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붕 일가의 변사와 이승만의 망명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이승만의 후계자로서 부통령이 되어 대통령직도 승계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기 위해 이기붕은 최인규와 한희석과 함께 부정선거를 추진하여 국민의 주권을 짓밟았다.
그는 4월 혁명 와중에 이승만의 강요로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4월 28일 한 가족 집단자살로 과거의 모든 죄를 뉘우쳤다.


이기붕은 전날 교수단 데모를 계기로 재연된 데모대가 서대문 자택을 포위하는 등 신변에 위기가 다가오자 우선 6군단 영내로 피신했다.
그 후 이기붕의 피신을 둘러싸고 해외망명 등 여러 설이 나도는 가운데 4월 28일 새벽 5시 40분 경무대 별관 경비실 옆에 있던 이무기 집 마룻방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기붕뿐만 아니라 부인 박마리아, 장남 강석, 차남 강욱 등 일가족이 모두 시체로 발견되었다.
계엄사령부는 이기붕 일가 자결사건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금일 아침 5시 40분 이기붕씨, 박마리아 여사, 장남 이강석 소위, 차남 이강욱 군은 시내 세종로 1번지 소재 경무대 제36호 관사에서 자결했다.
동 유해는 자결현장에서 검사와 의사의 검시를 끝마치고 수도육군병원에 안치 중에 있으며 그 진상은 조사 중이다.


이기붕 일가의 장례는 이승만 부부와 자유당 소속 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4월 30일 수도육군병원에서 고별식으로 거행되었다.


한편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승만은 1개월 남짓 이화장에서 두문불출의 나날을 보냈다.
허정 과도정부에 의해 부정선거 관련자들의 처벌 과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인 1960년 5월 29일 상오 8시 50분, 그는 부인 프란체스카만 동반하고 CAT 전세기편으로 비밀리에 김포공항을 떠나 하와이로 망명길을 떠났다.
이승만은 그날 측근 인사들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망명길에 올라 하와이의 호놀룰루로 떠났다.
허정 수반과 이수영 외무차관이 전송차 김포공항에 나갔을 뿐 그는 쓸쓸한 망명길을 떠났다.


4월 30일 국회에서는 이승만 망명에 대한 책임추궁이 있었다.
양일동 의원의 추궁에 허정은 “이박사는 건강이 나빠 하와이로 요양차 여행한 것이며, 외교관 여권을 주선해 주었다. 이박사의 이한은 오히려 시국수습에 도움이 될 것이며, 필요하면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장면 민주당 대표는 이승만 탈출의 경위와 진상을 밝히도록 과도정부에 요구했고, 부패와 독재와 학정에 인책, 사과하지 않고 망명함은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과도정부를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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