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이슈인 한일 국교정상화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민주당과 자유당 두 보수정당은 경제, 사회정책 공약에서 종전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혁신 정당들은 중요한 산업의 국영화를 표방했다.
외교정책에서는 보수와 혁신이 다 같이 새로운 이슈로 한일 국교정상화, 중립국과의 적극적인 외교를 주장했으며, 통일정책에서는 민주당과 자유당이 반공통일을 고수한 데 비해 혁신계는 반공이란 용어가 빠지고 민주통일로 표시하여 변화의 일면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같은 공약들은 화려한 구호에만 그쳤고 실현성은 없었으며, 우리나라 선거사에서 늘 보아왔듯이 공약이 투표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선거 분위기의 측면을 보면 역대 어느 선거보다도 자유로웠다.
오히려 자유가 넘쳐서 방종으로 흐르고 있었다. 혁명 주체가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고 과도정부가 선거를 관장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상 최대의 폭력과 난동의 불상사가 일어났는데, 그 이유는 주로 자유당과 그 동조세력인 반민주인사들의 입후보를 제지하기 위해서였다.


4·19혁명세력이라고 자처한 일부 학생과 시민들은 자유당과 무소속으로 변신한 반민주 출마자들의 선거사무소와 집을 습격했는가 하면 연좌데모, 단신데모를 통해 그들에게 입후보 사퇴를 강요했다.
이 같은 사태는 선거 당일 더욱 격심하여 전국의 3백여 개의 투표함이 방화 또는 파괴되었고, 무려 1,793건의 선거범을 유발케 했다.
사건의 대부분은 자유당이 유망한 선거구에서 일어났으며, 민주당 후보, 대부분 신파의 반발에 의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민의원 보궐선거가 8월 18일에 남원 갑, 삼천포, 산청, 창녕에서, 19일에는 고성에서, 23일에는 괴산, 대전 갑, 여천, 광산, 김천, 영양, 밀양 갑, 영도에서 각각 실시되었다.


또한 참의원 선거의 경우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북도 지역은 정족수의 당선자를 결정하지 못해 8월 13일 재선거를 실시하여 당선자를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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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원과 군중 난투극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13개 선거구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의 공통점은 자유당 시절에 부정선거 행위에 관여했거나 자신들을 괴롭혔던 자들이 7·29총선에 참여한 것에 대한 지역 민중들의 반발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당시의 정황을 이해하기 위해 한 가지 대표적인 사례를 들어보자.


경찰관 출신의 자유당 소속 전 국회의원 신영주와 민주당 신파계 박기정은 모두 유력한 인사들로 백중세를 보이고 있었다.
개표 당일에 44개 투표함 중 30개의 개표 결과 신영주 후보가 박기정 후보보다 992표를 리드하게 되자 박기정 후보 측은 개표 부정을 항의했다.
이때 신영주 후보 측은 선거운동원과 군중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져 투표함 9개가 불살러지고 30여 명의 부상자를 냈다.
뿐만 아니라 신영주 후보를 납치하여 군민재판에 회부했다가 경찰에 인계했다.


그날 밤 경찰이 신영주 후보를 탈출시킨 것이 화근이 되어 이튿날에는 경찰서장이 2천여 명의 군중에게 납치되어 심한 봉변을 당했다.
이 같은 무법 사태가 계속되자 8월 1일 군이 동원되어 사태를 수습했다.
민의원으로 당선된 박기정은 난동사건의 주모자 혐의로 조사받았으나 불기소 처분되었다.
그러나 다시 신영주 측의 재정 신청으로 대구 고등법원 심의에서 유죄로 판정되었다.


7·29총선 중 또 한 가지 주목을 끈 점은 민주당 구파에 의한 분당론이었다.
선거열기가 절정에 이르고 있었을 때 참의원에 입후보한 소선규가 전주 유세에서 보수 양당제의 필요성과 민주당의 분당 불가피론을 주장했다.
이어 금산에서 유진산이 맞장구를 쳤고, 서울에서는 김도연과 서범석이 호응했다.
김도연 회고록에 의하면 이는 우연한 일치가 아니었고 사전에 구파 중요 간부들의 양해 아래 행해진 것이라고 했다.
총선 후 불과 5일 만인 8월 4일에 공식적으로 분당선언이 나온 것은 이 같은 점을 뒷받침해 준다.


이같이 구파 지도급에서 선거유세를 통해 분당론을 제기한 것은 대국민선언으로서 분당필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 선언은 신파와 구파 후보자들 사이의 경쟁을 더욱 가열시켰다.
공천과정에서 당으로서는 명분상 단일후보를 내면서도 내심으로는 양파가 갈라지기를 작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파 공천지구 가운데 55개 지구에서 구파계 인사가 경쟁하고 있었던 한편, 신파는 구파 공천지구에 26명을 내세워 경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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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 정당의 참패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1960년 7월 29일 전국 233개 선거구에서 유권자 84.3%가 참여한 가운데 총선이 실시되었는데, 총 233명을 선출하는 데 입후보자의 수가 1,563명이라서 6.7 대 1의 경쟁률로 나타났고, 무소속 후보자가 전체의 64.4%를 차지했다.
7·29총선은 “독재와 싸운 정당 마음 놓고 찍어주자”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민주당 후보들의 압도적인 당선과 많은 무소속 입후보자들의 선전 그리고 혁신계열의 기대치 이하의 득표와 당선으로 나타났다.
무소속이 득표율 46.8%로 높았던 주된 원인은 민주당 내의 신파와 구파 사이의 파벌싸움으로 여러 선거구에서 중복 공천이 이루어졌으며, 과거 자유당 소속 인사들 가운데 지역 내에서 나름대로 정치적 기반을 가지고 있던 많은 사람이 자유당 당적을 버리고 재출마했기 때문이다.


총선 결과는 민주당 신파와 구파의 세력분포에 관심이 쏠렸다.
민의원 당선자 175명 가운데 신파가 78명이었고, 구파가 83명이었으며, 중도파는 14명이었다.
이 같은 팽팽한 형세는 선거과정에서 그들로 하여금 분당론도 서슴없이 제기하게 만들었고, 총선 후에는 따로 당선자 대회를 갖는 등 이미 분당상태에서 치열한 집권 경쟁을 나타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1971년에 발간한 『역대 국회의원 선거상황』에 의하면, 득표율로 보면 무소속이 가장 높은 46.8%로 49석을 차지했고, 의원의 수로는 민주당이 175명으로 득표율은 41.7%로 다음을 차지했으며, 자유당은 겨우 2명(2.7%)이었고, 통일당이 1명(0.2%)이었으며, 사회대중당이 4명(6.0%)이었고, 기타가 2명(2.5%)이었다.


7·29총선은 혁신 정당들에게 결정적인 참패를 안겨 주었다.
참의원의 경우 민주당이 31석으로 가장 많았고, 무소속이 20석, 자유당이 4석, 사회대중당이 1석, 한국사회당이 1석, 민족진보연맹이 1석이었다.
혁신 정당의 지도자들은 참패의 원인으로 선거자금의 부족, 혁신세력을 용공시했던 유권자들의 의식수준, 자유당에 대한 유일한 대체 정당으로 인식한 민주당의 붐을 꼽았다.


혁신 정당의 참패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지속적으로 탄압을 받아 조직적인 역량을 확보하지 못한 객관적인 한계도 있었으나, 당시의 정세와 주체적 역량에 대한 혁신세력 스스로의 과대평가도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혁신계 정당들은 다양한 세력이 총선에 대비해 급조되었으므로 정당 내부의 파벌상과 이념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정강정책을 완성해서 공표하지 못하는 분열상을 드러냈고, 선거과정에서 민주당과의 차별을 분명하게 하지 못했다.
24개 선거구에서 2명 이상의 혁신계 후보들이 서로 경쟁했으며, 사회대중당의 경우 당 차원의 조정조차 이루어지지 않아 5개 선거구에서 같은 사회대중당 후보끼리 경쟁하기도 했다.


7·29총선에서의 참패는 혁신 정당들의 이합집산을 급속히 촉진했다.
총선 이후 혁신 정당들은 구 진보당의 김달호를 중심으로 한 사회대중당, 구 근로인민당계의 사회당과 혁신당, 구 민주혁신당계를 중심으로 혁신세력의 원로들이 모인 통일사회당으로 분화되었다.
혁신 정당들 상호간의 파벌주의와 영웅주의 등은 5·16쿠데타에 의해 혁신 정당이 불법화될 때까지 극복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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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앞날을 예고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민주당은 승리의 감격과 희망보다 오히려 압승으로 인해 어두운 앞날을 예고하고 있었다.
민의원의 다수 의석에 의해 행정부가 구성되는 내각책임제하에서 의석의 4분의 3을 얻었다는 것은 당시 민주당이 사실상 양분되다시피 한 신파와 구파의 세력분포로 보아 반드시 길조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압승은 두 파로 하여금 각각 단독 집권의 구상을 추진하도록 자극했다.


민주당은 창당과정에서부터 싹튼 당내 파벌이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심화되어 여러 번 분열의 위기에 직면했었다.
그러나 이들은 당권적 차원의 위기는 극복했지만 정권적 차원에서는 서로 결별도 불사한다는 자세였다.
8월 3일 하오 3시 선거 후 처음으로 민주당 중앙당사에서 최고위원 전원과 김도연, 이영준, 오위영, 유진산, 서범석, 현석호, 조재천, 조한백, 이상철, 이충환, 민관식, 주요한 등이 모여 확대간부회의를 열었다.


머지않아 국회의 개원을 앞두고 당면한 대통령과 국무총리 후보에 대한 지명문제가 논의되었으나, 구체적 인물선정은 고사하고 후보지명 절차조차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구파는 우선 당 공천 낙천자들 가운데서 당선된 의원들의 복당이 선결되어야 할 문제이며, 대통령과 국무총리 후보자 지명은 의원총회에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신파는 낙천자들 가운데서 당선자는 복당시킬 수 없고, 후보자 지명은 중앙상임위원회에서 해야 한다고 맞섰다.
1차 모임은 서로를 탐색하는 기회가 되었고, 두 파의 단합에는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다음날 구파는 아침부터 자파 출신 도 당위원장들과 중요 간부 30여 명이 모여 앞으로의 대책을 숙의하고, 하오 6시에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겸점과 분당을 선언하는 한편 이를 관철하기 위해 23인위원회를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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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잡을 수 없는 신파와 구파의 의견충돌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신파 측과의 진용을 비교해 보기 위해 그 명단을 소개하면, 서울과 부산의 민관식, 경기도의 홍길선, 강영훈, 충청북도의 신각휴, 이민우, 충청남도의 윤담, 이상돈, 전라북도의 양일동, 윤제술, 전라남도의 조영규, 유옥우, 경상북도의 권중돈, 박해정, 경상남도의 정헌주, 김영삼, 강원도의 신인우, 정순암, 제주도의 고담룡, 중앙본부의 유진산, 소선규, 서범석, 이정래 등이었다.


구파는 성명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첫째, 한 정당이 의석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면 일당독재의 우려가 있으며, 내각책임제하에서는 2개 이상의 정당정치가 확립되어야 하고, 건전한 야당 정치가 없는 이 정국에 너무 비대해져 있는 민주당은 2개의 정당으로 갈라져야 한다.

둘째, 민주당은 그동안 신파와 구파의 안배로 구차한 당 운영을 해왔으나 오늘의 위기에 직면한 국정 운영에 있어서 강력한 국정 운영은 뜻 맞는 사람들끼리의 책임정치를 통해서 가능하므로 이제 구파는 국민의 여망에 따라 책임을 지고 정권담당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셋째, 이번 7·29총선에 있어서 4·19혁명의 정신을 말살한 폭력, 파괴, 방화 및 부정개표 등 민주반역 행위를 한 자에 대해서는 어느 일파나 어느 개인을 막론하고 국회 개회 벽두에 엄중히 규탄하려 하며, 사직당국에도 철저히 규명할 것을 촉구한다.


이 같은 구파의 성명서가 발표되자 당내 온건파와 중도파는 구파의 독선 독주에 큰 반발을 보이면서 자제를 촉구했다.


한편 신파는 8월 5일 간부회의를 열어 이에 대응하는 13인위원회를 구성하고 구파에 대해 “정당 정치의 상도를 벗어나 민주주의의 정신을 저버린 언행”이라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3인위원회의 명단은 서울의 김상돈, 경기도의 홍익표, 전라남도의 양병일, 충청남도의 이상철, 전라북도의 이철승, 경상북도의 조재천, 경상남도의 김용진, 강원도의 계광순, 중앙본부의 오위영, 한통숙, 정일형, 이태용, 현석호였다.


민주당은 국회가 개원도 하기 전에 확대간부회의에서의 신파와 구파의 의견충돌이 연일 걷잡을 수 없이 대립된 평행선으로만 치닫고 있었다.
이미 당내 분위기나 사항의 전개양상이 양파의 의견을 조정하여 단일안을 마련하기는 어려운 국면이었다.
도리 없이 매사를 원내에서 표 대결로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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