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의 혁신세력 정치일선에 등장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4·19혁명 후 과도정부의 상황이었지만 시민의 자유와 기본권이 어느 정도 보장되었다.
이에 따라 그동안 억눌렸던 민중은 경쟁적으로 불만과 욕구를 터뜨렸는데, 지하에 숨어 있던 혁신세력도 정치일선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활성화를 시도한 것이 노동부문이었다. 1959년 10월 26일에 결성된 전국노동조합협의회는 대한노총의 어용성을 규탄하면서 사업장 수준의 단위노조들을 개편하고 포섭해 나갔다.
그 결과 김낙중의 『한국 노동운동사』에 의하면, 4·19혁명 이후 5월 한 달 동안에 16만 명의 노조원을 흡수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신규노조 결성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1960년 초에 569개이던 노동조합이 7월에는 760개, 연말에는 914개로 늘었다.


이 시기의 노동운동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비생산직 노동자 계급인 교사, 은행원, 기자 등의 화이트칼라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이다.
특히 교원노조는 규모에 있어서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었으며, 허정 과도정부와 이후 장면 정부와 직접적인 투쟁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여타의 노동부문에 비해 의의가 컸다.
이목의 『한국 교원노동조합 운동사』에 의하면, 교원노조는 4월 29일 대구교조의 결성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7월 17일 전국대의원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최초의 전국적인 단일노조로 조직되었다.
이 과정에서 허정은 교원노조를 불법화하고 탄압을 가했다.


노동부문과 달리 조직화할 수 있는 기반이 결여된 농촌부문은 1960년 5월 11일 양민학살 진상규명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이는 거창 양민학살 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것이었다.
그해 5월 초 거창 양민학살 사건의 만행이 적나라하게 폭로되자 유족들이 각지에서 피학살자 유족회를 결성하고 학살진상 규명과 학살자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고 나섰다.
한국정치연구회가 발간한 『한국 정치사』에 의하면 유족회는 각지의 군 수준에서 개별적으로 결성된 후 6월 15일에는 경상북도 유족회, 8월 28일에는 경상남도 유족회, 그리고 10월 20일에는 전국유족회 등 전국적으로 발전했다.
이 운동은 외형상으로는 피학살자들의 명예회복과 학살자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본질적으로 제1공화국을 포함한 국가기구의 시민사회에 대한 억압 및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규탄 및 도전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한편 허정 과도정부의 이념적 한계가 명백해지고 민주당과 자유당이 야합하여 개헌을 추진하자 혁신세력과 청년학생들은 반혁명세력 규탄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혁신세력은 “일부 부패한 보수반동 세력은 그들의 악질적이며 집요한 반혁명적 기도를 차츰 노골화하여 애국적이며 혁명적인 세력의 진출을 저지하기에 광분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반혁명 기도를 분쇄하기 위한 공동투쟁조직인 반혁명세력 규탄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이후 총선 국면에 접어들면서 이 운동은 자유당계 후보자를 사퇴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투쟁 형태로 전환되었다.


과도정부 하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혁신계 정당은 사회대중당이었다. 이 당은 1950년대의 진보당 간부들이 주축이 되어 간첩혐의로 처형된 조봉암하의 진보당 이념과 정강정책의 대부분을 계승하여 5월 13일 발기대회를 가진 데 이어 6월 17일 창당준비대회를 조직하고 서상일, 윤길중 등을 간부로 선출하여 창당 작업에 착수, 그해 11월 24일 출범했다.


이와 별도로 4·19혁명 직후에 정당 간판을 내걸고 7·29총선에 입후보자를 낸 한국사회당, 혁신동지총연맹 등이 있었다.
혁신동지총연맹은 독립운동가인 장건상, 김창숙, 조경한, 정화암, 김학규, 유림 등 혁신계 원로급이 중심이 되어 조직했다.
특히 장건상은 조선 공산주의 운동에 깊이 관여했으며, 해방 후에는 여운형과 노선을 같이하여 건국준비위원화-인민공화국-근로인민당의 계열에 섰던 혁신운동계의 주요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단체는 혁신세력의 단결을 호소했을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있었다.


통일사회당은 1961년 1월 21일에 결성되었고,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는 1960년 9월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혁신동지총연맹, 천도교, 유교회, 민주민족청년동맹, 4월 혁명 학생연합회 등 혁신계 정당 및 사회단체가 연합해서 결성되었다.
중립화 조국통일운동총연맹은 1961년 2월 21일 통일사회당, 삼민회, 광복동지회 등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를 이탈한 정당 사회단체가 결성한 통일운동단체였다.


이들과 대조되는 혁신 정당이 고정훈의 사회혁신당이었다.
1950년대 진보당원과 민주혁신당원을 모두 거친 고정훈은 제4대 국회가 개헌작업을 추진하는 것 자체가 불합리하다고 주장했으며, 민주당 간부들을 포함한 보수정치인 및 구혁신계 정치인들은 모두 정계에서 퇴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고정훈은 비정치적 분야에서의 남북한 교류와 적절한 시기에 남한 내에서 공산당 활동의 합법화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고정훈의 이런 급진적 정치운동은 보수 세력의 즉각적인 반발을 초래했고, 민주당과 허정은 고정훈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1960년 7월 그를 구속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사회혁신당은 선거에서의 승리보다는 기존 정치구조의 즉각적인 개혁을 강조했던 좀더 급진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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