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관료출신의 행정내각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장면 내각의 성격을 분석하면 한 마디로 전형적인 관료중심의 내각이었다. 이들의 전직은 대부분 공무원들로서 행정형이었다.
이한빈 교수가 지적했듯이 이들은 계획지향적 분자들이었다.
이런 성격에서 장면 내각의 지향성과 상황인식 및 사안의 대처방안 등을 읽을 만했다.
다분히 행정적 차원을 크게 넘어서지 못할 것이 예견되었다.
내각 명단이 발표되자 장면 국무총리는 구파의 규탄 못지않게 신파 소장의원 그룹의 거센 반발을 샀다.


이철승을 중심으로 한 소장그룹은 자기들의 기여야말로 장면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각에서 완전히 소외되자 불만이 폭발했다.
이들은 내각 발표가 있던 날 하오 긴급 회합을 갖고 원내에 별도의 교섭단체 구성까지 고려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여 장면 정권의 원내 안정 세력 구축에 위협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소장파는 구파를 조직에서 배제함으로써 야기되는 분당 문제에서 명분을 찾아 구파의 소장의원들과 제휴하며 당의 혁신을 주장하고 나섰다.
구파와 신파 소장그룹의 협공을 받은 장면 정권은 출범하자마자 동요되기 시작했다.


장면 국무총리는 내각을 구성한 이튿날 조만간 개각을 해야겠다고 언명한 후 불과 3일 후인 8월 26일 하오 6시 국무회의를 소집해서 당내 분규 수습을 위한 개각문제를 논의했다.
그때 국민은 구파를 포용하지 못하는 장면 국무총리의 협량에 아쉬움을 표했다.
조직협상에서 결별의 요건이 된 거당내각이냐 연립내각이냐의 문제를 초월하여 첫 내각만은 일단 신파와 구파가 다 함께 참여하는 내각을 구성했어야만 했다.


한편 구파는 8월 31일 86명 의원들로 구파 동지회를 구성한 후 민의원에 원내 교섭단체를 등록했으며, 9월 3일에는 원내총무에 양일동, 부총무에 이민우와 김영삼을 각각 선출했다.
분당준비가 한 단계씩 추진되어 가고 있었다.
이 같은 구파의 결별태세와 신파 소장그룹의 도각 위협으로 불안을 느낀 장면 국무총리는 다시 거국적인 내각을 구성하기 위해 9월 7일 홍익표 내무장관, 현석호 국방장관, 이태용 상공장관, 오위영 내각사무처 장관의 사임을 요구했다.
사임을 요구했다기보다는 이들이 스스로 장면 국무총리에게 내각 개편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퇴진을 결심했다.
이에 따라 장면의 내각은 구성된 지 2주일 만에 각료들의 사임을 받게 되었다.


장면 국무총리는 구파에게 협력을 구했다. 그는 지난번 조각협상 때의 정신을 살려 구파에게 각료 5석을 할애하고 연립내각 성격까지도 수락하겠다면서, 다만 지난번과 달리 구파에서 10명을 추천해 주면 자기가 그들 가운데 5명을 선택하겠다고 했다.
구파는 다시 의원총회를 열어 국무총리의 제안을 토의한 결과 장면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입각자들에 대한 인선은 백남훈, 김도연, 유진산 세 사람에게 일임되어 9월 9일 제1차 개각이 단행되었다.
구파에서 입각한 사람들은 권중돈 국방장관, 김우평 부흥장관, 나용균 보사장관, 박해정 교통장관, 조한백 체신장관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연립내각의 성격상 구파에서 소환하면 언제나 되돌아온다는 조건하에서 입각했다.
그리고 한 가지 유의할 점은 구파 내에서의 이들의 비중은 중간 수준급 인사였다는 것이다.
구파의 최고 지도급 인물들이 연립내각에 참여하지 않는 한 실질적인 협력은 어려웠다.
장면 국무총리의 측근인 한근조는 김도연, 유진산 등의 내각 참여 없이는 신파와 구파의 협력체제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인식하고 이들의 입각을 권유하기 위해 장면 국무총리실 문을 노크했으나 유진산이 조각 회담을 마치고 돌아간 바로 뒤였다.
구파는 장면 내각이 단명할 것으로 전망하고 시간만 흐르면 자기들에게 정권이 돌아온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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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 노장들, 분당에 체념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민주당 내에는 대체로 다섯 줄기의 흐름이 형성되어 있었다.
구파에서는 김도연을 중심으로 하는 즉시 분당론, 유진산을 중심으로 하는 기한부 분당론, 민관식을 중심으로 하는 소장그룹의 분당 반대론이 있었고, 신파는 노소장파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어 분당반대, 소장그룹과 구파의 분당 반대그룹과의 제휴가 있었다.
노장들은 분당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면서 체념하는 듯했다.



6. 국회의사당 점거


10월 8일 서울 지방법원에서 3·15부정선거 관련자, 4·19혁명 때 발포책임자,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관련자, 정치깡패 등의 피고들에 대한 언도공판이 있었다.
재판부는 유충렬에게만 사형을 선고했고, 발포책임자로 사형이 구형된 홍진기와 곽영주에게는 징역 9월과 2년을 선고했으며, 그 외 피고인들에게는 무죄 또는 경미한 형을 선고했다.


이를 지켜보던 방청석의 부상 학생들과 유가족들은 분노를 터뜨렸고, 이들의 폭발된 울분이 곧 국회의사당으로 난입하게 된 것이었다.
이들은 “파쟁으로 소일하고 특별법을 제정하는 국회는 물러가라!”, “살인 원흉이 무죄라면 차라리 우리를 투옥하고 사형시켜라!”, “특별법을 제정하여 원흉을 처단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데모를 하다가 국회의사당까지 점거해 버렸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회의사당이 점거당해 국회의원들의 위신은 절로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곽상훈 민의원 의장을 비롯해서 의원들 전원이 데모대 앞에서 혁명 입법을 만들지 못했음을 사과한 한편, 헌법을 개정하여 원흉 처단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할 것을 약속했고, 동시에 신파와 구파의 정쟁도 지양할 것을 공약함으로써 데모대를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구파는 데모대 앞에서의 굴욕적 정쟁지양 약속을 저버린 채 다음날인 12일에 신당발기를 결의하고, 13일엔 구파동지회를 신민당으로 발족할 것을 선언했다.
헌정의 비극의 씨는 계속 뿌려지고 있었다.
당내 파벌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어느 누구도 파벌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다만 파벌의 행동이 이성을 잃고 반역사적이고 반국가적일 때, 그리고 국민의 여망을 저버릴 때 그들은 국민의 지탄을 받고 역사의 응징을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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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업 수행할 겨를이 없어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혁명 후에 들어선 정부는 혁명의 후속 과업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그리고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정부의 지속성이 결정된다.
더구나 군부에 의한 쿠데타와는 달리 시민혁명 후 정권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반혁명 세력과 부정축재자들을 단죄 처리하여 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부각시키고 또한 국민의 혁명적 요구를 충족시키느냐 하는 것이 당면한 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반 이론에 입각해 볼 때 장면 정권이 맞이한 첫 과제는 혁명과업 완수를 위한 혁명 입법조치였다.


그러나 장면 정권의 경우는 이 일반 이론이 적용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첫째, 민주당이 혁명주체가 아닌 데다 당의 내분이 극심했기 때문에 혁명 후 바로 정권을 담당하지 못하고 친이승만 정권의 과도내각이 들어섰으며, 둘째, 과도내각은 비혁명적 방법에 의한 혁명과업 완수의 기조 아래 기존의 기본적인 사회정치적 구조를 보존했고, 셋째, 반혁명 세력과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처벌과 같은 난제를 상당기간 유보한 채 숙제로 장면 정권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장면 정권은 출범 후 약 2개월의 시간을 보내면서 1960년 10월 10일 4·19 부상 학생들과 유가족들이 국회의사당에 난입하여 부정선거 원흉과 부정축재자들을 처단하기 위한 혁명 입법을 요구할 때까지 혁명 입법에 관해서는 적극적인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내각 구성에 있어 당내 알력과 분파작용에 휘말려 혁명과업 수행에 대한 차분하고 실제적인 구상을 할 겨를이 없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한 진단일 것이다.


10월 8일 혁명재판과 같은 성격을 띤 재판에서 유충렬에게만 사형이 선고되고 다른 피고들에는 가벼운 형이 언도되었을 때 시민의 실망과 분노는 매우 컸다.
그날의 재판은 제2공화국 출범 후 반민주 인사들에 대한 첫 공판으로서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어 재판 결과를 지켜보고 있었다.
국민은 반혁명적 사법부의 태도를 규탄하면서 그 불만을 장면 정부를 향해 터뜨렸다.
새 정부가 반혁명분자들을 엄중 처단하기 위한 조처를 취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면은 자유당 때와 같이 사법부에 압력을 가하는 행위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판 결과를 보고 그 자신도 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면 정권은 훗날 국민으로부터 인기가 하락할 때 사법부의 반혁명적 행위와 입법부의 혁명적 행위인 소급법 제도에 책임을 동시에 져야 하는 불운에 처해졌다.


사실 장면은 재판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정치적·경제적 범죄인들을 특별히 다루기 위한 소급입법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현행법에 의해서 중벌로 처벌해도 무방하리라고 생각했으며, 또 헌법상 소급법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소급입법을 위한 헌법개정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장면 회고록에 의하면 “11월 28일 소급법이 통과되기 전 민주당 의원들이 서울농협 강당에 모여 소급법 가부에 대한 토의가 있을 때 이를 강력히 반대하고, 만일 끝내 보복을 위한 소급법을 고집한다면 나는 당을 떠날지도 모르겠다”고 까지 말했다고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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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의 정치적 한계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장면의 정치적 한계는 반혁명세력의 처리과정 및 결과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그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각종 불법적 행위에 관련된 자유당 간부 및 그 관련자들을 기소했지만, 자유민주주의 원칙과 정당한 절차를 준수한 재판의 결과라는 미명하에 대부분 석방했다.
10월 8일에 행해진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재판 결과를 보면, 검찰에 의해서 사형 구형을 받은 9명 가운데 5년 이상의 형을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고, 4명은 무죄 또는 집행유예로 석방되었으며, 8개월에서 10년까지의 구형자 39명 가운데 16명은 재판이 끝난 후 곧바로 석방되었다.


장면은 이들을 처리하기 위해 소급입법을 제정해야 했는데, 이는 현행 헌법을 부정하는 것이라서 판결은 부득이 기존의 법률에 따라 내려질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이 같은 재판 결과는 이내 시민과 학생들의 분노를 일으켰으며, 재판 종결 이틀 후인 10월 10일 학생들에 의해 국회의사당을 점거당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장면의 또 다른 한계는 각종 비리와 부정에 관련된 경찰과 군부에 대한 정화작업을 말끔히 마무리 짓지 못한 데서 나타났다.
한승주의 『제2공화국과 한국의 민주주의』에 의하면, 장면은 경찰의 잔인한 진압이 4·19혁명을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에 관련된 경찰 관료들을 정화해서 손상된 경찰의 권위 및 명예를 회복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장면은 경찰관 전체의 14%에 해당하는 4,521명을 숙청했으며, 80%에 해당하는 경찰관을 다른 지역으로 전임시켰다.
이 같은 조치는 상당한 규모였지만 정치테러, 부정선거, 총기발포 등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고위 간부들을 구속하지 않고 단지 해임한 것으로 그쳤기 때문에 혁명과업의 수준에서는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장면은 무능하고 부패한 군지휘관들을 제거해서 군부를 정화하겠다고 확언하고는, 부패한 장성을 숙청하기보다는 오히려 군부 정화를 주장하고 나선 중견 장교들을 처벌하는 모순된 조치를 취했다.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처리도 이와 비슷한 결과를 낳았다.
장면은 47개 대기업체에 대해 지난 5년 동안 탈세한 금액을 상환하고 벌금으로 탈세액의 4, 5배를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이 같은 결정은 외면적으로는 강도 높은 것으로 보였으나, 탈세 말고도 많은 불법·부정행위를 제외함으로써 그 범위를 축소시켰다.
더구나 상환조건이 지나치게 관대하여 비판여론이 팽배했다.


장면을 이해할 수 있는 점은 그가 고전적인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시키려고 한 것이다.
그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억압되었던 정치적 자유를 크게 확대했으며, 학생을 필두로 한 민간 사회세력들의 정치참여도 최대한 보장했다.
그러나 당시 사회를 지배한 반공과 반북한의 한계는 분명히 지켰다.
민간 사회에 대한 장면 정권의 통제력은 이승만 정권 때에 비하면 현저하게 떨어졌다.
동시에 정책수행 능력 또한 매우 취약했다.
여기에다 장면 정권은 자유당 정부 붕괴 후 생긴 정치적 공백을 메우고 국민 대다수의 불만을 해소해 나갈 뚜렷한 정책, 이념, 그리고 효율적인 지도력을 결여했다.
반면 민간 사회는 혁명을 주도했다는 사실 때문에 장면 정권에 많은 것을 요구할 만한 위치에 있었으며, 실제로 장면 정권이 혁명의 과업을 신속하게 이행하지 못하자 정부에 엄청난 압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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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이 입법 촉구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10월 8일의 재판 결과는 그야말로 국민과 학생들의 분노를 자초한 것이었다.
국민과 학생들의 민주당 정부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전국 대도시에서 법원 규탄과 더불어 혁명 입법을 요구하는 데모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편 10월 10일 윤보선 대통령은 민의원과 참의원 양 의장들에게 공한을 보내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면서 “현재의 위기에 대처할 유일한 방법은 가능한 한 조속히 국회를 소집하여 과거 정부와 자유당의 각료들에 대해 준열한 처벌을 줄 수 있는 법률을 제정하는 것이다”라고 담화를 발표했다.


이때 검찰당국은 법정에서 석방된 사람들을 다른 기소 이유로써 다시 체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하고, 10월 4일부터 휴회 중이던 국회는 11일 다시 소집되어 국사범들을 다루기 위한 입법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런 입법조치의 제일보는 소급법을 금지하는 헌법을 개정하는 것이었다.
헌법개정과 특별법 제정을 앞두고 국회는 특별법이 제정될 때까지 민주반역자에 대한 심판을 전부 연기하는 잠정적인 수단을 강구했다.
이에 따라 8일 석방된 사람들을 다시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며, 부정선거 책임자들로 지목된 전 내무장관 최인규를 포함한 다른 피고들에 대한 재판이 무기 연기되었다.


국회는 헌법개정을 서둘렀다. 17일 민의원에서 개헌안을 발의했고, 19일 윤보선 대통령은 이를 공고했다.
그리고 23일 민의원에서 토의를 거치지 않고 기명표결로 통과되었다.
재석 233명 가운데 203명이 투표에 참가하여 찬성이 191표, 반대가 1표, 기권이 2표, 무효가 9표로 나타났다.
참의원에서 개헌에 대해 주저하는 기색이 보였으나 20일 투표 결과는 찬성 44표, 반대 3표, 무효 3표, 불참 6명이었다.
민의원과 참의원 사이에는 소급입법에 관해 장차 야기될 문제를 우려하는 논의도 있었으나, 외압적인 분위기에 눌려 할 수 없이 따르는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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