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흥사단은 유길준이 설립한 계몽단체

 

 

 

독립 운동의 물적 토대와 인적 토대를 구축해나가지 않으면 우리 민족의 장래 희망도 없다고 본 안창호는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興士團을 설립했습니다. 흥사단은 그의 필생의 사업이 됩니다. 그는 8도 대표를 선정해 민족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중견인물을 배출하기 위한 동맹수련단체로 출범시켰습니다. 그는 혁명가만이 아니라 장차 독립될 국가의 전문분야에서 전문인으로서 조국 건설에 이바지할 인재를 키우는 일도 독립 운동이라는 신념으로 흥사단 단원들에게 광복된 조국에서 봉사할 수 있는 전문인이 되라고 말했습니다.

원래 흥사단은 안창호보다 스물두 살 많은 유길준兪吉濬(1856~1914)이 1907년에 국민 모두를 선비로 만들겠다는 국민개사國民皆士의 뜻을 품고 설립한 계몽단체였습니다.

유길준에게 따라붙는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비 유학생이라는 것입니다. 유길준과 고종황제의 관계는 악연인데, 고종황제로 인해 학업이 순조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민영익의 후원으로 미국에서 대학진학 예비학교인 더머 아카데미Governor Dummer Academy(현재 가버너 더머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있었는데, 1884년 갑신정변의 여파로 고종황제가 개화파에 완전히 등을 돌리고 수구파였던 민씨 척족이 정권을 잡으면서 유길준의 유학비용이 끊어졌습니다.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던 유길준은 귀국길에 올라 유럽을 경유하여 견문을 넓히고 동남아시아, 일본을 거쳐 1885년 12월 인천에 상륙했습니다.

귀국한 유길준은 김옥균, 박영효 등 갑신정변의 주모자들과의 친분으로 인해 바로 체포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포도대장 한규설의 집에 감금되었다가 이후 가회동 취운정으로 옮겨 1892년까지 7년 동안 연금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 기간에 유길준은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했습니다. 이 책은 1889년에 완성되었으나 6년 후인 1895년 그 해 후쿠자와 유키치가 설립한 동경의 교순사交詢社에서 출간했습니다. 내용은 서양 각국의 지리, 역사, 정치, 교육, 법률, 행정, 경제, 사회, 군사, 풍속, 과학기술, 학문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있습니다. <서유견문>은 최초의 국한문혼용서로서, 이 책의 출간으로 당시의 신문, 잡지가 비로소 국한문혼용체를 많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책은 갑오개혁甲午改革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계몽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국문학이나 신소설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연금에서 풀려난 뒤 2년 후인 1894년 유길준은 청일전쟁 와중에 세워진 김홍집을 수상으로 한 갑오내각에 참여하여 <서유견문>에서 주장한 바를 갑오경장에 이론적 근거로 제공했습니다. 이때 유길준은 민씨 척족세력과 대립하여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과 함께 대원군의 편을 들었습니다. 이는 고종황제와의 악연이 지속된 이유가 됩니다. 당시 고종과 민씨 척족세력은 일본의 침략의도를 막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 후에, 삼국간섭으로 랴우둥 반도에 대한 권리도 잃고, 러시아의 개입으로 조선에서의 영향력도 축소되어가자 국면전환을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이런 와중에 참담하게도 일본 낭인들에 의한 명성황후시해사건, 즉 을미사변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유길준은 을미사변 직후, 일시적으로 수립된 을미 내각에서 내부대신이 되었습니다.

을미 내각에서 정권을 잡은 유길준은 자신이 뜻한 바대로 개혁을 밀고 나가기 위해 단발령을 내려 전 국민적으로 반감을 샀습니다. 그는 단발령 시행 이후 고종황제 왕세자의 단발식에 훗날 순종황제가 되는 왕세자의 머리카락을 직접 자르기도 했으며, 단발령에 반대하는 최익현과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을미 내각의 친일적 성향과 점점 더 심하게 간섭해오는 일본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고종황제는 1897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떠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했습니다. 아관파천 직후 고종황제는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등을 을미사변의 적으로 규정하고 포살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일로 김홍집 등은 살해당하고 유길준은 간신히 일본으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1900년 유길준은 조선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젊은이들과 함께 의친왕을 왕으로 옹립하는 역모를 획책하기도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이 일은 국제 분쟁으로 비화되어 유길준은 일본 정부에 의해 일본 섬에 4년 동안 유배되었습니다.

유길준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전과는 제법 다른 모습을 보였는데, 그는 기울어가는 나라에 대한 회환으로 기독교에 귀의했으며, 1907년 고종황제가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폐위당할 위기에 처하자 이를 막기 위해 일본에서 백방으로 뛰어다녔습니다. 그는 일본 총리대신에게 정미 7조약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일본 신문에도 특별 기고를 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습니다. 결국, 고종황제는 퇴위하고 국권의 많은 부분이 일본 제국에 양도되고 말았지만, 유길준의 활동을 전해들은 순종황제가 그를 불러들였습니다.

귀국한 유길준은 흥사단을 조직하는 등 교육사업을 벌였으며, 한성부민회를 설치하여 지방자치제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계산학교, 노동야학회 등을 설립하여 국민 계몽에 주력하는 한편, 국민경제회, 호남철도회사, 한성직물주식회사 등을 조직하여 민족 산업의 발전에도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1910년 일본 제국이 우리나라의 국권을 피탈하자 유길준은 나라를 잃은 자괴감에 칩거했으며, 일본에서 주는 남작지위를 끝내 받지 않고 1914년에 타계했습니다. 그의 유언은 평생 아무런 공도 이룬 것이 없으니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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