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 정당의 참패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1960년 7월 29일 전국 233개 선거구에서 유권자 84.3%가 참여한 가운데 총선이 실시되었는데, 총 233명을 선출하는 데 입후보자의 수가 1,563명이라서 6.7 대 1의 경쟁률로 나타났고, 무소속 후보자가 전체의 64.4%를 차지했다.
7·29총선은 “독재와 싸운 정당 마음 놓고 찍어주자”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민주당 후보들의 압도적인 당선과 많은 무소속 입후보자들의 선전 그리고 혁신계열의 기대치 이하의 득표와 당선으로 나타났다.
무소속이 득표율 46.8%로 높았던 주된 원인은 민주당 내의 신파와 구파 사이의 파벌싸움으로 여러 선거구에서 중복 공천이 이루어졌으며, 과거 자유당 소속 인사들 가운데 지역 내에서 나름대로 정치적 기반을 가지고 있던 많은 사람이 자유당 당적을 버리고 재출마했기 때문이다.


총선 결과는 민주당 신파와 구파의 세력분포에 관심이 쏠렸다.
민의원 당선자 175명 가운데 신파가 78명이었고, 구파가 83명이었으며, 중도파는 14명이었다.
이 같은 팽팽한 형세는 선거과정에서 그들로 하여금 분당론도 서슴없이 제기하게 만들었고, 총선 후에는 따로 당선자 대회를 갖는 등 이미 분당상태에서 치열한 집권 경쟁을 나타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1971년에 발간한 『역대 국회의원 선거상황』에 의하면, 득표율로 보면 무소속이 가장 높은 46.8%로 49석을 차지했고, 의원의 수로는 민주당이 175명으로 득표율은 41.7%로 다음을 차지했으며, 자유당은 겨우 2명(2.7%)이었고, 통일당이 1명(0.2%)이었으며, 사회대중당이 4명(6.0%)이었고, 기타가 2명(2.5%)이었다.


7·29총선은 혁신 정당들에게 결정적인 참패를 안겨 주었다.
참의원의 경우 민주당이 31석으로 가장 많았고, 무소속이 20석, 자유당이 4석, 사회대중당이 1석, 한국사회당이 1석, 민족진보연맹이 1석이었다.
혁신 정당의 지도자들은 참패의 원인으로 선거자금의 부족, 혁신세력을 용공시했던 유권자들의 의식수준, 자유당에 대한 유일한 대체 정당으로 인식한 민주당의 붐을 꼽았다.


혁신 정당의 참패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지속적으로 탄압을 받아 조직적인 역량을 확보하지 못한 객관적인 한계도 있었으나, 당시의 정세와 주체적 역량에 대한 혁신세력 스스로의 과대평가도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혁신계 정당들은 다양한 세력이 총선에 대비해 급조되었으므로 정당 내부의 파벌상과 이념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정강정책을 완성해서 공표하지 못하는 분열상을 드러냈고, 선거과정에서 민주당과의 차별을 분명하게 하지 못했다.
24개 선거구에서 2명 이상의 혁신계 후보들이 서로 경쟁했으며, 사회대중당의 경우 당 차원의 조정조차 이루어지지 않아 5개 선거구에서 같은 사회대중당 후보끼리 경쟁하기도 했다.


7·29총선에서의 참패는 혁신 정당들의 이합집산을 급속히 촉진했다.
총선 이후 혁신 정당들은 구 진보당의 김달호를 중심으로 한 사회대중당, 구 근로인민당계의 사회당과 혁신당, 구 민주혁신당계를 중심으로 혁신세력의 원로들이 모인 통일사회당으로 분화되었다.
혁신 정당들 상호간의 파벌주의와 영웅주의 등은 5·16쿠데타에 의해 혁신 정당이 불법화될 때까지 극복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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