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의 정치적 한계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장면의 정치적 한계는 반혁명세력의 처리과정 및 결과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그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각종 불법적 행위에 관련된 자유당 간부 및 그 관련자들을 기소했지만, 자유민주주의 원칙과 정당한 절차를 준수한 재판의 결과라는 미명하에 대부분 석방했다.
10월 8일에 행해진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재판 결과를 보면, 검찰에 의해서 사형 구형을 받은 9명 가운데 5년 이상의 형을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고, 4명은 무죄 또는 집행유예로 석방되었으며, 8개월에서 10년까지의 구형자 39명 가운데 16명은 재판이 끝난 후 곧바로 석방되었다.


장면은 이들을 처리하기 위해 소급입법을 제정해야 했는데, 이는 현행 헌법을 부정하는 것이라서 판결은 부득이 기존의 법률에 따라 내려질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이 같은 재판 결과는 이내 시민과 학생들의 분노를 일으켰으며, 재판 종결 이틀 후인 10월 10일 학생들에 의해 국회의사당을 점거당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장면의 또 다른 한계는 각종 비리와 부정에 관련된 경찰과 군부에 대한 정화작업을 말끔히 마무리 짓지 못한 데서 나타났다.
한승주의 『제2공화국과 한국의 민주주의』에 의하면, 장면은 경찰의 잔인한 진압이 4·19혁명을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에 관련된 경찰 관료들을 정화해서 손상된 경찰의 권위 및 명예를 회복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장면은 경찰관 전체의 14%에 해당하는 4,521명을 숙청했으며, 80%에 해당하는 경찰관을 다른 지역으로 전임시켰다.
이 같은 조치는 상당한 규모였지만 정치테러, 부정선거, 총기발포 등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고위 간부들을 구속하지 않고 단지 해임한 것으로 그쳤기 때문에 혁명과업의 수준에서는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장면은 무능하고 부패한 군지휘관들을 제거해서 군부를 정화하겠다고 확언하고는, 부패한 장성을 숙청하기보다는 오히려 군부 정화를 주장하고 나선 중견 장교들을 처벌하는 모순된 조치를 취했다.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처리도 이와 비슷한 결과를 낳았다.
장면은 47개 대기업체에 대해 지난 5년 동안 탈세한 금액을 상환하고 벌금으로 탈세액의 4, 5배를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이 같은 결정은 외면적으로는 강도 높은 것으로 보였으나, 탈세 말고도 많은 불법·부정행위를 제외함으로써 그 범위를 축소시켰다.
더구나 상환조건이 지나치게 관대하여 비판여론이 팽배했다.


장면을 이해할 수 있는 점은 그가 고전적인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시키려고 한 것이다.
그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억압되었던 정치적 자유를 크게 확대했으며, 학생을 필두로 한 민간 사회세력들의 정치참여도 최대한 보장했다.
그러나 당시 사회를 지배한 반공과 반북한의 한계는 분명히 지켰다.
민간 사회에 대한 장면 정권의 통제력은 이승만 정권 때에 비하면 현저하게 떨어졌다.
동시에 정책수행 능력 또한 매우 취약했다.
여기에다 장면 정권은 자유당 정부 붕괴 후 생긴 정치적 공백을 메우고 국민 대다수의 불만을 해소해 나갈 뚜렷한 정책, 이념, 그리고 효율적인 지도력을 결여했다.
반면 민간 사회는 혁명을 주도했다는 사실 때문에 장면 정권에 많은 것을 요구할 만한 위치에 있었으며, 실제로 장면 정권이 혁명의 과업을 신속하게 이행하지 못하자 정부에 엄청난 압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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