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에 교두보 확보하려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민주당은 혁명과업 수행에 필요한 특별법을 제정하기 위해 헌법 부칙에 소급입법의 길을 열어두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자유당 의원들의 반발 때문에 당론은 후퇴하고 말았다.
또 한 가지 개헌작업의 진행과정에서 문제가 된 것은 자유당 의원들의 신변문제였다.
부정선거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면서 일부 자유당 의원들의 구속 사태까지 이르게 되자, 이들은 허정 수반과 권승렬 법무장관을 국회에 출석시켜 자유당은 정상적인 선거업무에 협력했을 뿐인데 의원들을 구속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졌다.
그리고 사태가 더 이상 악화 확대되면 개헌에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자유당은 대세에 밀려 민주당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는 것 같았지만 혁명의 여파를 최소화하려는 완고한 고집을 부린 것이다.


이로 인해 과도정부는 혁명의 뒷처리를 과감하게 수행하지 못했고, 민주당 구파도 내각책임제 개헌을 관철하기 위해 자유당의 반발을 무마시키는 데 급급했다.
자유당이 유일하게 의지할 곳은 국회였으며, 그들이 앞으로 살아남는 길도 내각책임제 개헌으로 국회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민주당의 구파는 자유당의 이런 입장을 십분 활용했다.
4월 26일에 의결한 국회의 시국수습 결의안 가운데 3항인 “과도체계 아래서의 내각책임제 개헌 단행” 항목을 적극 추진하기 위해 개헌기초위원회 구성에 박차를 가했다.
구파의 서범석은 “우리가 시국수습의 소리만 외쳐댈 것이 아니라 결의를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옳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개헌기초위원 선정을 제안했다.
이 제안에 어느 누구도 반대할 수 없었다.
신파 측이 내심으로 달갑지 않게 생각했더라도 반대할 명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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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섭 의원 격무로 별세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국회는 4월 29일 민주당 자유당 양당 4명씩과 무소속 1명으로 개헌특위 기초위원회를 구성했다.
자유당에서 이재학, 박세경, 이형모, 정운갑, 민주당에서 엄상섭, 조재천, 정헌주, 윤형남, 그리고 무소속의 황호현 의원이 선정되어 9명으로 구성되었고, 위원장에 엄상섭 의원이 선정되었다.
개헌특위는 연일 회의를 거듭하여 그 과정에서 엄상섭 위원장이 과로로 졸도 사망했고 후임에 정헌주 의원을 뽑는 등 불상사를 겪으면서도 개헌안 작성에 열성을 다했다.
개헌특위의 인선에서 보듯 자유당은 온건한 인물들이었고, 민주당은 기초위원 선정에까지 신파(엄상섭, 조재천)와 구파(정헌주, 윤형남)로 나뉘었다.


공법학회에서 개헌 초안을 만들어 국회에 보내오는가 하면, 개헌특위 주최로 공청회를 열어 국민의 여론을 수렴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렇게 각계의 의견을 청취하고 협의를 거듭한 개헌특위는 국회 제안 시한을 앞둔 5월 9일 개헌 요강 작성에 대체로 합의했다.
이런 작업이 즉시 국회해산을 주장하던 세론을 가라앉혔고, 국회해산 보류는 여야 의원들 사이에 합의된 사실처럼 되었으며, 언론들도 처음의 주장을 선회하여 현 국회에서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동조했다.
5월 2일 국회 본회의에서 민주당 구파의 조영규 의원 외 12명의 명의로 긴급동의 안을 제출했다.
내용은 개헌특위는 10일까지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할 것과, 과도정부는 정·부통령 선거를 내각책임제 헌법이 개정되어 공포될 때까지 보류하라는 것이었다.
이 긴급동의 안은 가결되었다.


그러나 이 동의안은 앞서 국회에서 의결한 시국수습안의 제2항과 정면으로 배치되어 2항목을 완전히 사문화시켰다.
제2항은 3·15선거를 무효로 하고 재선거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불과 6일 만의 대변화였다.
더구나 5월 1일 과도정부가 3·15부정선거 무효를 확인한 다음날이었다.
이것은 상황의 변화에서 온 결과가 아니라 민주당 구파와 자유당의 합세에 신파가 밀리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국회의 시국수습 결의안은 정파 간의 타협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각 항 사이에는 상충된 점이 있었던 것인데, 그 모순이 바로 노출된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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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안 마련에 불과 2주일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당시 학생들을 포함해서 많은 정치인들과 언론들은 기존 국회를 즉시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해서 새 국회를 구성한 뒤 헌법개정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모처럼 국회의 주도권을 장악한 민주당은 국회를 즉시 해산할 경우 정치적 공백이 생겨 무질서가 생길 우려가 있다면서 현 국회에서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민주당의 신파와 구파의 정치적 대립과 정치적 계산에 따라 자당의 이익추구를 앞세웠기 때문이었다.
헌법개정은 자유당이 바라던 바라서 추진될 수 있었는데, 개정을 통해 자유당은 자당을 보호하려고 했고, 그럴 만한 영향력도 아직은 가지고 있었다.
민주당을 공산주의자들로 기소한 검사들이 자유당의 반대로 62 대 73으로 부결된 것만 보아도 아직 자유당이 건재함을 말해 주었다.
자유당은 헌법개정이라는 정치적 지렛대(political leverage)를 십분 이용해서 미래의 정치적 기회를 마련하려고 했다.


내각책임제 개헌안은 비교적 쉽게 정리되었다.
이는 민주당이 그 전신인 한국민주당 때부터 주장해 왔던 것인데, 6·25전쟁과 부산 정치파동 때 두 번이나 국회에 제안 상정한 경험이 있었다.
때문에 개헌안을 마련하는 데는 불과 2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민주당은 완전한 표결방법을 모색했다.
기명투표로 반란표를 예방하자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회법을 개정해야만 했다.
6월 1일 민주당의 서범석, 이태용 의원들 등에 의해 국회법 개정안이 제안되었다.
제안 이유에서 헌법개정의 안전을 기하기 위해 기권, 무효 등의 산표 방지와 국회의원의 개헌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하는 데 있다고 했다.


이것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4사5입 개헌 통과 때 자유당이 기명투표를 주장한 일이 있었다.
이때 자유당은 자당의 기명투표 주장 논리도 국가기본법의 개정은 중요하기 때문에 국회의원들의 의사를 출신 유권자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했었다.
그때 야당 의원들은 발췌개헌 때 기립표결로 의원에 대한 표결의 자유를 박탈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강력히 반대했으므로 자유당은 끝내 관철할 수 없었다.
그런데 불과 5년 사이에 입장이 바뀌어 민주당이 자유당의 표를 강요하기 위해서 기명표결을 요구한 것이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현상이었다.
찬반 토론과정에서 일부 자유당 의원들의 반대토론이 있었으나 국회법 개정안은 가결되었다.
이토록 혁명의 외압적 외세는 대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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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선거 원흉 구속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이 시기에 국민의 관심은 자연히 4·19혁명의 뒷처리에 있었다.
혁명적 분위기에 들뜬 학생과 시민들은 3·15부정선거의 주역들과 4·19혁명 때 살상행위를 자행한 자들의 처벌을 요구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첫째, 부정선거 원흉들을 처단할 것, 둘째, 발포책임자들을 색출할 것, 셋째, 부정축재자들을 척결할 것, 넷째, 정치깡패의 처벌 등이었다.
허정 수반은 4월 28일 3·15부정선거에 관한 처리에 관해 의견을 밝힌 바 있었다.
그는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3·15부정선거의 책임소재를 밝히고 엄정히 다스리겠다”고 다짐했다.


검찰은 과도정부의 방침에 따라 먼저 3·15부정선거 당시 내무장관으로 국회의원을 겸하고 있던 최인규를 구속하는 한편, 법무장관 김일환, 교통장관 김일환, 재무장관 송인상, 농림장관 이근직, 문교장관 최재유, 부흥장관 신현확, 보사장관 손창환, 상공장관 구용서, 서울 시장 임흥순, 부시장 최응복, 경무관 곽영주, 치안국장 이강학, 치안국 특정과장 이상국, 내무차관 이성우, 내무부 지방국장 최병환, 내무국장 김용진, 시경 국장 유충렬, 시경 치안과장 조인구, 시경 보안과장 고상원, 시경 경비과장 백남규, 공보실장 전성천, 경무대 비서관 박찬일, 자유당 선거사무장 한희석 의원, 반공청년단장 신도환, 자유당 기획위원인 이중재, 임철호, 이재학, 장경근, 박원만, 정문흠, 정존수, 이존화, 정기섭, 박용익, 조순 등을 차례로 구속했다.


이들 부정선거의 원흉과 발포책임자, 정치깡패 등에 대한 재판은 과도정부에서 장면 정권과 군사 쿠데타 정권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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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의 붕괴

<한국정당정치 실록>(도서출판 지와 사랑) 중에서





5월 29일에는 이승만 내외가 하와이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이어 6월 2일에는 손영수 의원 등 94명의 자유당 의원들이 집단 탈당을 선언했다.
138명의 자유당 의원들 가운데 이기붕이 사망하고 한희석, 장경근, 최인규, 이재학, 임철호, 이익흥 등 당 지도부가 사직당한 데다 94명이 집단 탈당하자 자유당은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6월 15일에 이르기까지 9명의 의원들이 계속 당을 떠났다.
이로서 자유당은 사실상 붕괴된 셈이었다.
6월 1일 현재 자유당 의원 138명 가운데 105명이 당을 이탈했다.


자유당의 잔류파와 원외 인사들은 힘을 합해 제2공화국 아래서 제일 야당으로 기능해 보고자 노력했다.
조경규를 비롯한 재건파는 자유당의 지속적인 존속을 위해 소속 의원들의 일치단결을 강조했다.
이들은 6월 12일 정당대회를 개최하여 새로 구성되는 참의원에 11명의 후보를, 그리고 민의원에는 54명의 후보를 내세웠지만, 국민의 심판은 차가웠다.
자유당은 5대 민의원과 초대 참의원을 뽑는 7·29총선에서 참의원 58석 중 4석을, 민의원 233석 중 단 2석을 차지했을 뿐이다.
예상을 넘어선 참패로 야당으로나마 연명하고자 했던 자유당의 계획은 무산되어 결국 창당 10년 만에 해체되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한승주 교수가 『제2공화국과 한국의 민주주의』에서 분석한 대로 당시의 상황은 사실 자유당이 재건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허정 과도정부의 비혁명적 성격, 민주당의 신·구파 분열, 한국 정치 엘리트의 일반적 보수성 등의 호조건에다가 미대사관 측도 자유당을 야당으로 키우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재학의 회고록에도 미대사관 측이 여러 차례 그에게 사람을 보내 “자유당의 조직만은 고수해 달라”고 협의해 왔다고 적고 있다.


자유당이 왜 이러한 호조건 속에서도 붕괴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하는 이유는 그 창당과정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할 것이다.
자유당은 애초부터 어떤 정치적 이념을 중심으로 뭉친 조직이 아니라 이승만이라는 한 인물을 중심으로 출발한 당이었다.
자유당의 창당목적은 바로 이승만의 재집권에 있었던 것이다.
부산 정치파동과 4사5입 개헌파동을 일으키면서 자유당은 이승만을 영구집권의 위치에 올려놓는 이른바 그 창당목적에 충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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