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의 성격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4·19혁명은 3·15부정선거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이 집단시위를 벌여 불만을 표시했고, 정부가 이에 효율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경찰에 발포명령을 내려 많은 사람을 죽게 했으며, 이에 흥분한 전 국민이 집단 항거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사건이었다.


4·19혁명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물론 3·15부정선거였지만, 그 배후에는 권위주의적 이승만 정부 체제의 특성과 비도덕성·폭력성으로 말미암은 정치적 정당성의 고갈,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에 대한 의존이 높아져 경제적 자생력을 상실했으며, 그로 인해 산업구조가 취약해졌고, 따라서 국민경제가 위기에 몰린 것이 부정선거를 통해 불만으로 분출한 것이었다.


사회와 경제적 측면에서 이 혁명의 배후를 알아보는 것은 중요한데, 1950년대 후반의 한국 사회는 경제적으로 침체상태에 있었다.
이런 경제적 위기는 한국전쟁 후 미국으로부터의 원조가 1950년대 후반 이후 급격히 떨어진 데 그 원인이 있었다.
미국의 원조에 의존했던 우리나라 경제는 원조의 급격한 감소로 심각한 위기 국면에 빠졌다.
따라서 1957년 이후 경제성장률은 둔화되었으며, 인플레이션은 더욱 심화되었고, 조세부담률과 실업률은 매년 상승했다.
한국은행이 1982년에 발표한 『한국의 국민소득』에 의하면, 경제성장률이 1957년에 7.6%였던 것이 1958년에는 5.5%, 1959년에는 3.8%, 1960년에는 1.1%로 계속해서 하락했다.
도매물가 상승률의 경우에는 1957과 1958년은 각각 마이너스 0.7%와 마이너스 2.6%를 기록했던 것이, 1959년과 1960년에는 각각 9.5%와 7.1%로 상승했다.


원조경제와 밀접하게 관련되면서 우리나라 경제구조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 것은 농촌경제였다.
PL480으로 지칭되는 미국 잉여농산물의 과잉도입은 국내 농산물 가격의 하락을 가져왔으며, 이에 따른 농업 생산력의 저하는 식량의 대외의존도를 더욱 심화시켰다.
이런 모순의 귀결로 농촌경제의 파탄은 필연적이었고, 따라서 이농이 증가했으며, 이들은 도시로 유입되어 빈민층을 형성했다.


4·19혁명 이전의 경제구조를 총체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1차 산업인 농업 분야에서의 정부 정책의 실패로 말미암아 자립적 국민경제의 토대가 상당한 정도로 훼손되었다.
2차 산업에서는 외국 원조에 기생하는 종속적 산업구조가 형성되었으며, 그나마 상업자본적인 성격이 강하여 공업화의 내실을 기대하기 곤란했다.
3차 산업은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졌는데, 이는 농촌 이농민의 도시유입으로 인해 발생한 불완전 취업상태와 도시의 인구를 공업으로 흡수할 만한 능력이 없는 산업상태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국민경제의 위기는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전철환의 『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3』에 의하면, 1960년 당시 완전 실업률은 8.2%에 달했고, 이는 잠재 실업률 26.0%를 합하면 사실상 총실업률은 34.2%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같은 국민생활의 전반적인 파탄은 4·19혁명의 객관적인 조건으로 작용했다.


김영명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학생들이 4·19혁명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은 당시 한국사회의 구조적 특성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적었다.
1950년대 우리나라 사회는 도시화와 교육기회의 증대라는 이른바 근대화를 경험하고 있었지만, 산업화를 기반으로 하는 계급의 분화와 성장은 매우 미진한 상태에 있었다.
서관모는 『한국사회의 계급구성과 계급분화』에서 우리나라 사회적·경제적 계급구성이라는 면에서 볼 때 1960년의 우리 사회는 전체 경제활동 인구 가운데 농민이 58.1%, 도시의 프티부르주아 및 전문직 종사자가 13.4%, 그리고 생산직 노동자는 10.5%에 불과한 농업사회였다.
계급의 조직화와 정치의식의 성장은 걸음마 단계에 머물러 있었으며, 민간세력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는 따라서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였다.
경제적으로 발달되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미분화되어 있었으며, 정치적으로 수동성이 당시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경향이었다.
1950년대 우리나라의 지배적인 경향은 한 마디로 사회적·경제적 모순 및 권위주의적 정치에 대해 민간 사회가 적극적으로 항의할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승만 정부의 철저한 정치적 통제 및 조작을 통해 정권에 이용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경향은 1950년대 전반기의 대학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사회는 반공주의 주입을 통한 이념적 획일화, 경제적 빈곤, 비도덕적 정치에 대해 적극 대항하지 못하는 침체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대학사회 일각에서는 중요한 변화가 소리 없이 발생하고 있었다.
자유, 평등, 민주주의, 민족주의에 대한 가치관들이 대학사회에 싹트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학생들은 우리나라의 현실을 되새겨 보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
대학사회 내에는 기성세대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하는 분위기가 점차 증가했고, 상대적으로 도덕적 사명감과 이상주의적 경향이 강한 대학생들은 자신들을 민주주의 수호의 전위대로 자처하기에 이르렀으며, 마침내 그들의 현실에 대한 불만은 강력한 정치참여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1950년대를 거치면서 대학사회 구성원의 수가 급속히 팽창했는데, 1948년 2만 4천여 명이었던 대학생의 수가 1960년에는 10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이 4·19혁명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정의감, 도덕적 사명감, 그리고 이를 조직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용이함 및 수적 규모의 급속한 팽창 등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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