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대상 한계 싸고 격론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그 무렵 중요 일간지들은 사설을 통해 개헌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특히 10월 8일의 재판 후 각 신문의 사설 제목들을 보면 알 수 있듯 한국일보는 “법관만의 만족을 위한 재판인가?”라고 했고, 동아일보는 “공정하지도 않은 재판”이라고 했으며, 경향신문은 “둔한 재판관이 내린 의외의 가벼운 선고”라고 했고, 서울신문은 “우리는 범죄자의 처벌을 위해서 신속한 입법을 다시 촉구한다”라고 했다.
일간지들은 법관들을 비판한 한편 정부와 국회에 대해서는 소급입법을 촉구했다.


그러나 재야 법조계는 소급입법을 강력히 반대했다.
이들의 논지는 첫째, 형벌의 불소급의 원칙과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세계 인권선언에 위반되며, 둘째, 민주주의와 인권회복을 위해 봉기한 4·19혁명 정신에 역행하는 반민주적 행위이고, 셋째, 정부와 국회는 영원히 위헌의 낙인이 찍혀 우리나라 헌정사에 우를 범할 것이며, 넷째, 끝내 국회가 혁명 입법을 강행한다면 혁명 국회의 일을 끝낸 다음에는 해산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헌법개정으로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법, 부정축재자 특별처리법, 특별재판부 및 특별검찰부 설치법 등 특별법을 제정할 길이 열렸다.
이 4개 법률 가운데 당시 가장 문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영향을 끼쳤던 것이 공민권 제한법이었다.
반민주 행위자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리며 또한 상대자의 범위를 어떻게 정하느냐 하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였다.
특히 상대자의 범위에 있어 이른바 자동케이스와 심사케이스의 한계설정을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졌다.


법적 견지에서 볼 때 이승만 정권하에서 어떤 공직을 맡았던 사람을 반민주적 행위를 했다고 단정해서 자동적으로 공민권을 제한하는 것이 위헌이라는 말이다.
즉 헌법상 모든 국민은 법에 의한 재판을 받지 아니하고는 처벌되지 않는다는 헌법 정신에 명백히 위반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같은 규정의 법률을 제정하는 자체가 사법부에 대한 입법부의 간섭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입법만으로 자동적으로 처벌된다면 국회가 재판관(사법부)의 자격까지 겸하게 된다는 설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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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권 제한 자동케이스만 666명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정치적 견지에서 보면 공민권을 제한하는 것은 정치적 보복이다. 정치인이 정치인의 공민권을 박탈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구체적인 범죄 사실에 대해서는 의법 처단해야 한다.
일정한 범위를 정해서 일괄적으로 공민권을 박탈하는 것은 천부인권 사상에 반하는 행위이다.
감히 누구의 공민권을 박탈할 수 있단 말인가?
제2공화국에서의 공민권 제한의 악례는 5·16쿠데타 후 민주당 사람 자신들이 당하게 되었으며, 1980년 5·17군사조치에서도 공민권을 박탈하는 사례를 낳게 했다.


공민권 제한 자동케이스는 3·15부정선거 당시 국무위원들과 정부위원들, 자유당 당무위원들을 위시해서 지방행정 관서의 장(군수, 서장 등)과 중요 간부들이 포함된 666명으로 집계되었고, 심사케이스 해당 범위는 현저한 반민주 행위자들을 심사 대상으로 책정하여 1만 4천여 명에 달했다.
이들 가운데 현역 국회의원들은 국회 내에 설치하는 심사위원회에서 심사를 받는 특별조치를 취했다.


국회의원들 가운데 최하영, 이재학, 전형산, 최치환, 김장섭, 박철웅, 한광석, 박종길 등 8명은 자동케이스에 해당되었으며, 송능운, 이정석, 안동준, 황성수, 송관수, 김대식, 오범수, 강경옥 등 8명은 심사케이스에 해당되었다.
심사 결과 이들은 공민권이 박탈되었으며 동시에 의원자격도 상실하게 되었다.
헌법상 국회의원을 제명하려면 재적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하는데, 9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에서 의원자격을 박탈한다는 것은 합리성이 결여되었다.


공민권 제한 대상자들 대부분은 행정적으로나 사회적·경제적으로 높은 지위를 갖고 있었고 이들 다수는 새 정부의 관리로서 종사하고 있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경찰관이 2,524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을 사회적으로 소외시키거나 공직으로부터 제거하여 적으로 만드는 것은 민주당 정권에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공민권 제한은 이승만 정권 시대의 관리들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라고 해외 여론에 반영되었으며, 당시 미국을 다녀온 정일형, 김영선은 미국의 조야에서 소급입법을 반대하고 있음을 장면 국무총리에게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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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총리, 자당도 통제하지 못해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그러나 국민과 학생들의 분노의 감정으로 보아서는 소급입법을 중단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장면 정권의 입장은 난처하게 되었다. 민주당은 자동케이스를 폐지하고 심사케이스의 범위도 줄이는 수정안을 제안했다.
장면은 보복조치라는 오해를 해소하고 다수의 공직자가 공포심을 가짐으로써 생기는 사회적·정치적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수정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혁명적 상황이 이 같은 조치를 요구하여 정당화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혁명세력의 고조된 불만을 무마시키고 반혁명세력의 성장을 저지하기 위해 절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사실 제2공화국 들어서 실시된 지방의회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변신한 자유당계는 8% 이상의 당선을 기록하고 있었다.
신민당은 이 조치의 완화를 강력히 반대했다. 이들은 민주당의 수정안이 지방 관리들의 환심을 살까 염려했고, 또한 강경한 혁명의지를 보임으로써 대중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민주당과 신민당 내의 소장파들은 대체로 원안을 고수하려 했다.
이들은 11월 13일 자유당의 중진 장경근이 병보석중 일본으로 도망하자 더욱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장면은 이 수정안에 관해 자당의 의원들조차 통솔하지 못했다.
수정안이 민의원에 회부되었을 때 불과 60명의 찬성을 얻었을 뿐이다.
이들 60명 가운데도 민주당 의원은 50명 미만에 불과했다.
민주당은 외견상 민의원에 124석을 확보해 안정세를 유지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장면이 이들을 의향대로 이끌지 못해 늘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내각책임제하에서 국무총리가 자당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정권은 안정되지 못할 것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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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을 완전히 조사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다음은 혁명 입법 가운데 두 번째로 문제가 되었던 부정축재자 특별처리방안에 대해 고찰해보자.
이 법안은 개정된 헌법 부칙에 “1960년 4월 26일(이승만 대통령 하야일) 이전에 지위 또는 권력을 이용해서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재한 자들을 행정상 또는 형사상 처리하기 위해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조항에 근거하고 있다.
4·19혁명 후 국민은 독재정권 관련자들에 못지않게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단죄와 재산환수를 요구했으나, 과도정부는 부정축재자들을 처단한다는 의도만 밝혔을 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난제를 장면 정부에게 미루었다.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특별법 제정의 길은 열려 있으나 법 제정이 그리 용이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로 첫째, 각파 사이의 이해가 상충되는 점이 있었다. 정치와 재벌 사이의 관계는 단순한 논리로서의 정경분리 관계가 아니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새로 들어서는 대로 정경유대 관계가 생겨나고 또 민주당이 야당일 때는 재벌과 인간적인 혹은 상호협조적인 관계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지금껏 정치와 경제 양 분야에서 억압 또는 소외되었다가 새로 등장하는 혁신계의 부정축재 문제에 대한 시각과 감정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대체로 민주당, 신민당 양 당의 소장파와 혁신계는 법의 강화를 주장한 반면, 양 당의 지도급은 법의 완화를 희망하고 있었다.


둘째, 경제적 혼란이 오히려 우려되었다. 기업에 대한 처벌이나 부정축재의 환수 등으로 경제적으로 혼란이 생길 위험이 있었다.
사실 이 문제는 혁명 사후처리에 있어서 가장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성질의 것이었다.
국민의 분노한 감정으로 보아서는 준엄한 체형과 재산을 몰수하고 싶지만, 경제적인 문제는 연계적 복잡성을 띠고 있으므로 처벌의 측면에만 집착할 수가 없었다.


셋째, 불법적인 기업의 활동이 이승만 정권 때 전역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실제로 완전히 조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설혹 조사가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경제적으로 조치를 취할 경우 한국의 경제구조뿐만 아니라 기본 구조마저 와해시킬 위험이 따랐다.
부정축재의 형태를 보면 다음과 같았다.


1. 8·15해방 후 적산에 대한 부정한 방법의 구입이 있었고,

2. 특권적인 은행의 융자로 이익을 챙겼으며,

3. 외환관리를 통해서 부당한 이득을 취했고,

4. 면세, 감세, 탈세 등의 부정한 축재가 있었으며,

5. 밀수를 통한 부정축재가 있었고,

6. 뇌물로 받은 부정축재가 있었다.


이것들에 대한 전반적인 수술을 가하자면 엄청난 모험을 각오해야 했다.


넷째, 처벌의 대상범위와 방법에 이견이 있었다.
처벌대상 범위와 방법의 문제는 혁명과업 완수와 국민의 감정 그리고 경제정책과 상반하는 문제였다.
범위를 넓히면 혁명과업 완수 또는 국민의 감정적인 면에서는 충족될지 모르나 경제운용의 면에서 보면 마비가 생길 수 있었으며, 그렇다고 대상의 범위를 좁히면 혁명과업 이행은 미흡해지지만 경제운용은 덜 위축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다섯째, 기업계의 반발이 매우 컸다.
이들은 국회에 탄원 및 청원을 내고 경제파국 초래 등의 용어까지 사용한 공개성명서를 발표하여 위협하는 한편, 국회 로비활동도 병행했다.
이런 요인은 법안 작성과 국회통과에 우여곡절을 겪게 했다.
민의원에서 통과된 법안이 참의원에서 완화 수정되어 민의원에 다시 회부되었다.
4월 15일 민의원과 참의원 양원을 통과한 최종안은 처벌대상에 있어 5천만 원 이상의 탈세자, 부정한 방법으로 3천만 원 이상의 재산을 취득한 자, 정부 또는 자유당의 고위 직위를 이용해서 1천5백만 원 이상을 축재한 자, 3·15선거 때 3천만 원 이상의 정치자금을 기부한 자들로 한계를 정했다.
그리고 징계방법에 서는 형사적인 처벌을 피하고 재정적인 방법으로 했다.
이 점은 기업인에게 신체적 처벌을 가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혼란을 야기할 우려가 있다는 배려에서였다.


또 한 가지 배려는 축재분의 국가반납에 있어 현금보다는 주식으로 지불하게 한 것이다.
이 역시 경제의 원활한 운용을 위해서였다.
본법 제정과 동시에 부정축재 처리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참의원의 심종석(민주당), 엄업학(신민당), 김달범(참우), 민의원의 이만우(민주당), 장영모(신민당), 서정원(민정)과 학계의 남흥우, 함인섭, 법조계의 편영완, 실업계의 유창열, 언론계의 조규동 등이 선임되었다.
그리고 1개월의 기간을 설정하여 부정축재의 각호에 해당하는 자는 자산을 취득한 내용과 구체적인 설명서를 제출하게 했다.
그러나 5·16쿠데타가 일어날 때까지 실적은 부진했고 단 한 건도 처리하지 못했다.
혁명입법 문제를 종합해 보건대 한 가지도 제대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소급법의 악례만 남겼으며, 공민권 박탈은 헌정사의 악순환만을 초래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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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장면은 집권 초에 경제 제일주의 정책을 실천할 것을 약속했다.
그는 이를 위해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원조나 차관을 도입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획대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장면은 군인을 10만 명 감축하여 재원을 조달해 볼까 했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장면은 미국으로부터 3억 달러 원조를 약속받았지만 미국 대통령 선거의 결과에 따라 수정될 수 있는 사항이라서 즉시 실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장면은 일본과 국교가 정상화될 경우 8억 달러의 대일 청구자금을 요구할 계획이었지만 이 또한 한일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 지연되고 있었다.


이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 미국이 조건부 원조를 제안했는데, 한미 경제협상을 먼저 체결하자는 것이었다.
이 협정은 이승만 정권 때 국회의 반대로 체결되지 못했던 것으로, 미국이 한국의 내정을 무제한 감독할 소지가 있는 것이었다.
이 협정에는 미국이 원조를 일방적으로 중단할 수 있는 규정이 있어 미국의 한국 정부에 대한 통제권이 강력했던 것이다.
지병문 외 3명의 공저 『현대 한국 정치의 전개와 동향』에는 이 협정의 문제가 되는 조항으로


다음 두 가지를 꼽았다.


제2조 1항 원조자료 사용에 있어서 한국 정부는 미국 당국자들에게 사업 및 그 계획과 관계 기록을 제약 없이 재검토할 것을 허용한다.


제7조 7항 사정의 변경으로 인해 원조계획의 계속이 불필요하거나 부적당하다고 결정하는 경우에는 미국 정부는 원조계획의 전부 혹은 일부를 중단할 수 있다.


다급해진 장면 정부는 이런 내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961년 2월 8일 한미경제협정을 체결하고 국회의 비준을 요구했다.
협정의 내용이 알려지자 혁신계 정당 및 사회단체들은 즉각적으로 대미종속과 미국의 침략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뒤이어 진보적 정치세력과 학생들의 반대투쟁이 전개되었다.
진보적 정치세력은 2월 13일 사회대중당의 제안으로 17개 정당 및 사회단체들로 구성된 2·8 한미경제협정 반대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같은 날 서울 시내 11개 학생 단체들은 한미경제협정 반대 전국학생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14일 가두 성토대회를 개최했다.
이 공동투쟁위원회는 2월 24일 서울에서 협정반대 성토대회를 개최하여 협정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심지어 신민당과 민주당의 소장파 그룹(신풍회)조차도 “한미경제협정은 을사조약과 같은 것”이라면서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런 반대투쟁에 관해 장면 정권은 “북한의 지시에 의한 것” 혹은 “미국을 반대하는 자는 공산주의자들뿐”이라고 악선전하면서 협정반대 시위를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할 것이라고 위협하고 나섰다.
그리고 한국실업자협회 등 어용단체를 동원해서 협정반대운동을 반대하는 관제데모를 벌였다.
결국 이 협정의 비준안은 민의원에서 133 대 1, 참의원에서 32 대 1의 찬성으로 통과되고 말았다.


한편 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을 지켜보면서 장면 정권은 대중의 정치세력화와 연대투쟁에 대해 위기를 느끼고 이에 대처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장면 정권이 시도한 것이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과 ‘반공을 위한 특별법’이었다.
이는 당시 분출되고 있는 민중의 불만을 억압하고 활발한 통일논의를 위축시키는 동시에 대중과 결합하고 있는 진보적 정치세력의 활동영역을 축소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시도는 이내 벽에 부딪쳤다.
1961년 3월 8일 2대 법안이 발표되자 야당인 신민당과 민주당 내의 신풍회를 비롯하여 언론계 및 법조계 등에서도 일제히 반대의사를 표명했고, 혁신세력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즉각적인 반대투쟁에 나섰다.
전국악법반대공동투쟁위원회가 발족되었으며, 악법반대운동이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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