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업 수행할 겨를이 없어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혁명 후에 들어선 정부는 혁명의 후속 과업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그리고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정부의 지속성이 결정된다.
더구나 군부에 의한 쿠데타와는 달리 시민혁명 후 정권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반혁명 세력과 부정축재자들을 단죄 처리하여 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부각시키고 또한 국민의 혁명적 요구를 충족시키느냐 하는 것이 당면한 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반 이론에 입각해 볼 때 장면 정권이 맞이한 첫 과제는 혁명과업 완수를 위한 혁명 입법조치였다.


그러나 장면 정권의 경우는 이 일반 이론이 적용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첫째, 민주당이 혁명주체가 아닌 데다 당의 내분이 극심했기 때문에 혁명 후 바로 정권을 담당하지 못하고 친이승만 정권의 과도내각이 들어섰으며, 둘째, 과도내각은 비혁명적 방법에 의한 혁명과업 완수의 기조 아래 기존의 기본적인 사회정치적 구조를 보존했고, 셋째, 반혁명 세력과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처벌과 같은 난제를 상당기간 유보한 채 숙제로 장면 정권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장면 정권은 출범 후 약 2개월의 시간을 보내면서 1960년 10월 10일 4·19 부상 학생들과 유가족들이 국회의사당에 난입하여 부정선거 원흉과 부정축재자들을 처단하기 위한 혁명 입법을 요구할 때까지 혁명 입법에 관해서는 적극적인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내각 구성에 있어 당내 알력과 분파작용에 휘말려 혁명과업 수행에 대한 차분하고 실제적인 구상을 할 겨를이 없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한 진단일 것이다.


10월 8일 혁명재판과 같은 성격을 띤 재판에서 유충렬에게만 사형이 선고되고 다른 피고들에는 가벼운 형이 언도되었을 때 시민의 실망과 분노는 매우 컸다.
그날의 재판은 제2공화국 출범 후 반민주 인사들에 대한 첫 공판으로서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어 재판 결과를 지켜보고 있었다.
국민은 반혁명적 사법부의 태도를 규탄하면서 그 불만을 장면 정부를 향해 터뜨렸다.
새 정부가 반혁명분자들을 엄중 처단하기 위한 조처를 취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면은 자유당 때와 같이 사법부에 압력을 가하는 행위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판 결과를 보고 그 자신도 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면 정권은 훗날 국민으로부터 인기가 하락할 때 사법부의 반혁명적 행위와 입법부의 혁명적 행위인 소급법 제도에 책임을 동시에 져야 하는 불운에 처해졌다.


사실 장면은 재판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정치적·경제적 범죄인들을 특별히 다루기 위한 소급입법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현행법에 의해서 중벌로 처벌해도 무방하리라고 생각했으며, 또 헌법상 소급법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소급입법을 위한 헌법개정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장면 회고록에 의하면 “11월 28일 소급법이 통과되기 전 민주당 의원들이 서울농협 강당에 모여 소급법 가부에 대한 토의가 있을 때 이를 강력히 반대하고, 만일 끝내 보복을 위한 소급법을 고집한다면 나는 당을 떠날지도 모르겠다”고 까지 말했다고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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