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 노장들, 분당에 체념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민주당 내에는 대체로 다섯 줄기의 흐름이 형성되어 있었다.
구파에서는 김도연을 중심으로 하는 즉시 분당론, 유진산을 중심으로 하는 기한부 분당론, 민관식을 중심으로 하는 소장그룹의 분당 반대론이 있었고, 신파는 노소장파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어 분당반대, 소장그룹과 구파의 분당 반대그룹과의 제휴가 있었다.
노장들은 분당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면서 체념하는 듯했다.



6. 국회의사당 점거


10월 8일 서울 지방법원에서 3·15부정선거 관련자, 4·19혁명 때 발포책임자,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관련자, 정치깡패 등의 피고들에 대한 언도공판이 있었다.
재판부는 유충렬에게만 사형을 선고했고, 발포책임자로 사형이 구형된 홍진기와 곽영주에게는 징역 9월과 2년을 선고했으며, 그 외 피고인들에게는 무죄 또는 경미한 형을 선고했다.


이를 지켜보던 방청석의 부상 학생들과 유가족들은 분노를 터뜨렸고, 이들의 폭발된 울분이 곧 국회의사당으로 난입하게 된 것이었다.
이들은 “파쟁으로 소일하고 특별법을 제정하는 국회는 물러가라!”, “살인 원흉이 무죄라면 차라리 우리를 투옥하고 사형시켜라!”, “특별법을 제정하여 원흉을 처단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데모를 하다가 국회의사당까지 점거해 버렸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회의사당이 점거당해 국회의원들의 위신은 절로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곽상훈 민의원 의장을 비롯해서 의원들 전원이 데모대 앞에서 혁명 입법을 만들지 못했음을 사과한 한편, 헌법을 개정하여 원흉 처단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할 것을 약속했고, 동시에 신파와 구파의 정쟁도 지양할 것을 공약함으로써 데모대를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구파는 데모대 앞에서의 굴욕적 정쟁지양 약속을 저버린 채 다음날인 12일에 신당발기를 결의하고, 13일엔 구파동지회를 신민당으로 발족할 것을 선언했다.
헌정의 비극의 씨는 계속 뿌려지고 있었다.
당내 파벌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어느 누구도 파벌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다만 파벌의 행동이 이성을 잃고 반역사적이고 반국가적일 때, 그리고 국민의 여망을 저버릴 때 그들은 국민의 지탄을 받고 역사의 응징을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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