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을 완전히 조사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다음은 혁명 입법 가운데 두 번째로 문제가 되었던 부정축재자 특별처리방안에 대해 고찰해보자.
이 법안은 개정된 헌법 부칙에 “1960년 4월 26일(이승만 대통령 하야일) 이전에 지위 또는 권력을 이용해서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재한 자들을 행정상 또는 형사상 처리하기 위해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조항에 근거하고 있다.
4·19혁명 후 국민은 독재정권 관련자들에 못지않게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단죄와 재산환수를 요구했으나, 과도정부는 부정축재자들을 처단한다는 의도만 밝혔을 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난제를 장면 정부에게 미루었다.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특별법 제정의 길은 열려 있으나 법 제정이 그리 용이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로 첫째, 각파 사이의 이해가 상충되는 점이 있었다. 정치와 재벌 사이의 관계는 단순한 논리로서의 정경분리 관계가 아니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새로 들어서는 대로 정경유대 관계가 생겨나고 또 민주당이 야당일 때는 재벌과 인간적인 혹은 상호협조적인 관계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지금껏 정치와 경제 양 분야에서 억압 또는 소외되었다가 새로 등장하는 혁신계의 부정축재 문제에 대한 시각과 감정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대체로 민주당, 신민당 양 당의 소장파와 혁신계는 법의 강화를 주장한 반면, 양 당의 지도급은 법의 완화를 희망하고 있었다.


둘째, 경제적 혼란이 오히려 우려되었다. 기업에 대한 처벌이나 부정축재의 환수 등으로 경제적으로 혼란이 생길 위험이 있었다.
사실 이 문제는 혁명 사후처리에 있어서 가장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성질의 것이었다.
국민의 분노한 감정으로 보아서는 준엄한 체형과 재산을 몰수하고 싶지만, 경제적인 문제는 연계적 복잡성을 띠고 있으므로 처벌의 측면에만 집착할 수가 없었다.


셋째, 불법적인 기업의 활동이 이승만 정권 때 전역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실제로 완전히 조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설혹 조사가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경제적으로 조치를 취할 경우 한국의 경제구조뿐만 아니라 기본 구조마저 와해시킬 위험이 따랐다.
부정축재의 형태를 보면 다음과 같았다.


1. 8·15해방 후 적산에 대한 부정한 방법의 구입이 있었고,

2. 특권적인 은행의 융자로 이익을 챙겼으며,

3. 외환관리를 통해서 부당한 이득을 취했고,

4. 면세, 감세, 탈세 등의 부정한 축재가 있었으며,

5. 밀수를 통한 부정축재가 있었고,

6. 뇌물로 받은 부정축재가 있었다.


이것들에 대한 전반적인 수술을 가하자면 엄청난 모험을 각오해야 했다.


넷째, 처벌의 대상범위와 방법에 이견이 있었다.
처벌대상 범위와 방법의 문제는 혁명과업 완수와 국민의 감정 그리고 경제정책과 상반하는 문제였다.
범위를 넓히면 혁명과업 완수 또는 국민의 감정적인 면에서는 충족될지 모르나 경제운용의 면에서 보면 마비가 생길 수 있었으며, 그렇다고 대상의 범위를 좁히면 혁명과업 이행은 미흡해지지만 경제운용은 덜 위축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다섯째, 기업계의 반발이 매우 컸다.
이들은 국회에 탄원 및 청원을 내고 경제파국 초래 등의 용어까지 사용한 공개성명서를 발표하여 위협하는 한편, 국회 로비활동도 병행했다.
이런 요인은 법안 작성과 국회통과에 우여곡절을 겪게 했다.
민의원에서 통과된 법안이 참의원에서 완화 수정되어 민의원에 다시 회부되었다.
4월 15일 민의원과 참의원 양원을 통과한 최종안은 처벌대상에 있어 5천만 원 이상의 탈세자, 부정한 방법으로 3천만 원 이상의 재산을 취득한 자, 정부 또는 자유당의 고위 직위를 이용해서 1천5백만 원 이상을 축재한 자, 3·15선거 때 3천만 원 이상의 정치자금을 기부한 자들로 한계를 정했다.
그리고 징계방법에 서는 형사적인 처벌을 피하고 재정적인 방법으로 했다.
이 점은 기업인에게 신체적 처벌을 가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혼란을 야기할 우려가 있다는 배려에서였다.


또 한 가지 배려는 축재분의 국가반납에 있어 현금보다는 주식으로 지불하게 한 것이다.
이 역시 경제의 원활한 운용을 위해서였다.
본법 제정과 동시에 부정축재 처리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참의원의 심종석(민주당), 엄업학(신민당), 김달범(참우), 민의원의 이만우(민주당), 장영모(신민당), 서정원(민정)과 학계의 남흥우, 함인섭, 법조계의 편영완, 실업계의 유창열, 언론계의 조규동 등이 선임되었다.
그리고 1개월의 기간을 설정하여 부정축재의 각호에 해당하는 자는 자산을 취득한 내용과 구체적인 설명서를 제출하게 했다.
그러나 5·16쿠데타가 일어날 때까지 실적은 부진했고 단 한 건도 처리하지 못했다.
혁명입법 문제를 종합해 보건대 한 가지도 제대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소급법의 악례만 남겼으며, 공민권 박탈은 헌정사의 악순환만을 초래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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