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정부의 한계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허정을 수반으로 과도정부가 4월 27일 구성되었지만, 이 내각은 급격한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과 시민의 요구를 만족시켜 줄 만한 위치에 있지 못했다.
허정이 반공을 한층 더 견실하게 진전시키고, 부정선거의 처벌대상을 고위 책임자와 잔학행위자에 국한시키며, 혁명적 정치개혁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힌 데서 그의 정치가 본질적으로 보수주의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에 있어서 허정 내각은 비혁명적인 방법으로도 혁명적인 정치개혁을 추진하지 못했고 오히려 혁명의 억제에 그 초점을 맞추었다.


이는 부정선거 관련자와 부정축재자 처벌에 대한 내각의 태도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과도정부의 입장은 기존의 법 안에서 이들에 대한 처벌을 다루는 것인데, 이들에 대한 공판을 매듭짓지 못하고 민주당 정부로 넘겼기 때문이다.
경찰에 대한 처벌도 마찬가지였다.
과도정부는 경찰의 중립화와 민주화를 약속했지만 선거부정과 정치테러 관련자들을 해임하거나 좌천시키는 데 그쳤다.
과도정부는 사회의 어느 세력, 어느 계층으로부터도 적극적 지지를 확보하지 못했다.
학생들이나 민중의 입장에서 볼 때 허정은 이승만 정권의 연장으로 여겨졌다.


과도정부는 이승만과 그 하수인들인 자유당 의원들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여론과는 거리가 먼 조치를 취했다.
유혈진압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이승만을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이승만의 미국 망명을 주선했으며, 자유당 의원들 가운데 부정선거에 관련된 자들만 처벌한다는 방침에 따라 고위 간부 14명만 구속하는 선에서 종결지었다.


게다가 과도정부는 부정축재자 처리를 축소시키거나 지연시켰다.
과도정부는 처음에는 자본축적에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부정축재자들 가운데 불법축재자들만 조세범으로 처벌하겠다고 밝힌 바 있었다.
그러나 그 뒤 허정은 자유당과 불법적으로 관련된 조세범에 한정하여 처벌하되, 이들이 자수기간 내에 자진 신고하면 탈세액 이상을 추궁하지 않겠다는 선까지 후퇴했다.
결국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처리는 그 자체가 워낙 복잡한 성격의 것이었으므로 장면 정권이 들어선 후에도 제대로 해결되지 못했다.


혁신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만 했어야 할 사안들을 과도정부는 가장 온건한 방법으로 다루었다.
과도정부가 사회의 어느 한 부문에 대해서도 과감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며 또 건드릴 수도 없었다는 사실은 뒤에 들어선 장면 정권의 행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비교적 순조롭게 개헌과 총선의 절차를 마쳤다는 점에서 과도정부로서의 최소한의 역할은 수행했다고 말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