은 한 사람의 재단裁斷보다 세 사람의 재단이 실수가 없고, 다섯 사람보다 세 사람의 통일이 쉽다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서 흥사단의 단우들은 안악사건, 105인사건, 3·1운동, 동우회사건 등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 독립 운동에 직접 간접으로 참여했으며, 1926년에는 종합월간지 <동광東光>을 창간하여 1933년까지 40호를 속간하기도 했습니다.
<동광>은 1926년 5월 20일 주요한朱耀翰을 편집 발행인으로 하여 창간되었습니다. 창간호는 4‧6배판 48쪽. 1927년 8월 1일 통권 16호를 발행하고 재정난으로 중단했다가, 1931년 이광수에 의해 속간되었습니다. 1933년 1월 30일 통권 40호까지 발행했으며, 그 중 3호는 원고 검열로 말미암아 간행되지 못했습니다. 사회주의 경향의 잡지들에 맞서서 안창호, 이광수를 주요 집필진으로 하여 민족주의 이념을 고취하면서 특히 안창호를 비롯한 수양동우회 회원들의 글이 다수를 차지했습니다. 수양동우회의 주장과 일치하는 논조를 지켜나간 점으로 보아 이 잡지는 수양동우회의 준기관지로서의 성격을 지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