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각책임제 개헌안 통과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개헌안은 30일 동안의 공고기간을 거쳐 6월 10일 드디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다.
자유당 의원들은 선거사범 공소시효 만료 기일 15일 전에 상정된 점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며 신변 문제에 불안을 느껴 또 다시 반발했다.
더구나 기명투표를 하도록 국회법까지 개정했으니 말이다.
민주당 의원들은 자유당 의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선거사범에 대한 수사를 확대하지 않겠다는 방침으로 설득시키는 한편, 허정 수반도 수사를 더 이상 확대하지 않을 것임을 재차 강조했다.
결국 개헌안은 15일에 표결에 부쳐졌다.


일부 자유당 의원들의 구속과 의원직 사퇴로 재석의원은 218명으로 줄었다.
이들 가운데 211명이 표결에 참가하여 가결 208표, 부결 3표로 역사적인 내각책임제 개헌안은 통과되었다.
부결표 3표는 자유당의 이옥동, 김공평, 김창동 의원들이 던진 표였다.
발췌개헌에 대한 기립표결 때도 세 의원이 그대로 자리에 앉아 반대의사를 표시했는데, 이번 경우와 비교할 만했다.


개정 헌법은 골격 구조에 있어 순수 내각책임제의 정부형태였다.


1. 국정은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하는 내각이 책임을 지고 수행하며,

2. 대통령은 명목상의 국가원수로서 국군통수권과 영예 수여권, 공무원 임명권, 국무총리 제청권, 법률 공포권 등 내각을 통해 수행하는 형식적인 권한만을 갖고,

3. 국회는 내각 불신임권, 내각에는 국회 해산권을 갖게 해서 상호 견제한다.


이번 개헌에서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헌법 조문에만 규정한 채 원 구성을 하지 않았던 참의원을 구성하도록 했으며, 다만 그 수는 민의원 의원 정수의 4분의 1을 초과하지 않도록 했고, 권한도 민의원에 비해 약하게 규정했다.
한 가지 이채로웠던 점은 대통령 궐위 때에 참의원 의장, 민의원 의장, 그리고 국무총리의 순위로 권한을 대행하도록 한 점이었다.


제2공화국의 모태가 된 이 개헌안 중 개헌특위의 협의과정에서 만주당 측 개헌요강 가운데 크게 달라진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선거권자의 연령이 21세에서 20세로 낮추어졌고,

2. 정당에 대한 국가의 보호조항이 강화되었으며,

3. 언론, 출판, 집회, 결사에 있어서 허가 및 검열제가 폐지되었고,

4. 국회는 상하 양원제는 하되 참의원은 서울시 및 도 단위로 하는 중선거구제로 하며,

5. 경찰 중립화를 위해 특별한 헌법상의 기구가 마련되었다는 것 등.


이 개헌은 전문 103조로 되어 있던 제1공화국의 헌법 가운데 무려 52개 조항이 고쳐진 것으로 사실상 제헌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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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 헌법은 정당보호 등에 깊은 배려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개정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신장시켰다. 여태껏 “법률에 의하지 않고는 …할 수 없다”는 식으로 유보했던 사항들을 모두 삭제하고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와 같은 민주화와 관련된 자유권이 절대권으로 인정되어 법률로도 제한할 수 없도록 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사법권의 독립을 보장하려는 정신이 깃들여 있었다.
제1공화국 헌법에서 대법원장은 대법관회의의 제청을 받고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게 되었던 것을, 대법원장과 대법관은 법관의 자격이 있는 자로서 조직되는 선거단이 선거하고 법관을 대법관회의의 결의에 따라 대법원장이 임명하게 했다.
사법부의 인사권을 완전히 사법부에 맡긴 것이다.


과거 1957년 대법원장 궐위 때 대법관회의에서 후임자를 제청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자기의 의중의 인물이 아니라고 하여 이를 묵살하고 장기간 공석으로 비워둔 일이 있었다.
대통령의 대법원장 임명은 대법관회의의 제청과 국회의 동의만 있으면 되는 요식적인 절차였음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실제로 인사권을 행사했다.
이런 교훈에서 사법부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헌법에는 인사권의 독립을 기하려 했던 것이다.


끝으로 정당보호에 깊이 배려했다는 점이다.
정당의 해체를 행정부의 재량에 맡기지 않고 정당의 목적이나 헌법의 민주적 기본 질서에 위배될 때는 헌법재판소의 판결로써 정당 해산을 명령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앞서 지적한 내각책임제 정부형태, 기본권 신장, 사법부의 독립, 정당보호 등은 지금까지 헌정의 경험을 통한 민주화 실현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개정 헌법에는 혁명과업 수행을 위한 관계 조항은 한두 구절도 삽입되어 있지 않았다.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은 당시 정국의 흐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소급입법은 문명국의 수치이며 민주국가에선 있을 수 없다.
나치 치하의 독일과 군국주의하의 일본 헌법에도 그런 규정은 없으며, 정치보복은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된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소급입법 불가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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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는 미완성의 혁명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런 사유보다도 내각책임제 개헌을 위해 자유당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민주당 구파는 자유당 의원들과의 관계에서 정치적인 선을 훨씬 넘어 인간적으로 깊은 유대를 맺고 있어 정치 이전에 인간이란 측면에서 혁명 분위기를 흩뜨릴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5월 23일 과도정부가 3·15부정선거 조사를 위해 이재학을 포함한 67명의 자유당 의원들에 대한 구속 등을 국회에 요청했을 때 민주당의 신파와 구파의 반응은 엇갈렸다.
구파는 이재학을 구해야 한다는 반응이었던 데 비해, 신파는 총선 이후 국회에서 구파와의 제휴를 경계했고 그를 정계에서 제거함으로써 자유당의 와해를 노렸다.
신파와 구파 양파는 혁명과업 수행이라는 측면보다는 사사로운 감정과 자파의 이해득실의 자(尺)로 문제를 재려고 했다.
이는 민주당이 바로 혁명 주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이다.
얻어진 떡과 내가 만든 떡 사이에는 인식과 소중함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었다.
민주당이 집권 9개월 만에 단명으로 몰락한 원인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4·19혁명에 대해서는 여러 각도에서 연구되어진 바가 많다. 혁명이냐, 의거냐에서부터 역사적 의의와 혁명의 사회적·경제적 배경 및 갈등의 구조까지 분석한 논문들이 많다.
여기서 이런 것들을 일일이 언급하며 논의할 필요는 없겠지만 혁명과업 수행과 정치보복의 문제에 관해서만은 언급할 필요가 있다.
혁명과업 수행과 정치보복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한다.
시민혁명이란 오랜 세월 억압과 부정, 부패 등으로 시민의 가슴에 응어리졌던 것이 폭발한 것이다.
따라서 그 뒤처리는 이에 상응하는 조치가 뒤따라야 마땅하다.
이것이 바로 혁명과업의 수행인 것이다.
이는 역사의 단죄와 더불어 과오를 매듭 짖는 일이다.
이런 과정에서 설혹 개인의 신상문제나 재산회수가 발생하더라도 이는 결코 사감에 얽힌 보복이 아니며, 혁명과업 수행과 정치보복 어느 한 쪽을 위해서 다른 한 쪽이 과격하거나 미온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4·19혁명의 처리는 정치보복을 피한다는 명분으로 민주당 신·구파와 자유당 사이의 이해갈등, 내분 때문에 비혁명적으로 처리된 점이 많았다.
일반적으로 시민혁명의 기본 목표는 첫째, 독재자를 타도하고, 둘째, 독재자가 의거했던 정치 및 사회제도를 개편하며, 셋째, 독재자와 결부했던 구지배 세력을 제거하고, 넷째, 새로운 경제 질서를 확립하며, 다섯째, 새로운 사회풍토를 조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4·19혁명은 독재자를 타도하고 그가 의거했던 정치와 사회제도를 개편하기는 했지만 그 밖의 것들은 달성하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4·19혁명은 미완성의 혁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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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만능 정치풍토 쇄신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1960년 6월 5일 국회에서 역사적인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통과되자 국민의 다음 관심사는 총선에 있었다.
과도정부의 기간은 짧을수록 좋다는 인식하에 8월 15일 새 공화국 출범을 목표로 하는 총선을 7월 29일로 정했다.
제5대 민의원 선거와 초대 참의원 선거가 동시에 실시되는 7·29총선의 의의는 대단히 컸다.


첫째, 시민혁명으로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선거를 통해 국민이 선택하는 새로운 공화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은 국민 정치역량의 향상이며 정치적 근대화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정치적으로 외형만 민주체제를 갖추었던 전통사회의 민주사회 실현으로의 이행이었다.


둘째, 권위주의적 권력만능의 정치풍토를 쇄신하고 민권신장의 새로운 정치질서를 확립할 수 있는 전기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지금껏 선거 때마다 관권의 개입과 타락, 부정 등이 난무하던 선거풍토를 배격하고, 공명선거를 보장하여 민의가 바르게 반영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 것이었다.


셋째, 내각책임제에서의 총선이므로 단지 의회를 구성하는 종전의 총선과는 그 성격이 달라 곧바로 정권을 창출한다는 데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이같이 7·29총선은 헌정사적 의의가 컸던 데 비해 정당 사이의 집권에 대한 경쟁은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민주당은 체제와 규모를 갖춘 제일 야당으로서 반독재 투쟁을 줄기차게 해왔고 4·19혁명의 선도적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국민에게는 당연한 집권 대체세력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반면 자유당은 반민주세력으로 지탄을 받아 지리멸렬하게 된 채 혁명적 분위기에 압도되었으며 완전히 실의에 빠져 있었다.
이들은 위원회를 구성하고 당의 유지를 기도한 바 있었으나, 수구세력보다 해체를 주장하는 혁신세력이 우세하여 소속의원 138명 중 105명이 이탈했고, 6월 12일 개최된 임시전당대회는 청산대회가 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이들은 내심 이범석과 같은 인물이 등장하여 자유당을 재건하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했지만, 5월 29일 이승만이 하와이로 망명하는 바람에 희망을 버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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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의 혁신세력 정치일선에 등장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4·19혁명 후 과도정부의 상황이었지만 시민의 자유와 기본권이 어느 정도 보장되었다.
이에 따라 그동안 억눌렸던 민중은 경쟁적으로 불만과 욕구를 터뜨렸는데, 지하에 숨어 있던 혁신세력도 정치일선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활성화를 시도한 것이 노동부문이었다. 1959년 10월 26일에 결성된 전국노동조합협의회는 대한노총의 어용성을 규탄하면서 사업장 수준의 단위노조들을 개편하고 포섭해 나갔다.
그 결과 김낙중의 『한국 노동운동사』에 의하면, 4·19혁명 이후 5월 한 달 동안에 16만 명의 노조원을 흡수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신규노조 결성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1960년 초에 569개이던 노동조합이 7월에는 760개, 연말에는 914개로 늘었다.


이 시기의 노동운동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비생산직 노동자 계급인 교사, 은행원, 기자 등의 화이트칼라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이다.
특히 교원노조는 규모에 있어서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었으며, 허정 과도정부와 이후 장면 정부와 직접적인 투쟁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여타의 노동부문에 비해 의의가 컸다.
이목의 『한국 교원노동조합 운동사』에 의하면, 교원노조는 4월 29일 대구교조의 결성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7월 17일 전국대의원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최초의 전국적인 단일노조로 조직되었다.
이 과정에서 허정은 교원노조를 불법화하고 탄압을 가했다.


노동부문과 달리 조직화할 수 있는 기반이 결여된 농촌부문은 1960년 5월 11일 양민학살 진상규명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이는 거창 양민학살 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것이었다.
그해 5월 초 거창 양민학살 사건의 만행이 적나라하게 폭로되자 유족들이 각지에서 피학살자 유족회를 결성하고 학살진상 규명과 학살자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고 나섰다.
한국정치연구회가 발간한 『한국 정치사』에 의하면 유족회는 각지의 군 수준에서 개별적으로 결성된 후 6월 15일에는 경상북도 유족회, 8월 28일에는 경상남도 유족회, 그리고 10월 20일에는 전국유족회 등 전국적으로 발전했다.
이 운동은 외형상으로는 피학살자들의 명예회복과 학살자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본질적으로 제1공화국을 포함한 국가기구의 시민사회에 대한 억압 및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규탄 및 도전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한편 허정 과도정부의 이념적 한계가 명백해지고 민주당과 자유당이 야합하여 개헌을 추진하자 혁신세력과 청년학생들은 반혁명세력 규탄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혁신세력은 “일부 부패한 보수반동 세력은 그들의 악질적이며 집요한 반혁명적 기도를 차츰 노골화하여 애국적이며 혁명적인 세력의 진출을 저지하기에 광분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반혁명 기도를 분쇄하기 위한 공동투쟁조직인 반혁명세력 규탄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이후 총선 국면에 접어들면서 이 운동은 자유당계 후보자를 사퇴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투쟁 형태로 전환되었다.


과도정부 하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혁신계 정당은 사회대중당이었다. 이 당은 1950년대의 진보당 간부들이 주축이 되어 간첩혐의로 처형된 조봉암하의 진보당 이념과 정강정책의 대부분을 계승하여 5월 13일 발기대회를 가진 데 이어 6월 17일 창당준비대회를 조직하고 서상일, 윤길중 등을 간부로 선출하여 창당 작업에 착수, 그해 11월 24일 출범했다.


이와 별도로 4·19혁명 직후에 정당 간판을 내걸고 7·29총선에 입후보자를 낸 한국사회당, 혁신동지총연맹 등이 있었다.
혁신동지총연맹은 독립운동가인 장건상, 김창숙, 조경한, 정화암, 김학규, 유림 등 혁신계 원로급이 중심이 되어 조직했다.
특히 장건상은 조선 공산주의 운동에 깊이 관여했으며, 해방 후에는 여운형과 노선을 같이하여 건국준비위원화-인민공화국-근로인민당의 계열에 섰던 혁신운동계의 주요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단체는 혁신세력의 단결을 호소했을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있었다.


통일사회당은 1961년 1월 21일에 결성되었고,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는 1960년 9월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혁신동지총연맹, 천도교, 유교회, 민주민족청년동맹, 4월 혁명 학생연합회 등 혁신계 정당 및 사회단체가 연합해서 결성되었다.
중립화 조국통일운동총연맹은 1961년 2월 21일 통일사회당, 삼민회, 광복동지회 등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를 이탈한 정당 사회단체가 결성한 통일운동단체였다.


이들과 대조되는 혁신 정당이 고정훈의 사회혁신당이었다.
1950년대 진보당원과 민주혁신당원을 모두 거친 고정훈은 제4대 국회가 개헌작업을 추진하는 것 자체가 불합리하다고 주장했으며, 민주당 간부들을 포함한 보수정치인 및 구혁신계 정치인들은 모두 정계에서 퇴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고정훈은 비정치적 분야에서의 남북한 교류와 적절한 시기에 남한 내에서 공산당 활동의 합법화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고정훈의 이런 급진적 정치운동은 보수 세력의 즉각적인 반발을 초래했고, 민주당과 허정은 고정훈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1960년 7월 그를 구속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사회혁신당은 선거에서의 승리보다는 기존 정치구조의 즉각적인 개혁을 강조했던 좀더 급진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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