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장면은 집권 초에 경제 제일주의 정책을 실천할 것을 약속했다.
그는 이를 위해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원조나 차관을 도입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획대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장면은 군인을 10만 명 감축하여 재원을 조달해 볼까 했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장면은 미국으로부터 3억 달러 원조를 약속받았지만 미국 대통령 선거의 결과에 따라 수정될 수 있는 사항이라서 즉시 실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장면은 일본과 국교가 정상화될 경우 8억 달러의 대일 청구자금을 요구할 계획이었지만 이 또한 한일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 지연되고 있었다.


이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 미국이 조건부 원조를 제안했는데, 한미 경제협상을 먼저 체결하자는 것이었다.
이 협정은 이승만 정권 때 국회의 반대로 체결되지 못했던 것으로, 미국이 한국의 내정을 무제한 감독할 소지가 있는 것이었다.
이 협정에는 미국이 원조를 일방적으로 중단할 수 있는 규정이 있어 미국의 한국 정부에 대한 통제권이 강력했던 것이다.
지병문 외 3명의 공저 『현대 한국 정치의 전개와 동향』에는 이 협정의 문제가 되는 조항으로


다음 두 가지를 꼽았다.


제2조 1항 원조자료 사용에 있어서 한국 정부는 미국 당국자들에게 사업 및 그 계획과 관계 기록을 제약 없이 재검토할 것을 허용한다.


제7조 7항 사정의 변경으로 인해 원조계획의 계속이 불필요하거나 부적당하다고 결정하는 경우에는 미국 정부는 원조계획의 전부 혹은 일부를 중단할 수 있다.


다급해진 장면 정부는 이런 내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961년 2월 8일 한미경제협정을 체결하고 국회의 비준을 요구했다.
협정의 내용이 알려지자 혁신계 정당 및 사회단체들은 즉각적으로 대미종속과 미국의 침략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뒤이어 진보적 정치세력과 학생들의 반대투쟁이 전개되었다.
진보적 정치세력은 2월 13일 사회대중당의 제안으로 17개 정당 및 사회단체들로 구성된 2·8 한미경제협정 반대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같은 날 서울 시내 11개 학생 단체들은 한미경제협정 반대 전국학생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14일 가두 성토대회를 개최했다.
이 공동투쟁위원회는 2월 24일 서울에서 협정반대 성토대회를 개최하여 협정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심지어 신민당과 민주당의 소장파 그룹(신풍회)조차도 “한미경제협정은 을사조약과 같은 것”이라면서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런 반대투쟁에 관해 장면 정권은 “북한의 지시에 의한 것” 혹은 “미국을 반대하는 자는 공산주의자들뿐”이라고 악선전하면서 협정반대 시위를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할 것이라고 위협하고 나섰다.
그리고 한국실업자협회 등 어용단체를 동원해서 협정반대운동을 반대하는 관제데모를 벌였다.
결국 이 협정의 비준안은 민의원에서 133 대 1, 참의원에서 32 대 1의 찬성으로 통과되고 말았다.


한편 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을 지켜보면서 장면 정권은 대중의 정치세력화와 연대투쟁에 대해 위기를 느끼고 이에 대처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장면 정권이 시도한 것이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과 ‘반공을 위한 특별법’이었다.
이는 당시 분출되고 있는 민중의 불만을 억압하고 활발한 통일논의를 위축시키는 동시에 대중과 결합하고 있는 진보적 정치세력의 활동영역을 축소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시도는 이내 벽에 부딪쳤다.
1961년 3월 8일 2대 법안이 발표되자 야당인 신민당과 민주당 내의 신풍회를 비롯하여 언론계 및 법조계 등에서도 일제히 반대의사를 표명했고, 혁신세력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즉각적인 반대투쟁에 나섰다.
전국악법반대공동투쟁위원회가 발족되었으며, 악법반대운동이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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