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예술가 자크 루이 다비드



 



 

 

 

다비드는 1793년 8월 10일에 개최될 예정인 페스티벌 준비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수십만 명의 파리 시민이 참여하는 대축제는 루이 16세를 축출하고 공화국을 선포한 혁명의 날을 기념하고 시민들의 단합을 꾀하기 위한 것으로 가톨릭의 전통적 페스티벌을 모방한 공화국의 건국을 상징하는 가장행렬이 있는 축제였다. 다비드의 책임 하에 축제준비위원으로 그의 제자 지오아키노 기우세페 세랑젤리, 건축가들 오귀스트 세발 위베르와 장 니콜라스 루이 뒤랑, 목수 뒤플레이, 그리고 음악가들 브루니, 사레트, 메훌이 참여했다. 다비드는 축제에 사용할 의상, 건축물, 그리고 소품들을 디자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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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의 혁명적 가장행렬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1794년 6월 8일에 개최된 ‘지고한 존재를 위한 페스티벌’125이었다. 1793년의 프랑스는 오래 지속된 왕과 교회와의 관계면에서 볼 때 더이상 기독교 국가라고 할 수 없게 되었으나, 일종의 종교적 형식을 필요로 했는데 사회적 유대와 사후 구원에 대한 희망을 위해서는 종교를 완전히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고한 존재’에 관한 문화로서의 시민 종교가 형성된 셈인데 이 존재를 이성적이며 인정 많고 지혜롭다고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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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은 튈르리 공원에서 십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대규모로 거행되었다. 로베스피에르가 개회사를 낭독할 때 밝혀진 거대한 빛이 무신론을 상징하는 지혜의 동상을 환하게 밝혀 모습을 드러나게 했다.124 이는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무신론적 행사였다. 페스티벌에 참여한 시민들은 2십만 명에 이르렀으며, 그들은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신을 위한 찬송가를 불렀고, 젊은이와 늙은이들이 다비드의 <호라티우스의 맹세>8에서와 같은 제스처를 취하며 충절을 맹세했다. 가장행렬은 오늘날 에펠 타워가 있는 곳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원형경기장, 개선문, 그리고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거대한 언덕이 있었고 헤라클레스 동상과 자유의 나무가 우뚝 솟아 있었다.127

헤라클레스 동상은 다비드가 시민들의 단합을 위해 사용한 것이다. 헤라클레스 동상은 포획한 적의 대포를 녹여서 제조되었고 받침대는 궁정의 기념비와 오늘날 노트르담으로 불리우는 당시 ‘이성의 성전Temple of Reason’으로 불린 곳에 세워졌던 성자와 왕들의 동상을 녹여서 만들었다. 헤라클레스의 한 손에는 자유와 평등을 상징하는 작은 조각이 들려 있고 다른 손에는 가공할 무기 곤봉이 들려 있다. 다비드에게 헤라클레스는 매우 유효한 혁명의 상징물이었다. 그는 헤라클레스를 ‘프랑스 시민의 승리’로 상징하기도 했다. 1793년 11월 그는 이 거대한 동상이 프랑스 시민을 상징한다면서 파리의 퐁 뇌프에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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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는 대혁명을 주제로 한 드라마의 무대휘장을 디자인하면서 헤라클레스를 승리의 병거 위에 위치시키고 그의 무릎에 조그만 조상 ‘자유와 평등’을 올려놓고 그 앞에 학문, 예술, 사업, 그리고 부를 의인화한 조상을 놓았다. 네 마리의 황소가 이 병거를 끌면서 바퀴로 왕실과 봉건주의의 상징물들을 박살낸다. 승리의 천사가 한 손에 창을 들고 황소 위를 날아 앞에 넘어진 왕을 칼로 찌르는 두 사람의 모습이 있다. 고대, 중세, 현대의 정치적 영웅들인 로마 여인 코르넬리아, 브루투스, 윌리엄 텔, 마라, 르 펠레티에, 피에르 바이유, 샤를 보바이 드 프레오가 병거 뒤를 따르고 있다.128

다비드는 혁명을 찬양하는 작품들을 제작할 계획만 세워놓고 실현시키지 못한 것들도 많은데 그것들은 계획으로만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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