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세력, 선거대책협의회 구성 실패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1960년 6월 15일 내각책임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새로 제정된 헌법에는 중앙선거위원회가 처음으로 헌법상 독립기관으로 규정되었으며, 이에 의거해서 민의원은 선거위원회 법을 제정 공포했다.
이는 무엇보다도 선거관리기구의 명실상부한 독립을 통해 선거의 공정성을 보장하려는 조치였다.
새 선거법은 자유, 공명선거의 실시를 위한 제도적인 보완에 중점을 두어 입후보 등록 방해를 예방하기 위해 추천장제도를 폐지했고, 부재자 투표제도 및 선거인 참관제도를 강화했으며, 릴레이식 투표를 방지하기 위한 일련번호 삽입제를 채택했다.
참의원 선거법에서는 선거구를 서울특별시 및 도 단위로 했고, 의원 정수를 크기에 따라서 2명 또는 8명으로 했으며, 3년마다 2분의 1을 개선할 수 있게 했다.
또한 투표방법으로 제한연기 투표제도가 채택되었는데, 이는 투표자에게 해당 선거구에서 선출되는 의원 정수의 반수 이하의 후보자를 동시에 선택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한편 사회혁신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진보적 인사들은 제5대 민의원에 진출할 것을 당면 과제로 삼고 정치세력화를 모색했다.
대체로 이들은 1950년대 진보당을 중심으로 정치활동을 한 인사들과 1950년대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진보주의 경향의 청년들이 합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념이나 인맥상으로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단일 정당의 결성이 중요하다는 공통적인 인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총선에 대비하여 보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혁신세력 선거대책협의회를 구성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사회대중당이 독자적으로 공천자를 냄으로써 단일후보 공천은 물 건너갔다.


진보적 정치세력이 정치무대에 등장하자 정치 지형은 외형상 보수 세력대 진보 세력으로 나타났으며, 정치 국면은 7·29총선을 둘러싸고 민주당과 사회대중당 사이의 대결국면으로 진행되었다.
사회대중당은 이념적인 선명성이나 조직 면에서 다른 혁신계 정당들에 비해 우월한 입장에 있었다.
사회대중당은 자유당의 정치자금이 민주당에 유입되었다는 사실과 거창 양민학살 사건에 민주당의 대표최고위원인 장면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중점적으로 선전했다.


이런 사회대중당의 전략이 초기에는 여론의 지지를 받았으나, 민주당이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독재 투쟁에서 유일한 공로자로 자처하고 나서자 4·19혁명 과정에서 역할이 미미했던 진보세력은 이에 대해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또한 민주당이 혁신 정당들을 친공 세력으로 몰아갔으며, 허정 과도정부는 이들에 대한 검찰 수사를 통해 위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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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파와 구파의 집권 경쟁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이같이 자유당의 위축과 혁신 정당들의 부진과는 대조적으로 민주당은 자체 내 신파와 구파간의 집권 경쟁이 매우 치열했다.
각 정당 입후보 상황을 보면, 전국 233개 민의원 선거구 입후보자 1,563명 가운데 민주당이 227명, 자유당이 52명, 사회대중당이 123명, 한국사회당이 18명, 한독당이 12명, 한국혁신당이 3명, 무소속이 1,010명이었고, 나머지는 한두 명씩 후보자를 낸 군소 정당들이었다.


참의원의 경우 총 201명 후보자 가운데 민주당이 60명, 자유당이 11명, 사회대중당이 7명, 무소속이 115명, 기타 군소 정당들이 8명이었다.
민주당은 타당과의 경쟁은 의식하지 않았고, 신파와 구파 사이에 집권을 위한 전초전으로서 자파의 공천자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경쟁이 치열했다.
선거 결과는 볼 것도 없이 민주당의 대승리가 예상되었으며, 다만 양파 사이에 어느 파가 다수 의석을 얻어 집권하게 될 것이냐에만 관심이 쏠려 있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7·29총선의 양상은 신파와 구파의 집권 경쟁으로 압축되었다.
그러므로 이들 양파의 경쟁은 일반적으로 총선에서 볼 수 있는 정당 사이의 경쟁보다는 훨씬 더 열기가 가중되었다.


사실 민주당의 신파와 구파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민주당 ‘신구호’를 함께 건조하여 항해해 오기는 했지만, 이 배는 외풍에 시달리기보다도 선 내의 내분으로 여러 번 파산의 위기를 맞았다.
이제 항해가 끝나고 목적지 항구에 닿게 되자 이들은 서로 갈 길을 달리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므로 양파는 불원 배의 접안을 앞두고 공천경쟁 이전에 선거법 개정부터 접전이 시작되었다.
새 선거법 중 부재자 투표제의 채택 여부를 놓고 의견을 달리했다.
이 문제는 양 파 사이의 원내 의석수와 직결되었으며, 또 궁극적으로는 집권과 관련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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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자 투표와 동시선거 문제로 대립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신파 측은 군 주둔지인 강원도에 공천해야 할 후보들이 많았다.
이 지역에서 출마하려는 사람들은 그곳이 연고지이기 때문이 아니라 군인들의 표를 믿고 출마하려는 계산이었다.
만일 부재자 투표제가 실시되면 상대적으로 신파는 적어도 10여 석을 잃게 되고 상대적으로 구파는 그만큼 득을 보게 된다.
신파는 집을 떠난 지 오래된 군인들이 고향 선거구 입후보자들의 인품과 능력을 판단하기 어렵고, 군인들이 우편으로 투표권을 행사하게 되면 많은 부정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그러나 구파는 군인은 직무상 언제 어디로 이동할는지 모르는데 그들에게 일정 지역을 대표하는 의원들을 선거하는 것은 모순이며, 또한 국방의 의무를 맡고 있는 군인들에게 선거운동으로 군인정신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 양파는 민의원과 참의원 동시선거 문제로 대립했다.
이 점 역시 양파 사이에 이해가 상반되었다.
신파는 양원 의원 후보자를 동시에 천거할 만한 인적 자원과 당선의 확실성이 없어 만일 낙선되면 참의원으로 구제할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이에 반해 구파는 민의원과 참의원 동시선거에 내보낼 인적 자원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동시 선거를 해야 공천경합을 완화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구파는 동시선거 주장 이유로, 새 헌법상 대통령은 양원 합동회의에서 선출해야 하고, 한 번 선거로 선거비용을 줄일 뿐만 아니라 농번기에 바쁜 농민의 일손을 빼앗아서는 안 되며, 민의원에 낙선된 자가 참의원의 질을 저하시킨다는 점을 지적했다.


부재자 투표제와 민의원과 참의원 동시선거 문제는 합의되지 않아 표결되었다.
부재자 투표 문제는 신파 측에서 얼마나 절박했던지 제도 자체는 채택하더라도 이번 선거에서만은 적용하지 말고 차기 선거 때부터 시행하자는 절충안을 냈으나 역시 구파에 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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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천요강까지 정한 민주당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이처럼 선거법 개정 때 드러난 두 파의 대립양상으로 미루어 공천에서의 경쟁 치열도를 짐작할 만했다.
민주당은 공천문제로 야기될 당의 추태를 미연에 막기 위해 6월 20일 최고위원을 포함한 확대간부회의를 열고 공천요강을 정했다.


첫째, 현 의원과 현 지구당 위원장으로서 지난 제4대 선거 때 차점자와 기탁금을 몰수당하지 않은 자는 특별한 다른 하자가 없는 한 자동적으로 공천하고,

둘째, 이 항에 해당되지 않는 지구는 공천대회를 열어 결정한다.


이 공천대회에서 지구당과 도당의 의견이 일치하면 공천을 인정하되 그렇지 않은 지구는 중앙당 공천심사위원회에서 최종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요강에 따르면 자동공천은 120지구로서 신파가 69개 지구, 구파가 63개 지구였고, 나머지 104개 지구는 공천대회와 공천심사위원회 심사를 거쳐야 하는데, 나머지 104개 지구를 놓고 격렬한 경합을 벌였다.
공천심사는 거의 무원칙이다시피 하여 사리가 맞지 않았다.
당선 가능성이나 인품, 실력 등 객관적 기준에 입각하지 않고 자파에 대한 충성도와 개인적인 친분과 같은 정실이 우선했다.
최종 결정된 공천자는 신파가 113명, 구파가 108명이었고 나머지는 두 파벌과 초연한 사람들이었다.
공천심사위원회의 결정이 발표되자 공천에 탈락된 자들은 각기 소속 계파의 이름으로 ‘신파 공천’ 또는 ‘구파 공천’을 내세워 입후보했다.
거기에다 두 파는 자파 간 파를 내건 후보자들에게 은밀히 자금을 대주며 지원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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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쟁점은 거의 없어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파의 공천을 앞세워 출마한 사람은 무려 112개 지구나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확산되자 당은 이들을 당의 지명 없이 입후보했다는 이유로 제명해 버렸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당의 공식 공천자를 누르고 당선되었을 때 복당(復黨)문제를 놓고 또 다시 두 파는 의견이 대립되기도 했다.


이러한 파 공천문제와는 달리 신파와 구파는 순수 무소속을 가장하여 상대파인 유력인사와 대결시킨 사례도 있었다.
김도연의 회고록에 의하면, 구파 리더인 자기 구역에 신파에서 신상초를 내세워 자신을 낙선시키려 했다고 한다.


선거 양상에서 한 가지 더 주목되었던 것은 3·15부정선거 관련으로 수감되어 옥중에서 입후보한 사실이다.
“위대한 한희석 선생에게 깨끗한 한 표를”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내걸고 이들이 옥중에서 출마한 사실은 4·19혁명을 부정하거나 모독한 행위였다.
4·19혁명의 젊은 영령들이 분개하여 묘소를 갈라 헤치고 다시 일어날 지경이었다.
시민혁명에 의해 부정되고 붕괴된 구정권의 수뇌 인사가 옥중에서 입후보 의사를 가졌다는 자체가 역사인식의 결여이거나 국민을 우롱하는 짓이었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혁명의 분위기가 얼마나 흐려졌고, 혁명과업이 비혁명적인 방법으로 처리되고 있었는가를 실감하게 했다.
더구나 이재학은 옥중 당선까지 되었다.


다음으로 7·29선거에서 각 정당이 내세운 선거공약을 요약해 보면, 그때까지 민주당이 선거 때마다 금과옥조로 앞세우던 내각책임제가 실현되었기 때문에 정치적 문제는 크게 부각된 것이 없다.
각 당은 다 같이 막연하게 혁명과업 완수를 가장 먼저 제시했고, 다만 혁신 정부의 대두로 경제사회 및 통일정책에서 다소의 차이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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