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과 공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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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이 성공적으로 치러진 지 7주 만인 1794년 7월 27일 공화당 내 우파와 좌파의 충돌로 인해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추종자들이 실각과 더불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보수파의 대표적 인물 장 람베르 탈리앙과 루이 스타니슬라 프레롱이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공포정치’는 1793년 9월 17일부터 이듬해 7월 28일까지 10개월 이상 지속되었으며 이 시기에 3, 4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다비드는 로베스피에르와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테르미도르(Thermidor, 프랑스 공화력*의 제11월) 9일, 즉 7월 27일의 반동으로 처형의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로베스피에르가 체포되던 날 그는 공회 전당대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그날 병중이었다고 변명했지만 믿을 수 없는 것이 그는 매우 건강한 상태였다. 그는 공회 집회에서 불쑥 연단에 올라가 로베스피에르를 향해 “선생님이 사약을 마시게 되면 저도 사약을 마시겠습니다.”라고 했고 많은 사람들이 들었다. 그만큼 그는 로베스피에르에게 존경을 표하며 추종했다. 다비드는 쟈코뱅 공화국의 혁명적 문화를 결성하는 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장본인이었으므로 사건 당일 전당대회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은 의문을 살 만 했다. 이런 사태가 발생할 줄을 사전에 알고 자신의 안녕을 위해 그날 대회에 불참했던 것 같다.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일당은 체포된 다음날 아침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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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미도르 9일과 10일의 정의의 행위>
비에르가 제작한 판화 <테르미도르 9일과 10일의 정의의 행위>132를 보면 7월 27~28일 파리에서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단두대에서 잘려진 목들이 여기저기 널린 곳을 복수의 두 여신이 가로질러 달려가는 장면이다. 그림 아래 기록된 바로는 이 압제자들은 정의의 논리에 따라 과거 그들이 처형한 희생자들의 뒤를 따르고 있다. 비에르는 테르미도르의 쿠데타를 ‘정의의 행위’란 제목 하에 은유적으로 묘사했다.
테르미도르 시기에 유행한 노래가 있다.
목이 잘릴 자들이여, 너희들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니 두려움으로 창백해지는구나
너희는 우리의 믿음을 저버렸지
포악한 자들이여, 흙으로 돌아가라
죽음의 땅으로 가라
피에 취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을 짓만 한 자들이여
지독한 생애를 마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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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인간애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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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무도한 자들>
시민들이 이 노래를 반주에 맞춰 불렀으며 무대에서도 불릴 정도로 대중적이었다. 쟈코뱅이 자신들을 살해했다고 하는 시민들은 “쟈코뱅을 죽여라, 그놈들은 불한당들이다!”라고 소리쳤다. 이 시기에 쟈코뱅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은 매우 컸으며 쟈코뱅당원들은 위선자이며 그들의 이념은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제작된 <정의와 인간애의 친구>133는 쟈코뱅당원들의 이중성을 말해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면 멋진 의상을 한 쟈코뱅이 뒤에서는 사람들을 살해하는 일에 관여하고 있다. 여기서 신사차림의 사람은 쟈코뱅주의를 상징한다. 쟈코뱅은 무정부주의자 또는 프랑스의 새로운 야누스 135로도 풍자되고 극악무도한 자들로도 묘사되었다. <극악무도한 자들>134에서는 쟈코뱅의 이중성이 급진 혁명가와 메두사의 머리를 한 표독한 여자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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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민 모두의 목을 벤 후 사형집행인의 목을 베는 로베스피에르>
쟈코뱅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는 자연히 이념에 있어서 그들의 주역인 로베스피에르에게 모아졌고 당시 제작된 컬러 판화에는 심장을 짠 피를 잔에 채워 마시는 잔인한 인간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시기에 죽음을 주제로 한 섬뜩한 그림들이 널리 알려졌는데 <프랑스 국민 모두의 목을 벤 후 사형집행인의 목을 베는 로베스피에르>136도 이런 것들 중 하나이다. 7월 27~28일 양일에 처형된 사람의 수는 파리에서만 2천 8백 명이었고 프랑스 전체로는 1만 8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4만 명으로 추산하는 학자도 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감옥에 투옥된 사람은 30만 명에 이르렀다. 7월 29일에는 파리 코뮌의 멤버 70명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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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미도르 9일의 알레고리>
혁명의 이름 하에 자행된 포악한 마구잡이 처형을 작자미상의 드로잉 <테르미도르 9일의 알레고리>137에서 볼 수 있다.
테르미도르 이후 전형적인 포스터 형식의 판화가 당시의 절망적 상황을 말해준다. 공포정치 이후 1795년 5월 13일에 루이 라피트가 발표한 판화 <표독한 형상들>138은 공포정치의 시기에 투옥되었던 변호사 푸아리에의 의뢰로 그린 것이다. 테르미도르 이후 푸아리에는 조제프 르 봉을 대항하는 여론몰이를 개시했다. 그는 감옥에 있을 때 알게 된 몽제이의 도움을 받아 르 봉을 비난하는 팜플렛을 연속적으로 발행했는데 르 봉의 권력 남용과 감옥에서의 학대상황을 세부적으로 폭로했다. 그가 발행한 팜플렛은 널리 배포되었다. 테르미도르 이후 시각문화는 피를 부른 테러리스트, 복수의 여신, 단두대, 수많은 시신들로 끔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